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이 영화를 보기로 마음먹었다면 두가지 기로를 선택해야한다. '무간도'를 택할 것인가 '마틴 스콜세지'를 택할 것인가. 원작에 뿌리를 둔 리메이크물에게 원작과의 끊임없는 비교는 운명같은 속박이다.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역시 그 굴레의 속박을 벗어날 수 없다. 다만 그 굴레를 벗어난 또다른 시야의 확보는 가능하다. 그것은 이 영화를 잉태하게 한 '무간도'를 벗어나 '마틴 스콜세지'라는 산파의 손놀림에서 기인한다.
무간도(無間道)는 이미 붕괴된 홍콩느와르의 부활이라 할 정도로 센세이션한 작품이었다. 그 치밀하고 틈새없는 스토리에 담겨진 섬세하고 날카로운 감성적 치열함은 홍콩느와르가 지니지못했던 스토리텔링의 완숙함에 그들의 장기인 비정미의 색채를 능숙하게 덧씌워낸 홍콩 느와르의 뉴웨이브와도 같았다.
할리웃으로 넘어간 홍콩느와르의 원단이 어떤 스타일로 가공되었을지가 이 영화의 첫번째 방점이라면 그 가공된 상품의 공장장이 마틴 스콜세지라는 명인이라는 점이 이 영화의 두번째 방점이다.
일단 이 영화는 무간도의 감성을 대폭 거세시켰다. 또한 홍콩이라는 지정학적 감수성을 보스톤이라는 지역적 환경으로 치환함으로써 섬세한 감성적 고뇌보다는 치열한 현실적 고뇌를 채웠다. 아일랜드 이주민 출신의 하층민들이 거주하는 보스톤 남부의 열악함은 이 영화의 감정적 숙주와도 같다. 출신성분에서 오는 열등감은 영화의 두주인공인 빌리 코스티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역)과 콜린 설리반(맷 데이먼 역)에게 하나의 목표의식을 부여하는 동기와도 같다. 부둣가 하역 노동자였던 아버지를 제외한 일가가 범죄적 경력으로 찌들어버린 삶의 환경에서 달아나고자 경찰의 삶을 택한 빌리 코스티건이나 프랭크 코스텔로(잭 니콜슨 역)와의 우연한 만남에서 그의 슬하에서 성장하여 그의 끄나풀이 되기위해 경관이 되는 콜린 설리반 역시 성공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욕구안에 소속된 자이다.
이것이 디파티드가 무간도와는 다른 하나의 차별점이다. 지역성을 기반으로 하는 인물들의 성취욕구. 무간도에서 진영인(양조휘 역)이 범죄조직에 잠입했던 것은 그의 역량과 신념의 강직함때문이었다. 하지만 빌리 코스티건의 가족관계에서 드러나는 그의 밑바닥인생을 자극하는 딕넘(마크 윌버그 역)과 퀸넌(마틴 쉰 역)의 의도에 빌리 코스티건이 응답하는 대목에서 디파티드는 이미 무간도와 다른 영역에 서있음을 보아야한다. 경찰로써의 소명이 진영인을 이끌었다면 빌리를 이끈 것은 그의 상처투성이 과거로부터의 탈피 욕구다. 공적인 목적과 사적인 목적의 차이. 이것이 디파티드의 개별적 방점이다.
프랭크 코스텔로의 나레이션으로 영화는 포문을 연다. 그는 시작부터 말한다. '환경에 지배당하는 것은 질색이다. 나는 환경을 지배하는 것을 좋아한다. ' 그는 거리를 지배하는 자다. 그래서 그는 신부를 조롱하고 신을 모욕한다. 왜냐하면 그 거리안에서만큼은 자신의 유일함을 건드릴 이가 아무도 없다고 믿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인도되는 어린양은 결국 그의 경찰 끄나풀로 성장한다. 코스텔로가 어린 콜린에게 식료품을 안겨주고 동전을 쥐어주는 순간 콜린은 그순간 이미 비열한 거리로 들어섰다. 이미 그 거리에서 살아남는 방식에 탐닉한 콜린은 자신의 상승 욕구에 대한 대답을 다른 방식으로 얻는다. 그는 유능한 경찰의 탈을 쓰지만 여전히 갱으로써의 방식으로 삶을 지속시킨다.
