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사회에 진입하기도 한참 먼 것처럼 느껴지는 학생의 입장으로서, 머리 속에 그려지는 사회라는 공동체의 모습은 그저 막연하기만 하다. 나의 의지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자리를 찾고, 직접 돈을 벌어서 나의 삶을 일궈나가는, 보다 많은 사람들과 넓은 관계를 쌓아나가면서 더 넓은 입지 속에 나를 정착시켜나가는 무대라고나 할까. 그저 더 자유롭고 분주할 것 같은 세상, 그런 곳이 나에겐 "사회"라는 곳의 이미지로 느껴진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까지는 고3시절이 참 힘들었다고 얘기할 때마다 어른들이 "그래도 공부할 때가 좋은 거다"라는 얘기를 꺼내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든 듯 싶다.
그러나 사회라는 곳이 역시나 결코 만만한 곳은 아닌가보다. 아니, 어쩌면 지금 힘들다고 하는 것이 새발의 피 수준일지도. 이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딱 그런 당황스러운 시츄에이션과 충돌하는 사회 초년생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생각보다 미션 임파서블스럽고 더 독한 상황들이 많이 도사리고 있는 데가 사회란 곳인 만큼, 지금까진 두루뭉수리하게 살아왔다 해도 사회에 들어서는 순간 나 또한 거기에 맞춰 독해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걸 새삼 실감하게 된다. "이건 나답지 않아"하는 생각이 들만큼 말이다.
기자를 꿈꾸긴 하지만 일단 취직해 사회 경험을 쌓으며 연줄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있는대로 이력서를 집어넣은 사회 초년생 앤드리아 삭스(앤 해서웨이)는 운좋게도 미국 최고의 패션잡지 "런웨이"의 편집장 미란다 프리슬리(메릴 스트립)의 비서 자리를 얻게 된다. 남들은 백만 대 일의 어마어마한 경쟁률이라지만 패션의 "패"자에도 관심없는 앤드리아에겐 생판 처음 보는 환경이요 처음 보는 상사일 뿐. 그러나 그녀가 상사로 모시게 될 미란다라는 여인은 패션계에서 악명높은 인물로 그녀의 표정이나 말 하나하나가 패션계를 좌지우지하는데다 성격은 무지하게 깐깐해 잘리는 비서가 한두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뭣도 모르고 비서 일을 시작한 앤드리아에게 다가오는 모든 업무들은 하나같이 미션 임파서블. 그러나 냉정한 상사에게 조금이라도 인정받기 위해 옷차림부터 바꾸고 일에도 더 신경을 쓰게 되면서 앤드리아는 점점 패션계에 펼쳐진 달콤한 성공의 맛에 매혹된다. 그러나 그녀가 점점 성공에 가까워질 수록 그녀가 예전부터 함께 했던 연인과 친구, 가족들은 점차 멀어지게 된다. 성공과 자기의 본래 모습, 둘 다 놓칠 수도 없고 둘 다 잡을 상황도 안되는 딜레마 속에서 앤드리아는 미래에 대해 점점 더 진지한 갈등을 앓게 되는데.
