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라레"처럼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낱낱이 알아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생각보다 섬뜩하고 불안한 상상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 서로의 마음을 전혀 모른 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의 지금 모습도 안타깝긴 마찬가지다. 상대방에 던지는 말과 행동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수치를 넘어서면 상대방이 불편함과 거부감을 느끼는지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때로 우리들은 상대방을 향한 말과 행동에 있어서 내 감정에만 충실해 정작 상대방이 마음 속에 그어놓은 선은 마음대로 넘어가기 마련이다. 상대방은 맞아서 죽을동 살동 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우리는 그런 마음도 모르고 그저 돌을 던지듯이 말이다. 그러기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조심성이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이치이고.
남녀의 관계라면 그런 조심성에 있어서 더욱 신중해진다. 단지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연인으로서의 남과 여가 아닌 그외의 관계에 있을 때. 친구로서의 관계, 혹은 직장 동료, 학교 동기로서의 관계에 있을 때, 성별의 차이는 때론 평등을 위해 없어져야 할 장애물이 되기도 하지만 때론 보다 원활하고 성실한 인간 관계를 위해 꼼꼼히 따져봐야 할 요소이기도 하다. 이 영화 <노스 컨츄리>는 이렇게 남과 여라는 두 가지 성별의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한 조심성 있는 관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생각보다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걸 보여준다.
1989년 북부 미네소타 주. 아버지가 다른 두 아들과 딸을 키우고 있는 여성 조시 에임스(샤를리즈 테론)는 남편이 있지만 실직 상태이고 게다가 툭하면 코피가 날 때까지 두들겨 패기 일쑤다. 더 이상 인간답지 못한 결혼 생활을 견딜 수 없었던 조시는 아이들과 함께 집을 나오고 친정살이를 시작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온전히 자기의 힘으로 키우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보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학창시절 친구 글로리(프랜시스 맥도먼드)를 만나 광산에 여성들을 위한 일자리도 있음을 알게 된다. 조시는 보다 나은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광산에 취직하게 되지만 같은 광산에서 오랫동안 몸담아온 아버지는 남자들의 일에 함부로 끼어든다며 불만의 시선만 잔뜩 보낸다. 그래도 조시는 상관없다. 비록 남자들과 같이 하는 일이라 그만큼 고되고 힘들지만 그만큼 월급도 두둑하기에 아이들에게 뭐든 해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조시에게 생각보다 더 큰 난관이 있었으니, 그것은 동료 남성 직원들의 수치스러운 성희롱과 차별대우였다. 면전에다 "벗은 몸이 죽인다던데"같은 말을 날리는 건 예사요, 툭하면 라커룸이나 도시락에 이상한 물건을 넣어 놀래키고, 툭하면 의도적으로 신체적 접촉을 시도해 여성 직원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너무나 빈번하게 반복되는 이런 성적 학대에 환멸을 느낀 조시는 광산 회사 사장까지 찾아가면서 여성 직원들의 권리를 보장해줄 것을 얘기하지만 돌아오는 건 "장난일 뿐이고 유머감각일 뿐인데 새삼스럽게 왜 그러냐", "그렇게 힘들면 일찌감치 퇴사하게 해주겠다"는 것. 거기다 그래도 편을 들어줄 줄 알았던 같은 여성 직원들까지 싸늘하기 그지없다. 섣불리 덤볐다가 일자리 잃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묵묵히 견디고 무시하면 되지 왜 나서냐는 것. 보다 나은 환경의 직장에서 떳떳하게 동료 직원으로서 일하고 싶고,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나고픈 조시였지만 그녀를 가로막고 있는 현실의 벽은 이렇게 생각보다 너무나 단단하고 굳건하기만 한데.
우선 배우들의 연기 면에서는 부족할 나위가 없다. 캐스팅만 보더라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들이 3명이나 출연하는데...;; 그 중에서도 압도적인 연기력을 보여주는 두 배우가 샤를리즈 테론과 프랜시스 맥도먼드이다.
