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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만으로 견뎌내기에는 아픈 시절 그 해 여름
kharismania 2006-11-28 오후 2:41:40 877   [4]
사랑했던 기억. 사랑이 기억에 머문다는 것은 결국 과거에 사장되어버린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별은 여운을 남긴다. 물론 감정의 소멸로 인한 헤어짐은 후련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감정이 농후하지만 상황이 이별을 강요하는 경우가 있다. 현실이라는 벽앞에서 좌절해야만 하는 사랑은 잔존한 감정의 무게로 인해 가슴아플 수밖에 없다.

 

 감정과는 별도로 자리잡은 시대의 외압앞에서 사랑은 마치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위태롭다. 개인들의 감정이 그토록 애절하고 절실할지라도 강한 외풍처럼 불어오는 시대적 현실앞에 개인적인 사랑따위가 존재감을 지니기에는 미약하다. 이 영화는 시대라는 거대한 벽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던 애틋한 사랑의 기억담을 좇는다.

 

 희끗희끗한 머리가 나이를 짐작케하는 윤석영(이병현 역) 교수의 잃어버린 인연을 찾아가는 방송작가 수진(이세은 역)과 김PD(유해진 역)를 통해 시작되는 영화의 속깊은 사연은 석영의 뜨거웠던 그해 여름으로 기억을 되감긴다. 그 시절에 그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해 여름 그는 누구를 만났고 그 기억속에서 누구를 찾고 싶은 것일까.

 

 박정희 정권의 유신시대, 혈기왕성한 대학생들이 운동권이란 이름으로 명명되어지던 시절. 그 시끄럽던 시절안에서 세월따윈 알바아니라는 듯 시큰둥하게 살아가던 석영은 아버지의 성화를 피해 도피하듯 친구 석균(오달수 역)을 따라 농활을 내려간다. 하지만 역시 농활에 목적이 없던 석영은 항상 농떙이를 친다. 어느 이른 아침 자전거를 타고 나가던 석영의 눈에 서정인(수애 역)이 들어온다. 그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여자. 그곳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서서히 그 낯선 인연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서울에서도 시골에서도 시대는 존재한다. 북으로 넘어간 가족이 있으면 그 나머지 가족들이 빨갱이 가족으로 몰리던 연좌제가 시퍼렇던 시절. 정인은 그 굴레안에서 고통을 겪는 자다. 독재라는 미명하에 비협조적 인사들을 빨갱이로 모함하던 시절. 분단의 아픔이 독재의 위선으로 이용당하던 시절. 그것이 그 시절 그 거리의 표정이고 비겁함에 그럴듯한 변명을 부여하는 근거가 되는 시절이었다. 그 시절은 이 영화의 여백이 된다. 배경이 되는 시절은 마치 달아나듯 서울을 떠나 농활을 떠나는 석영의 언저리에 숨을 죽이고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시대는 석영을 놓아두지 않는다. 오히려 시대를 방관하던 석영이 그 시대안에서 아픔을 겪어야되는 상황의 도출은 아이러니하며 그로부터 파생되는 건 역설적인 상황만큼 진해지는 덧없는 슬픔이다.

 

 우연의 틈새를 파고드는 사랑의 징조는 그 존재만으로도 특별하다. 평범한 순간을 특별한 순간으로 포장하는 것은 그 감정이 그 순간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무료한 도피의 장에서 서울을 그리워하던 석영이 서울에 올라가고 싶지 않은 건 사랑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지겹고 따분한 공간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빌미로 생동감을 얹는다. 그 순수한 사랑의 전조가 점점 무르익어가는 여름의 풍경은 아름답다. 문득 내리는 소나기처럼 예고없이 찾아온 사랑이 순수한 예감에서 뜨거운 열병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사랑은 지극히 불안하다. 겉껍질같던 시대가 그들의 사랑을 잡아먹어버릴때 그 사랑의 순간적인 증폭은 지속성이 희미해진다. 그것은 감정의 지속과는 별개의 문제다. 오히려감정이 지속되기에 가슴아픈 사연으로 묵어가는 것이다. 그 데모의 현장에 자리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취조를 당해야하는 석영과 정인은 시대라는 배경이 단순히 뒷배경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각별하게 보여준다.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시대의 아픔을 느끼게 한다. 암스트롱의 달착륙앞에 달이 미국땅이 되는것인가를 논하는 농촌의 순박한 정서도 빨갱이앞에서는 매몰차다. 그것은 자신에게 튈 불똥을 막아낼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곳을 떠나는 정인에게 서울은 더더욱 무시무시한 딜레마를 보여준다. 아버지가 물려준 빨갱이의 족쇄는 그녀의 사랑과 함께 삶을 뒤집어버린다.

 

 두사람이 겪는 두번의 엇갈림은 사랑이라는 개인적 소신이 이뤄지지 못하는 시대의 정치성과도 맞닿는다. 유신독재 아래서 그것에 항거하는 이들이 무자비한 진압으로 신음하는 것처럼 개개인이 이루고자 하는 현실은 세월의 그늘아래 짓눌려 시름한다. 석영과 정인의 첫 엇갈림은 시대라는 벽에 의한 타성적 결과물이지만 두번째 엇갈림은 시대를 인지하고 돌아섬을 택한 자의적 결과물이다. 현실이라는 파도에 휩쓸려 자신의 몸을 가누어야만 하는 상황으로부터 엮어지는 우연과 필연의 엇갈림.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도 시대앞에서는 미약한 감성에 불과하다. 그 순수한 감정이 비열한 시대에 짓밟여가는 과정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만큼 서글픈 아픔이 된다.

 

 뜨거웠던 불볕만큼이나 뜨거웠던 여름의 사랑은 몸을 녹일 것만 같은 열병처럼 찾아왔다가 도망가버린다. 사랑으로 버티기에는 아픈 시절이었다. 삶을 위해 비겁해져야만 했고 그 시절을 통과하지 않은 이의 비난은 무색해져야 하는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여름에 맡았던 편백나무의 향기가 아른거리듯 그시절의 사랑은 여전히 석영의 마음을 흔든다. 사랑이 있었고 그해여름은 뜨거웠다. 그 시절이 아팠기에 그 사랑도 아팠고 세월이 지났기에 그 사랑이 그리운거다. 세월앞에서 이별을 감당해야 했다는 영화의 사연은 그래서 그만큼 애절하고 가슴시리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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