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아파트라는 건축물이 지니는 의미는 국가개발사업으로 인한 도시건축과 맞물린다. 농업을 기반으로 하던 제1시대에서 공업을 기반으로 하는 제2시대로의 전환을 맞이하는 대한민국은 도시의 발전을 도모했고 좁은 땅위에서 내집마련에 고심하는 도시민들의 고충을 덜어내기 위해 좌우로 지면을 차지하는 주택의 공급보다도 지면적 공간부담을 덜고 한계가 없는 상향식 주거공간의 확보에 힘쓰게 된다. 대한민국의 도시를 보면 아파트 숲이 무성하게 드리우는 것은 결국 좁은 국토면적으로부터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아파트 숲이 무성한 대한민국의 도시, 그중에서도 가장 도시로써의 윤곽이 뚜렷한 서울은 지금도 여기저기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며 지상의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적어도 대한민국 서울에서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부는 갈대숲을 지나' 주인을 기다리는 아파트는 찾아보기 힘들다. -원곡 노래의 단어적 의미를 떠나서 단지 가사만을 차용한 글임-
일단 이 영화는 제작시기부터 엄청난 화제를 끌어모았던 것이 사실이다. 은둔하듯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고소영이 다시 연기자로써 돌아오기 위해 택한 작품이라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의 홍보효과는 이미 극한으로 들어섰다. 또한 인터넷상에서 웹툰작가로 활동하는 강풀의 '미스테리 심리 썰렁물'이라는 시리즈물로써 유명한 원작을 영화화한다고 했다는 것. 어쨌든 이 영화가 국내 영화계의 이슈적인 면에서나 작품 자체에 대한 호기심적 측면에서나 입담에 오르내리게 되는 것은 당연한 면모인 것은 사실이었다.
사실 스타성에 기대는 영화는 작품에 대한 기대도를 지니게 할 수도 있지만 기대보다도 눈총을 받게 되는 수도 있다. 마치 두고보자는 식의 쌍심지를 켠 채 결과물에 집착하는 시선의 부담감을 밀어내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리메이크판이라는 또 하나의 가제 역시도 비교대상이라는 가치에서 이미 어느정도의 상품가치를 얻은 원작에 비해 가치 하락의 내리막길로 쉽게 접어들 수 있다는 위험부담도 무시할 수 없다.
사실 기존 작품의 재구성은 두가지 선택사양을 지닌다. 기존의 것을 또다른 질감, 즉 스크롤의 조정으로 음미하는 웹툰을 스크린으로 영상화하는 질감적 변화를 통해서 원작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내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원작이 지닌 코드 자체만을 뽑아내서 원작의 어렴풋한 실루엣만을 살린 채 또다른 작품으로 구현해내는 것.
아무래도 이 작품은 전자보다는 후자쪽을 선택한 것 같다. 물론 이에 대해서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들도 많겠지만 선택은 제작자의 몫이니까. 하지만 평가는 관람자의 몫이다.
일단 이 영화는 강풀의 원작만화에서 그 코드를 뽑아내고 필요유무를 판단해서 변환된 이야기에 맞는 것만을 간추려낸 것 같다. 그만큼 이 영화는 원작만화의 흔적만이 보일 뿐 원작의 짜임새와는 판이하다.
사실 강풀의 원작만화가 인터넷이라는 다중적 공유환경의 천박한 호화로움안에서 괜찮은 퀄리티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짧은 호흡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의 타이밍이 심리적으로 맞아떨어짐에 있었다. 몇번의 스크롤로 끝나는 짧막한 컷의 에피소드안에서 긴장감을 유발해내는 타이밍의 절묘함이 원작의 미덕이었던 것.
하지만 이 작품은 원작이 지닌 미덕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평범한 공포물의 공식을 답습하며 원작의 아우라로부터 형성되던 기대감을 되려 반감시키는 역습을 초래한다.
일단 이 작품은 최근 일본식 공포물들에서 유행하듯 번지는 불쾌함의 유용함을 우려먹는다. 귀를 긁는 소음과 밀폐되고 단절된 공간이 주는 불안감, 그리고 시선의 사각에서 무언가 고개를 들이밀 것만 같은 위기감. 이는 위압적으로 관객을 짓누르는 무시무시한 공포감이라기 보다는 마치 관객을 간지럽히듯이 끊임없이 자극하며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일본 호러물의 지긋지긋한 끔찍함이다.
허나 이 영화가 단순히 원작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원작이 지니고 있던 소재자체를 영화에 반영했고 인물들간의 관계나 기본적인 감정선은 영화의 밑바탕에서 은연중에 살아나간다. 특히나 결말부분은 원작품으로부터 약간의 손질만을 거친 원형의 질감이 묻어난다.
하지만 이 영화가 범한 치명적인 오류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못한 어정쩡함이다. 원작의 느낌을 살리지도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나지도 못한 이 작품의 아파트는 관객의 기대감을 성취해줄만한 탁월한 해결공간이 되어주지 못한다. 오히려 원작의 느낌을 훼손함과 동시에 다른 공포물과의 차별적인 비범함을 보여주지 못한다.
캐릭터의 설정 역시도 그렇다. 원작이 남자주인공으로부터 출발하는 시선을 여러 캐릭터에 무게중심을 옮겨실으며 다중적인 시선 분산으로 긴장감의 확대를 꾀했다면 이 작품은 단순하게 오세진(고소영 역)이라는 캐릭터에게 모든 무게감을 실어버린채 평이하게 지나가는 긴장감의 안이함으로 추락한다. 이는 고소영이라는 배우의 원톱기용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 한데 좀 더 인물간의 감정적인 내러티브에 힘을 실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그래도 이 영화가 남기는 잔상의 묘미는 현대인의 군중속 고독이라는 심리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아파트는 다수의 시림들이 모여사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사람간의 장벽이 두터운 밀폐된 개인성으로 대변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어쩌면 현대인들의 개인주의에서 비롯되는 타인과의 공간적 거리감과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심리적 거리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초반부터 보여지는 시사프로그램장면이나 외롭지 않냐는 대사의 반복은 그런 의미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 영화가 결코 만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원작이 보여주던 기발함을 염두에 둔다면 이 영화의 안이한 태도는 분명 안타깝다. 좀 더 영민하게 관객을 부릴 법한 소재를 이토록 평범하게 재단한 제작자의 역량앞에 경의를 표할 뿐. 고소영의 스크린 컴백이라는 화려한 선전문구 뒤에 숨겨진 유명무실함은 결코 그녀의 다음 행보를 가볍게 할 것 같진 않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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