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으려해도..... 잊으려해도... 마치 나의 뇌에 각인이라도 된 것처 럼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있습니다.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 다 그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고 또... 잊지 못하는 내 자신이 더욱 싫어지기만 합니다. 그 기억 때문에 삶이 피폐해질 정도로 괴로운 당신의 눈에 우연히 전단지가 보입니다. 〈잊고 싶은 기억이 있으 십니까? 당신이 원치 않는 기억만을 지워주는 망각의 바이러스를 찾아오세요. butterfly tour〉어때요? 떠나 보실 생각 없으세요?
아마 안나도 바로 이렇게 여행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름도 제대 로 모르는 이 도시. 아버지의 나라라는 점 빼고는 더 이상 아무것 도 남은 게 없는 이 곳으로 독일에서 선뜻 길을 나선 것은 오로지 망각의 바이러스 때문입니다. 이 곳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분실한 안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여행사 가이드인 유키와 택시 운전사인 K. 시작부터 삐거덕거리는 여행은 안나를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게 하 기는커녕 그 기억을 더욱 되살아나게 합니다. 자꾸만 내리는 산성 비, 어디선가 들리는 구슬소리 그리고 임신한 유키..... 모든 게 안 나를 힘들게 합니다. 잊고자 하는 기억을 버리기가 이다지도 어려 운 것일까요?
[나비].... 소문대로 저에겐 좀(--;; 정말 조금일까?) 버거운 영화 더군요. 보고나서 하루를 꼬박 이 영화에 대한 생각만 했거든요. 묘한 이 미래의 도시를 보면서 죽은 사람이 이승으로 돌아오기 위 해 건너야 하는 레테의 강을 떠올리게도 했고, [매트릭스]나 [오픈 유어 아이즈]의 가상공간을 떠올리게도 했습니다. 기억을 버리고자 하는 안나와 남이 버린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는 유키 그리고 잃어 버린 기억을 찾고자 하는 K의 조합은 참 묘한 느낌이었습니다. 일 부러 만나도록 운명지어진 것처럼요. 어쩌면 안나는 망각 아니면 극복을 위해 디지털 세계에서 자기 주문을 걸고 있는 건 아닐까 하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유키의 모습과 안나의 옛날 여권 그 리고 택시의 마지막 승객 때문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새로운 느낌이었습니다. 꼭 엄청난 제작비가 들어가지 않더라도 SF가 가능하다는 걸 머리론 알지만 막상 그런 영화를 만나니까 더 욱 새로운 느낌이었죠. 감독은 현실 그대로를 활용하면서도 관객을 낯선 느낌의 이질적인 공간으로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건 아마도 연기력이 좋은 배우들의 공도 크겠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김호정 의 연기는 정말 탁월합니다. 디지털 카메라로 근접하여 찍은 그녀 의 얼굴은 진짜 안나인 것처럼 상처와 아픔으로 얼룩져 있는 눈동 자를 강조시키고 있었습니다. 유키 역의 강혜정도 텔레비전에서보 다 훨씬 폭이 넓어진 연기가 좋았구요. 징검다리 역할을 하던 K역 의 장현성의 연기 역시..... 모두모두 앙상블을 이뤄 [나비]를 한단 계 더 업그레이드 시키고 있었습니다.
[나비]는 재미를 바라고 볼 영화는 아닙니다. 스토리를 조금만 명 확하게 풀어나갔다면 관객에게 훨씬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을텐데 무척 아쉽네요. 흔히들 말하죠. 세월이 약이라고..... 그러나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있습니다. 기억을 다 지울 수 만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요. 하지만 지워진 기억으로 새로이 시작 하면 고통이 없을까요? 오히려 그런 빈공간은 더 무너지기 쉬운 법이죠. 마치 산성비에 스러지던 나비들처럼요. 지우고 싶은 기억 이 있으신가요? [나비]를 찾아가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