결국 두 사내가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궤도에서 이탈한 이들이 보여주는 혼란스러움이다. 경찰을 꿈꾸었지만 갱의 탈을 써야하는 빌리나 갱으로써 얻는 편의를 지속시키기 위해 경찰의 탈을 쓰는 콜린의 모습은 그릇된 방식의 행동강령이다. 그로부터 도출되는 것은 인간적 나약함이다. 물론 그 그릇의 조바심은 환경적인 위기감의 심도가 강한 빌리쪽으로 기운다. 매일같이 위험한 고비를 넘기는 그는 언제 정체가 드러나 죽을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안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나간다. 하지만 그로부터 연민의 정서가 도출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 역시 개인적인 욕망에서 출발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진영인이 공적인 임무를 위해 개인을 버림으로써 그에게 쥐어지는 갈등적 요소는 그의 욕망에서 발현된 것이 아니기에 관객의 연민을 자극한다. 하지만 빌리의 그것은 다르다. 자신의 늪과 같은 과거에서 발을 빼기위한 개인적 희생에 기꺼이 응답하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연민이 아닌 자업적 성취의 힘겨움이다. 또한 콜린의 그것 역시 유건명(유덕화 역)의 그것과는 다르다. 유건명이 자신의 근원적 신분에서 달아나 위장되는 신분에 안착하고 싶어하는 소망의 간절함을 보인다면 콜린은 마치 게임을 즐기듯 그 위장신분과 근원신분을 넘나든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 위장신분에 안착하려 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신분에 매혹된 것이 아닌 자신의 신분의 이동에서 느껴지는 고단함과 위기감 때문이다. 신분적 이탈의 욕구라기보다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의 무게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코스텔로라는 캐릭터다. 그는 빌리와 콜린의 중간지점에 서있는 자이며 두 인물이 서로의 정체를 소통하게 만드는 중의적 위치에 서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두 인물의 심리적 대립을 가리기도 하고 고조시키기도 한다. 극을 꾸며가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은 분명 빌리와 콜린이지만 그 이야기의 정서를 지배하는 인물은 코스텔로이다. 물론 이는 잭 니콜슨이라는 배우의 역량에서 기인한 바일수도 있겠지만 스토리텔링의 측면에서 파생된 효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추구하는 것은 무간지옥의 판타지가 아닌 비열한 거리의 비정한 현실감이기 때문이다. 클래식하고 전형적인 갱의 면모안에서 해석되는 그들만의 법도는 무간도의 의리와는 다르다. 오히려 재미있는건 서양의 그것이 동양의 그것에 비해 친족의 모티브를 따라간다는 것이다. 콜린 등 코스텔로의 일당들은 코스텔로에게 아버지라는 지칭을 부여한다. 물론 이는 타인의 의심을 따돌리기 위한 단어적 설정에 불과하지만 그 설정이 나타내는 상징성은 그들이 취하고 있는 태도적 접근을 가능케한다. 무간도가 냉정할 정도로 개인적인 고립을 꾀했다면 디파티드는 집단적인 혼란을 부여한다. 그것은 영화를 잉태한 두 영화의 국적성과 거리의 질서가 다르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맥락과 이야기의 뼈대에서 두 영화는 큰 차별점을 보이지않는다. 물론 무간도와 다른 엔딩을 취한 디파티드에서 느껴지는 것은 무간도에 대한 강박관념이 아닌 이야기의 양상이 부르는 진술적 태도의 간극이라고 여겨진다. 국적의 차이로 인한 정서의 차이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두 영화를 다른 선상에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무간도의 페르소나라고 말하기에 디파티드는 언짢은 구석이 많다. 오히려 이야기적인 측면에서 도플갱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배다른 형제는 닮았지만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다. 가장 큰 차이는 무간도가 인물들의 어긋난 삶에서 페이소스를 끌어냈다면 디파티드는 그 결과물만을 취한다. 감성적 측면이 아닌 현실적 논리만을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형태적인 측면에서 느와르의 기법을 강화한다. 뒷골목의 쥐새끼를 처분하듯 갱들의 결말이 처하게 되는 피할수 없는 운명적 굴레를 극명히 다진다. -물론 이는 마틴 스코시즈가 말하는 갱의 어리석은 운명선안에서 지극히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발견되는 것은 무간도의 이야기적 닮음뿐이다. 만약 이 영화가 무간도의 정서를 취했다면 어떠했을까. 그것이 과연 디파티드에 어울리는 정서적 의상이라고 여길 수 있었을까에 또다른 의문이 얹혀진다.
마틴 스코시즈라는 새영화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자신만의 아우라를 지닌다. 물론 무간도와의 비교는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안에서 그의 모습을 발견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정서적 동의를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간도의 그늘이고 이야기의 유사성안에서 지루함을 느낀다면 무간도의 데자뷰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이 영화가 걷는 길이 무간지옥의 윤회적 방점이 아닌 비열한 거리위의 구원적 기도라는 것이다. 불교적 성향의 정서가 기독교적 성향의 정서로 치환되는 상황에서 발생되는 딜레마. 그것이 이 영화로부터 느껴지는 낯설음이자 놀라움의 중의적 모순이다. 리메이크라는 외피를 벗겨낸 영화의 내피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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