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조폭물은 더이상 신드롬이라기보단 하나의 장르로 간주해야만 할것 같다. 굳히 세계화의 추세에 발맞추자면 갱스터 무비라고 가져다 붙이면 되겠지만 조폭과 갱스터의 간극은 커보인다. 대한민국 조폭만의 특성은 가오속에서 드러나는 천박함이다. 그리고 그 천박함의 허상을 지우기 위해 그들은 그만큼 가오를 세우는 것이고.
그 가오가 어쩌면 대한민국의 허상적 현주소일지도 모른다. 겉만 번지르르한 내면의 부실함. 선진국의 탈을 쓴 비선진화의 퇴폐적 현실들. 그것이 마치 화려한 빌딩숲 사이사이에 놓인 열악한 골목길의 현실이다.
이 영화는 최근에 개봉한 '열혈남아'와 더불어 조폭물의 후계자이자 버전이 다른 진화물이라 여겨도 될 것 같다. 희극과 비극 사이에서 소모되던 조폭성의 본질은 이제 외피를 두르는 미장센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가족이 있다. 가족이라는 하나의 사회를 유린하는 것이 바로 그 조폭성의 역할이다. 그리고 그 연약한 사회를 강하게 엮는 것도 그 조폭성의 역할이다. 외부의 적이 내부의 결속을 다지듯 가족의 평화를 위협하는 조폭같은 사회적 부조리 앞에 그들만의 가족애로 감싸안는다. 그 나약한 사회가 뿜어낼 수 있는 살기란 소중한 구성원을 위한 희생과 방어적 의지다.
이 작품은 이미 흘러간 시간속의 몇몇 영화를 상기시킨다. 일단 개발이 진행되는 지방성의 코드는 올해 개봉한 '짝패'를 연상시킨다. 물론 김래원의 액션연기가 짝패의 류승완과 정두홍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연상은 자제하길. 액션이라는 큼직한 서까래가 짝패에서 그럴듯 했던 것은 그 액션이 뿜어내야 했던 비정성에 대한 심판적 작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비정함은 개발이 진행되는 지방, 즉 가상처럼 세워진 도시안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함을 일삼는 악의 축에서 비롯되고 그를 타도하는 액션은 응징적 쾌감으로 발산되는 것이다. '해바라기' 역시 개발이 진행되는 어느 지방이다. 물론 그곳이 어느 곳인지 알 수는 없지만 -서울의 근교인 듯 하나 영화는 결코 설명하지 않는다.- 그곳역시 하나의 가상적인 도시이다. 개발이 진행되는. 그리고 그 개발은 역시 하나의 부조리를 동반한다. 헐값에 토지를 매입하고 매입을 거부하는 이에게는 폭력이 동원된다. 결국 개발사업에 결탁되는 것은 조폭성이다. 그 비열한 거리에서 가족은 버텨보려 하지만 만만찮은 위협앞에서 아슬아슬한 폭풍전야를 누리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후반부를 장식하는 액션의 방점은 잔혹함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응징이라는 목적하나로 새겨진다.
또 하나의 영화는 '가족'이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짝패'의 공간적 환경이 감성을 끌어내기 위한 공간적 장치에 가깝다면 그로부터 뽑아져 나오는 감성적 도출은 결국 가족성의 붕괴로 인한 연민이다. 그 연민의 코드는 '가족'을 연상시킨다. 물론 기본적인 이야기적인 모티브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두 영화의 감성적 맥락은 비슷한 곳을 짚는다. 완벽한 개과천선의 모습을 보여주는 태석(김래원 역)에 비해 정은(수애 역)은 여전히 과거에 얽혀있다. 하지만 두 인물을 아우르는 것은 각각 모성애와 부성애다. 태석의 개과천선은 그의 어머니 덕자(김해숙 역)로 인한 변화이고 정은을 차차 변화시켜나가는 것도 그녀의 아버지 주석(주현 역)이다. 그곳에서 도출되는것은 결국 어미의 품을 그리워하는 새끼의 심정과도 같은 회귀본능이다. 부모로부터 내리받은 애정은 자식의 과오따위는 벗겨내고 외면한다. 결국 전승되는 애정의 페이소스가 진하게 우러나는 시점은 그것을 강하게 상기시키게 하는 죽음과의 관련성이다. 그리고 그 뒤에 따라붙는 그리움의 수식어를 인계받는 것은 살아남은 이들, 가족의 정은과 해바라기의 희주(허이재 역)의 몫이다.
물론 여기까지의 두영화와의 비교는 이 영화가 이미 지나간 과거사안에서 얼마나 도태되었는지를 증명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명시해두고자 한다. 단지 영화를 통해 읽혀지는 이미지의 유사성일 뿐. 그렇다면 이 영화만의 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한다.
'해바라기'라는 제목은 극중 태석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이다. 식당앞에 가득했다던 해바라기는 이제 없다. 왜냐하면 그곳은 해바라기가 있어야 할 공간이 아닌 식당이 사라져줘야 할 공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진행되는 상황으로부터 설명된다. 태석의 등장으로 진행되던 압박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것 뿐이다. 초중반까지 평화로운 가정의 모습은 웃음의 여유를 품지만 바늘방석마냥 편할 수가 없다. 그 사이에서도 불쑥 머리를 내미는 비극의 예감은 그림자처럼 따라붙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극적 예감은 중반부를 넘어서며 본격적인 이빨을 드러낸다.