앤드리아라는 젊은이가 주인공이고 그녀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배우들의 연기에 있어서 절대 그냥 넘어가선 안되는 역할은 다름아닌 그녀의 상사인 미란다 역의 메릴 스트립이다. 이 영화 속에서 그녀의 존재감은 절대적이고, 압도적이다. 초반부 살벌한 분위기에서 그녀가 스크린에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온갖 깐깐하고 시시콜콜한 부탁들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늘어놓는 그녀의 모습에서 당당하면서도 악마적인 풍채가 가득 느껴진다. 고급스런 백발의 머리에 당당한 걸음걸이, 하나하나 조심스러운 표정과 우아한듯 거침없는 말투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외양과 행동 모든 것이 미란다의 악마적인 포스를 극강으로 몰고 가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악마적인 매력만 부각시킨다면 멋진 캐릭터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메릴 스트립은 이렇게 악마적인 여인의 모습에 그녀를 결코 미워할 수 없게끔 만드는 인간적인 매력까지 효과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미란다를 더욱 더 인상적인 캐릭터로 격상시킨다. 일에 철두철미한 만큼 많은 것 또한 잃고 있는, 그로 인해 더 조심스럽고 냉철해지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아무리 야속하게 굴어도 마냥 원망할 수는 없을 것 같은 인간적 매력이 두드러지게 한다. 이 영화의 다른 면은 제쳐주고라도, 메릴 스트립의 연기 카리스마만은 엄지손가락 두 개 만으로도 모자라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인공인 앤드리아 역의 앤 해서웨이의 연기가 나쁜 것도 아니다. <프린세스 다이어리>에서 갑작스런 부와 명예 앞에 혼란스러워지는 평범한 10대를 연기한 만큼 이 영화에서 갑작스런 성공과 변화 앞에 어리둥절해지는 초보 사회인의 모습을 잘 소화해냈다. 이 배우도 미모가 실로 장난이 아닌데, 보통 이 정도 미모의 배우가 영화 속에서 평범녀를 연기하면 감정이입이 잘 안될 수 있지만 워낙에 수수한 옷차림도 어울리고 말투와 행동이 시종일관 털털하고 덜렁거리는 면이 많아 감정이입이 잘 된 듯 싶다. 물론 스타일 변신 이후에 보여주는 당당한 커리어우먼으로서의 모습도 손색이 없다. 평범녀와 매력녀의 모습을 동시에 자유롭게 오갈 줄 아는 배우가 아닌가 싶다. 이외에도 개성 있는 조연진들이 보는 재미를 더한다. 무뚝뚝한 듯 사려깊고 과묵한 듯 발랄한 미란다의 동료 나이젤 역의 스탠리 투치, 앤드리아를 시샘하고 질투했지만 어느덧 미운정이 든 동료가 되는 선배비서 에밀리 역의 에밀리 블런트(실제로도 이름이 "에밀리"다) 등 조연들의 연기도 영화의 고급스런 재치를 더해주는 힘이 된다.
사실 나도 남자인지라 이 영화에 나오는 그 수많은 명품 옷과 신발, 액세서리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내가 이 영화에 관심을 가졌던 건 <섹스 앤 시티>가 선도하는 유행의 출발점이 되는 뉴욕 패션계의 속내가 궁금했다기 보다는, 헐리웃 코미디라도 뭔가 생각할 수 있는 거리를 던져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였다. 사실, 영화가 보여준 패션잡지사 내의 모습도 꽤 흥미롭긴 했다. 한 권의 잡지를 장식하기 위해 거치는 수많은 회의와 촬영들, 그 잡지가 패션계에 미치는 영향력같은 것도 새삼 재미있게 다가왔다.(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했다니 더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역시나 영화를 본 뒤 이 영화를 상당히 좋게 평가할 수 있게 된 이유는 내가 기대한 대로 이 영화가 삶과 성공에 대해 나름대로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영화가 홍보되는 대로 유행을 선도하는 뉴요커들의 삶, 성공적인 커리어우먼의 모습만을 비추기엔 영화는 보다 더 많은 알맹이들을 내포하고 있다.
앤드리아가 운좋게 런웨이에 들어오고 난 뒤 그녀가 미란다를 상대로 수행하는 각종 업무들은 대단히 당황스럽고 갑작스런 구석들이 많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긴장감까지 불러일으킬 정도로 집중력 있는 전개를 보인다. 아직 발간되지도 않은 <해리 포터> 시리즈를 가져오라고 하고, 15분 만에 스테이크 점심을 가져오라는 미란다의 얼토당토 않은 요청들을 끙끙거리며 수행하고 있는 앤드리아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사회생활에서 제대로 입지를 잡으려면 참 못할 짓도 많이 해야 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주인공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이렇게 귀찮게 하는 상사더러 "제가 왜 이런 것까지 해야됩니까!!"하고 딴지를 걸겠지만, 앤드리아는 그렇지도 않다. 일단 사회에 무사히 진입하는 것,원하는 꿈을 이루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그 목표를 이루려면 아무리 뭐같은 것만 시켜도 당분간은 참으면서 일하는 수 밖에. 그러면서 앤드리아는 엄두 도 못낼 것 같던 각종 미션 임파서블들을 용케도 잘 해낸다.
