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는 여러모로 우리나라와 닮았다. 아일랜드의 민요중 아리랑과 흡사한 멜로디의 토속민요가 있다고 한다. 물론 필자도 얼핏 라디오를 통해 들어본 이야기라 직접 확인해보지는 못했지만 아무래도 핍박과 억압의 역사를 지닌 아일랜드의 민중들의 정서는 어쩌면 우리의 긴 고난의 역사와 비슷해보이기에 우리와 비슷한 구슬픈 가락의 민요가 하나쯤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어보인다.
이 영화를 보기전에 알아둬야 할 것은 아일랜드의 근대사다. U2의 'Bloody Sunday Bloody'라는 노래나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블러디 선데이'라는 영화를 접했던 적이 있는 이라면 적어도 아일랜드의 근대사가 비극을 머금은채 진행되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벌어진 '피의 일요일'사건은 잔인한 제국주의의 침략정책에 철저하게 억눌린 식민지로써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우리나라가 일본의 군국주의 군화에 짓밟혀 신음해온 역사처럼. 3.1운동 때 울려퍼지던 총성과 그에 쓰러져가는 민중들의 붉은 핏방울처럼.
이 영화는 여전히 영국의 식민정책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아일랜드의 과거를 들추어낸다. 물론 과거만큼 지독한 탄압은 아닐지 몰라도 여전히 아일랜드는 북 에이레가 유니온 잭에 소속된 불완전한 섬나라다.
이 작품은 물론 '블러디 선데이'나 혹은 '아버지의 이름으로'와 같이 부당한 현실에 대한 고발담은 아니다. 물론 영화속에서 그들의 억울한 삶이 분노를 유발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정서적 소통일지 몰라도 영화의 화두에 서 있는 것은 역사적 사실의 진실이라기 보다는 그 역사와 시절에 휘둘리는 풍경이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어쩔 수 없는 그 현실안에서 어쩔 수 없이 무언가를 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이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외길같은 행위에 대한 목격은 판단에 대한 잣대가 아닌 관찰에 의한 수용이 되어야 마땅하다.
런던에서 이름있는 병원에 의사로써 발을 내 딛게 된 데이미안(킬리안 머피 역)이 어째서 아일랜드공화국군(Irish Republican Army:IRA)에 가담하게 되는지, 그리고 같은 목적과 같은 혈기로 세상에 맞서던 의좋은 데이미안과 테디(페드레익 딜레이닉 역) 형제는 어째서 서로의 신념에 등을 돌려야만하는지에 대한 사연과 흐름은 그 세월을 보내는 이들의 시간속에 모든 영문이 담겨져있기에 물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영화는 그들의 비극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로 가는지, 그 모든 여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포착하고 서사적으로 전개한다.
하나의 신념으로 출발한 아일랜드의 젊은 피들은 희생을 무릅쓰고 자신들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사선을 넘나든다. 자신들에게 무엇보다도 절실한 자유를 위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을 밀고하게 되는 동료마저도 눈물을 머금고 처형한다. 어릴떄부터 보고 자란 이웃보다도 국가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삼으며 그들은 그렇게 그 역사의 어둠속을 내달린다. 역사와 시절은 그렇게 젊은이들의 세월을 착취하듯 앗아가고 그들의 확고할 것같은 신념안에 물음을 던진다. 극중 등장하는 데이미안의 독백처럼 무엇에 반대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쉽지만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대답은 쉽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반대하던 영국의 식민정책에 함께 맞서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자유앞에서 갈라선다. 완벽한 자유를 꿈꾸는 데이미언과 완벽하진 못할지라도 얻어진 자유부터 수호하고자 하는 테디는 그렇게 등을 돌린다. 혼란스러운 시절속에서 그렇게 어제의 동지는 오늘의 적이 된다. 그들의 뜨거웠던 희생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모든 것이 허망할 정도로 혼란이 가중되고 신념이 붕괴되는 과정은 새로운 비극으로 점철된다.
모든 것은 비극적인 역사로부터 찍혀지는 방점이다. 영국군에 의해 수모를 당하고 동료와 이웃의 죽음을 번번히 목격하는 아일랜드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자유와 생명을 보장해줄 국가의 존재를 뼈저리게 깨닫는것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무기를 손에 쥐고 자신들의 자유를 되찾기 위해 항쟁한다. 시대의 바람앞에서 그들은 그렇게 휩쓸려간다. 영화는 역사와 시대앞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선 개인들의 사연에 집중한다. 그들이 총을 들게 된 사연과 그 사연을 겪어나가는 개개인들의 모습, 그 군상들로부터 빚어지는 것은 결국 사회로 귀결된다. 시대가 빚어낸 총아들은 그 시대를 대변하며 대의에 의해 묵인되고 소멸해야하는 개인의 서글픈 굴레를 묵묵히 담아낸다. 결국 상황을 조장하는 것과 그 상황 안에서 휩쓸려가는 것의 엇갈림. 주체자와 희생자 사이의 간극은 이 영화를 서글프게 만드는 대목이다. 비극을 낳은 영국의 무자비한 식민정책의 주도자인 영국의 의회로 인해 피를 흘려야하고 그 후에도 서로 대립해야 하는 아일랜드의 젊은이들의 현실은 안타까운 소시민의 군상이자 약자의 서러움으로 대변된다.