개발이라는 명목안에서 사욕을 채우는 악의 축은 시장 조판수(김병옥 역)이다. 그는 웃음의 탈을 쓰고 있지만 그탈 너머에는 뿌리부터 사악하고 냉정해보이는 기질을 지닌 인물이다. 세상에 악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냐며 능청스러운 합리화로 자신의 만족을 채우기위한 명불허전의 지역개발을 도모한다. 하나의 거대한 권력으로 상징화되는 그는 이 영화의 웃음을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와 같다. 그는 동시에 비극성을 심화시키는 인물이다. 영화의 감성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보색효과라는 것이다.
가족의 행복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 붕괴도 진행된다는 것은 그만큼 슬픔의 감정을 부풀리는 작업이다. 그렇게 영화는 서서히 본질적 감정을 들이밀 준비를 하고 있다. 흐믓한 웃음이 더해질수록 그에 반하는 슬픔의 연민이 짙어질 것을 이 영화는 잘 알고 있다. 물론 그것이 가식적인 이야기적 장치라고 할지라도 본질적인 이야기의 흐름에 손가락질을 할 이유는 없다. 영화의 의도안에서 해석되는 상황의 설정일지라도 아귀가 들어맞는다면 비판의 대상이 되진 않기 때문이다.
드라마적인 선이 중시되는 가운데 그 여백을 채우는 설정력은 그 진행에 탄력을 준다. 물론 조폭성과 가족애의 결탁은 지독한 클리셰같은 소재들의 남용일수도 있지만 이 영화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얻어지는 시너지 효과는 비판을 불식시키게 만든다.
결국 태석은 자신이 10년동안 반성하고 돌이키지 않으려 했던 길을 간다. 물론 그것이 실수나 착오로 인한 상황의 도출이 아닌 가야만 되는 상황의 의무적 태도이기에 그의 다짐이 지켜지지 않았음은 영화의 감정선에 합당한 이유가 된다.
완벽하다 추켜세울만한 이야기가 아닐지라도 대중적인 감각은 뺴어난 이야기라는 것은 인정받을만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캐릭터의 모양새도 만족스럽다. 특히나 눈에 띄는 것은 악의 축과 같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김병옥인데 그는 최근 '예의없는 것들'과 '잔혹한 출근'에서도 비슷한 이미지의 연기를 선사했다. 이 작품에서도 그의 역할은 적절해보인다. '비열한 거리'에 비중이 작은 역할로 출연한 허이재는 눈길을 끄는 외모만큼이나 역할에 어울리는 연기를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역할을 잘 소화해낸 김해숙씨의 연기가 영화의 감성적 축을 지탱하고 그 축을 밑천으로 영화를 이끌어가는 김래원의 연기도 들어맞는 형세다.
전작 '어디선가..홍반장'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에 조심스럽게 돌을 던지던 강석범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은연중에 시사하던 부조리한 사회의 전복적인 소망을 좀 더 활짝 드러내보인다. 물론 그가 응징하는 대상은 악랄한 인간이지만 그 인물이 대변하는 것은 사회적인 부조리를 양산하는 권력자를 우회적으로 상징하기도 한다. 태석의 폭발은 결국 감독의 욕망적 소산으로 읽혀지는 것 같다.
희망을 꿈꾸던 캐릭터가 몰락해가는 과정은 껄끄러운 슬픔이다. 태석의 희망수첩이 결실을 맺을때마다 관객의 웃음도 함께 한다. 그것은 결국 극속의 인물이 느끼는 보람을 관객도 공유하고자 하는 희망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희망이라는 기대감으로 관객을 부풀게하지만 비극으로 터뜨리는 영화의 전략은 적절해보인다. 물론 그 비극의 소산물이 다시 희망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안에서 관객은 슬픔의 나락에서 구제받는다. 영민하진 않지만 관객의 감정을 흔드는 방법을 아는 영화의 능력은 적당한 만족감을 쥐어줄만하다. 비록 그 감정이 영화의 농락일지라도 의도와는 무관하게 관객에게 주어지는 것은 감동이라는 대어일테니까.
-written by kharismania-
사족>사실 필자는 이 영화의 메이킹 필름을 통해 펼쳐지는 모니터링작업에 참여했었다. 사실 그 당시에 화면과 음향의 수정작업과 이야기의 편집작업 등 후반작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필름상태 그 자체를 토대로 관람했을때는 상당히 미흡한 점이 많은 영화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완성본을 보고 난 뒤에 느낀건 편집을 통한 영화의 수정이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는가라는 것. 특히나 군더더기없는 과감한 삭제와 결말의 탁월한 변화는 필자를 놀라게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필자가 참여한 모니터링작업 이후에 접하는 완성작 중에서는 가장 환골탈태한 작품이라고 여겨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