그런데 희한한 건, 이런 지옥같은 생활을 잘만 견디면 그 뒤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성공시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미란다와 함께 쟁쟁한 유명인사들을 만나는 자선파티에 가고, 패션의 메카인 파리에 함께 출장가는 것 같은 일들은 앤드리아가 취직할 때만 해도 생각도 못했던 것들이고, 욕심도 없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렇게 꿈만 같던 화려한 생활들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앤드리아는 자신도 몰랐던 성공에 대한 욕심이 점점 더 커져 가는 걸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일에 있어서도 더 애정이 생기게 되고. 다만, 그만큼 일에 있어 얻는 게 많은 만큼 다른 쪽에선 잃는 것도 많을 것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는 게 가슴 아플 뿐. 그러나 그마저도, 뻔한 헐리웃 영화 속 주인공처럼 난 그래도 사랑이 중요해하면서 단번에 직장을 그만두기는 힘들 만큼, 현실로 다가온 성공의 맛이란 그리도 달콤했다.
이렇게 눈부신 성공과 그만큼 변해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고민하고 있는 앤드리아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사랑과 성공이, 정말 둘 다 쟁취할 수 있을만큼 만만한 것일까"라고 질문한다. 이런 질문은 독보적인 악마로만 보일 것 같은 미란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그녀는 일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은 손도 못댈 정도로 철두철미하지만 만약 그 일이란 것이 사라졌다간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인물이다. 그녀가 일에 있어서 성공적인 위치에 오르기까지 희생해야 했던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토록 감정이 없는 듯 냉정한 듯 보이는 이유 역시 잃은 게 많은만큼 더 이상은 잃고 싶지 않은, 잃을 것도 없는 사람으로서 독하게 일에 달려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앤드리아도, 그 독하게 보이는 미란다조차도 삶과 일에 있어서 끊임없이 번뇌하는 사람들로써 그들은 벗어나고 싶은 주종관계를 넘어서 어떤 동질감까지 형성한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단순히 상사와 부하직원 사이의 전형적인 으르렁대는 관계에만 안주할 수 없게끔 만든다. 앤드리아는 독하게 구는 미란다를 상대하며 치를 떨다가도 알고보면 수긍이 가는 그녀의 속내에 고개를 끄덕이고, 미란다 또한 덜 떨어진 듯 미숙한 앤드리아를 보며 속이 터지다가도 자신의 예전 모습을 보는 듯 미워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미란다 역시 앤드리아가 아무리 속터지게 굴어도 결코 자르지는 않지 않던가. 다만, 더 힘든 일을 시키며 그녀의 능력을 시험해 볼 뿐이지. 이렇게 앤드리아는 마냥 신적인 존재로만 느껴지던 미란다의 또 다른 면모,어쩌면 그녀 자신과도 꽤 닮아 있을 내면을 알게 되면서,같이 일하기에는 대단히 애로사항이 많아 힘들겠지만 정글같은 사회생활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먼저 터득한 선배로서 배울 것은 많은 사람으로 어딘가 애틋한 유대감을 쌓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으르렁거리는 인간관계를 넘어서, 똑같이 일과 삶에서 딜레마를 겪는 사람들 간의 은근한 동질감에 대해서도 따뜻하게 그리고 있다.
영화는 사회에서의 성공을 위해 많은 것을 버린 미란다의 모습을 결코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미란다 역시 앤드리아에게 "너도 이미 그런 적이 있어"하고 쏘아붙이지 않던가. 영화는 어쩌면 삶에 있어 "성공"이라는 요소를 어떻게 잘 조율하는가는 특별히 모범답안이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의 취향과 능력에 달려 있다는 듯, 알아서 잘 해 보라며 여지를 남기고 있지 않나 싶다. 사람에 따라 앤드리아가 될 수도 있고, 미란다가 될 수도 있다. 앤드리아처럼 성공도 어느 정도 하면서 삶의 다른 면에도 충실히 할 수도 있고, 미란다처럼 아무리 많은 걸 버리고 아무리 매정하게 굴어도 "나가봐(That"s all)" 한마디로 끝낼 만큼 과감하게 나갈 수도 있다. 어떻게 하든, 사회에서 좀 더 끈덕지게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확실히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영화는 이야기한다. 뭘 하든 선택은 나의 몫, 여러분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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