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에 저항하는 소녀의 판타지
스페인 내전은 그것이 세계의 양심(그런 게 있다면)에 남긴 깊은 상처를 고려해볼 때, 의아스러울 정도로 잊혀진 사건이다. 2차 세계 대전에 묻혔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어쩌면 수치심에 잊고 싶은 기억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선택적 기억).
1936년 선거로 인민전선이 승리하자, 교회(카톨릭)·자본가·군부를 중심으로 한 우익 파시스트 진영은 프랑코를 중심으로 군부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에 공화주의자들은 노동자를 중심으로 중산층과 농민이 합세한 무장 봉기로 맞서게 된다. 파시스트의 준동에 영국과 프랑스, 미국은 불간섭 주의를 천명, 공화주의자들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독일·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당은 공식적으로 프랑코 반란군에 무기를 지원하였고, 이에 혁명을 성공한 소련은 인민전선 측에 무기를 지원하면서 맞서게 된다.
프랑코 반란군과 파시스트 세력에 맞서기 위해 유럽 등 세계 각국의 공화주의자, 민주주의자, 그리고 좌파 세력은 스페인에 의용군(프랑스 1만, 미국 2천 800명 등 전세계 55개국으로부터 수 만 여 명의 국제의용군이 소집)을 보낸다.(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 어떻게 보면, 스페인은 당시 세계적인 공화주의 대 파시스트, 민주 대 독재의 첨예한 대립이 집중된 지역이었다.(이 과정에서 독일군에 의한 게르니카 참상이 발생한다)
한 때 이러한 국제의용군의 지원에 힘입어 인민전선으로 승리가 기우는 듯이 보이기도 했지만, 인민전선 내부의 분열(이 과정도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에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등으로 1939년 프랑코 반군이 마드리드에 입성함으로서 파시스트 체제가 최종 승리를 거머쥐게 된다.
바로 영화 '판의 미로'는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한 파시스트 군부가 공화주의자 진영의 일부 저항세력을 추격하는 1944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전혀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 이 영화가 한 어린 소녀의 순수한 판타지라고 생각했고, 아마도 '반지의 제왕'과 '나니아 연대기'의 중간 정도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어쩌면 해리포터 정도?) 그러나 이 영화는 잔인할 정도로 당시 암울한 현실을 직시한 영화였으며, 어린 소녀의 판타지에 의존하는 것만이 그 암흑에서 탈출할 유일한 방법이란 사실이 너무 안타까운 영화였다.
내가 너무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녀의 판타지와 스페인 내전 상황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으며, 감독의 전작 '악마의 등뼈'(전작이라 함은 헐리웃에서 제작한 영화를 제외한 의미이다.)와도 논리적 연관성을 갖는다.
오필리아의 새 아버지는 파시스트를 대표하는 인격체로서 무자비하며 냉혹한 군인이다. 그는 오필리아가 왼손을 내밀자 악수는 오른손으로 하는 것이라며 거칠게 뿌리친다. 융통성 없는 파시스트 같으리라고!!! 오필리아의 꿈과 상상력도 인정하지 못하는 새아버지는 실제 파시스트의 정치적 성격과 동일하다.
오필리아가 이런 냉혹한 현실(새아버지가 지배하는=파시스트가 지배하는)에서 벗어하는 길은 자신이 사실은 지하세계의 공주이며, 그곳은 행복만이 가득찬 곳이라는 상상이다. 오필리아는 낡은 석상에 앉아 있던 곤충(여치?)을 보고 요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 곤충에게 책에 있는 요정 그림을 보여주자 곤충도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요정의 모습으로 변한다.
판이 제시한 첫번째 미션-황금열쇠를 찾아라. 나무가 말라 비틀어져 가는(말살되어 가는 자유와 평등, 공화주의, 민주주의) 이유는 그 지하에 사는 거대한 두꺼비(파시스트) 때문이다. 오필리아는 벌레들이 꿈틀대는 어두운 통로를 기어 탐욕스러운 두꺼비에게 챙피한 줄 알라며 일갈한 후 두꺼비의 배속에 들은 황금열쇠를 찾아온다.
두번째 미션-음식을 먹지 말라. 마법분필로 문을 만들어 지하로 내려간 오필리아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는 거대한 식탁을 지나 황금열쇠로 금고를 열어 그 안에 든 칼을 꺼내는데 성공한다. 식탁 끝에는 괴상하게 생긴 괴물이 잠을 자고 있는데, 음식을 먹지만 않으면 깨어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너무 쉬운 미션인데, 문제는 오필리아가 너무 배고프다는 것. 부를 독점하려는 파시스트의 탐욕을 표현한 듯한 느낌도 받았는데, 현실에서의 파스시트들도 고작 빵 한개를 주민들에게 나눠주면서 프랑코 총통의 은혜라며 온갖 설레발을 친다.
마지막 미션은 사랑하는 남동생의 희생. 가장 아끼는 것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오필리아가 상상하는(?) 판타지와 함께 파시스트와 공화주의자의 대결을 축으로 한 영화 속 현실도 판타지의 전개에 맞춰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급박하게 전개된다. 이 대결에선 의외로 잔인한 장면들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전투 중에 잡힌 의용군은 심한 고문 끝에 의사에게 제발 죽여달라며 사정하고, 계부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면서 의용군을 도와주고 오필리아를 보호하려고 노력하는 메르세데스는 계부에게 잡히지만 칼로 계부의 입을 찢고 탈출에 성공하는 장면 등.(괜히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라고 생각해 같이 보러갔다가는 깜짝 놀랄 수 있으므로 주의!! 결코 어런이들을 위한 영화가 아님!!!)
결국 공화주의자들은 계부와의 전투(!)에서 소중한 승리를 이루지만, 영화 밖 현실에서는 프랑코 독재가 승리하며 이후 수십년 동안의 독재 체제를 유지한다.(프랑코 독재 치하에서 많은 사람들이 암살되고 감옥에 갇히고 외국으로 도망친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더 안타까우며, 분명히 오필리아의 꿈이 이뤄진 듯 보이는 결론도 메르세데스의 눈물만큼이나 슬픈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물론 이 영화에 나오는 많은 기묘한 캐릭터들을 구경하는 것도 꽤 쏠쏠한 재미를 안겨준다. 개인적으로는 그 중에서 맨드레이크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판이 아픈 어머니의 치료를 위해 오필리아에게 갖다 준 맨드레이크는 아기 형상을 한 식물의 뿌리인데, 꿈틀꿈틀 대는 게 꽤 징그러웠다. 이 맨드레이크는 해리 포터 시리즈에도 등장하는데, 해리 포터에서의 맨드레이크는 끔찍한 비명소리를 내며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상처를 입거나 심한 경우 죽기도 하기 때문에 귀마개를 하고 다뤄야 한다.
파시스트가 지배하는 암울한 현실에 저항하는 소녀의 꿈을 판타지로 표현한 이 영화는 내게 최고의 영화로서 손색이 없다. (난 언제나 가장 최근에 본 가장 괜찮은 영화가 최고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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