이 영화는 많은 면에서 우리의 과거사를 떠올리게 한다. 일제시대 그들에 맞써 싸우던 상하이 임시정부의 독립투사들과 만주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던 독립군들. 그리고 그와 상반되는 친일인사들. 하지만 해방후 독립을 위해 힘쓰던 투사들의 자리는 간과되고 친일파들이 득세하던 현실. 우익과 좌익으로 나뉘어 혼란을 거듭하던 민족. 국제정세에 휘말려 38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게 된 국토의 비극. 그 모든 것이 이 영화를 통해 상기되고 그들의 아픔에 비슷한 통증을 느끼게 된다.
소외받고 힘없는 민중과 소시민의 이야기를 복음하는 거장 켄로치에 의해 만들어진 이 영화는 올해 칸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보증된 걸작이다. 그의 영화는 무거운 소재를 취하지만 화법은 날렵하고 흥미를 유발한다.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무겁고 진지한 소재를 취하면서도 극적인 긴장감을 유발하고 인물의 내면적 갈등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바람은 영국군의 탄압이다. 더 원론적으로는 영국 왕실의 탄압이다. 그리고 그 탄압은 보리밭을 흔든다. 그 거센 탄압속에서 아일랜드의 민중은 흔들린다. 그리고 그들은 자유를 위해 무기를 손에 잡고 맞선다. 그들은 바람의 흔들림에 따라 몸을 흔들며 바람에 맞서거나 혹은 피한다. 그러다 보면 그 흔들림 속에 용케 버티는 자들과 결국 꺾여 쓰러지는 자들로 나뉜다. 물론 보리이삭은 온전치 않다. 하지만 바닥으로 떨어진 이삭은 다시 거두지 못할지라도 여전히 붙어있는 이삭들은 싹을 틔워야 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밭은 그렇게 가을을 바라보며 세월을 견딘다. 언젠가 다가올 자유를 꿈꾸는 아일랜드의 젊은 피처럼. 총을 들고 항쟁하는 그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밭처럼 처연하지만 소박하다. 결국 보리밭이 꿈꾸는 것은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다. 자신들의 긴 고난의 항쟁이 자유로 거두어질 그날을 꿈꾸는 그들처럼 보리밭의 흔들림은 인내를 동반한다. 결국 그 끝에 남는 것이 형제의 비극이자 연인의 죽음일지라도 시대가 부여한 아픔앞에서 수확해야 하는 자유를 꿈꾸며 세월을 견뎌야 한다.
그렇게 민중은 역사와 시대에 의해 흔들린다. 국가와 신념이라는 대의앞에서 흔들린다. 자신을 포기하면서도 지켜야 하는 무언가를 위해서 그들은 흔들려야만하는 소모품같은 존재로써의 사명을 다한다. 하지만 그래도 민중은 굴하지 않는다.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고 힘없는 약자로써 거센 바람에 흔들려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킨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김수영 作 '풀' 中-
국가와 민족이라는 대의앞에서 희생을 무릅쓰고 힘있는 자의 폭력과 횡포가 인정되던 시대안에서 희생을 강요당하던 이들의 시절을 묘사한 이 작품은 여러모로 인상적이다. 적어도 우리의 한시절을 보는 것만 같은 데자뷰까지도 간과하기 힘든 작품이다. 등을 돌린 형제처럼 미친 세월을 바로잡아보려 했던 젊은 피들은 혼란스러운 세월이 무심하게 내던진 신념의 바람앞에서 흔들리며 마주잡던 손을 뿌리치고 등을 돌리게 한다. 모든 것은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처럼 세상을 흔드는 기운안에서 한낱 사람에 불과한 우리는 세상의 흐름속에서 미쳐가거나 미치지 않은 척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이라는 보리밭안에서 바람을 맞으며 흔들린 채 살아가는 것이다. 떨어진 보리 알갱이의 희생이 있더라도 그자리를 묵묵히 지켜가며 그 시절을 바라보며 견뎌내는 것이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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