샤를리즈 테론은 그녀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안겨준 <몬스터>에서 용감하게 자신의 미모를 철저히 망가뜨림으로써 연기자로서의 빛을 발했는데, 이 영화에서는 굳이 외모를 망가뜨리지 않아도 그 연기력은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영화 시작 때부터 가슴 한구석에 켜켜이 쌓인 울분을 참으며 재판장에서 질문에 답변하는 모습이나 자꾸 엇나가는 아들 새미와의 허심탄회한 대화에서 눈물을 쏟는 장면 등, 그녀의 연기력이 빛을 발하는 부분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아이 둘을 혼자 키우는 엄마로서 보다 강인하고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험한 일도 하고 불의에도 용감히 맞서면서도, 생각보다 너무나 크게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때문에 때론 좌절해 눈물 흘리기도 하는 연약한 면도 소유한 여성의 모습을 훌륭히 보여주었다. 만약 이 주인공 조시 에임스가 마냥 용감하고 불의에 맞서 싸우기만 하는 모습만 보여줬다면 인간적인 여성이 아니라 원더우먼같이 보였을 테지만, 불의에 맞서다가도 어느 순간 막막하게 길을 막아버리는 벽 앞에서는 그저 주저앉아 눈물 흘릴 수 밖에 없는 보다 현실적인 여성의 모습이 샤를리즈 테론의 적극적인 연기에 힘입어 제대로 살아난 듯 했다. 더 이상 그녀는 미모로만 인정받는 배우가 아니라 매 장면장면마다 자신이 가진 힘을 가득 쏟아부어 진한 연기를 펼치는 연기파 배우라는 것을 다시금 각인시켜주었다.
샤를리즈 테론이 거의 원톱으로 이끌어가는 영화이긴 하나, 그녀의 절친한 친구이자 직장 동료인 글로리 역의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연기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초반에는 예의 그 무뚝뚝하고 남자같은 여성의 캐릭터를 잘 소화하다가 중후반에 가서는 루게릭병이라는, 당시만 해도 매우 생소한 병에 걸리게 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숨겨놨던 연기 내공을 다시금 꺼내보인다. 온몸이 굳어가는 병에 걸려 점차 약해질 수 밖에 없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강한 척 내색하지 않고, 그러다가도 순간 다른 이가 병에 대해 건드리게 되면 금방 좌절해 눈물 흘리게 되는, 인간적 연민이 느껴지는 캐릭터로서 주인공 조시 에임스와 함께 참 빛나는 캐릭터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외에도 우디 해럴슨이나 숀 빈 등 남자 배우들도 연기파 배우들이 많이 나왔는데, 특히 숀 빈은 이전까지 악역으로 자주 등장하다가 이번에는 병에 걸린 아내를 헌신적으로 간호하는 선량한 역할로 나와서 꽤 반가웠다.
아시다시피, 이 영화는 실제 있었던 미국 최초의 직장 내 성희롱 집단 소송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요즘에도 각종 뉴스에서 직장 내 성희롱 관련 기사들을 자주 접하는 편이고, 얼마 전에도 어떤 국회의원 분이 성추행 건 때문에 한바탕 나라를 뒤집어놓으시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낯설지 않은 문제로 인식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런 기사들을 보고 성희롱이라고 해서 그저 추근댄다거나 성적 농담을 한다거나 하는 등의 형식적인 면을 주로 떠올리게 된다. 성교육 시간에도 성희롱엔 이러이러한 종류도 포함된다는 식으로 유형별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아서 구체적인 사례, 피해자의 심리같은 것 역시 두루뭉수리하게 떠올릴 뿐.
그런데 이 영화는 우리가 이렇게 말로만 듣던 성희롱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보다 매우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 조시 에임스의 시선에서 출발해 시종일관 진행되는 영화 속 성적 학대는 그 형태나 방식에 있어서 상상을 뛰어넘는 경우도 갈수록 많아진다. 남성의 성기 모양의 모형을 여자 직원들 도시락에 넣어두는 건 보통이요, 시도 때도 없이 일하는 시간조차 여성들의 가슴을 만지려고 안달하고, 벽에는 특정 직원의 이름까지 언급된 성적 농담까지 수시로 적어놓는다. 심지어는 여성들을 위해 마련된 간이 화장실을 엎어놔 오물을 뒤짚어쓰게 하고, 여성 탈의실에 배설물로 욕설을 적어놓기까지 하는 등 영화 속에 등장하는 성적 학대는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끔찍하고 잔혹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끔찍한 학대를 정작 이를 행하는 남자들은 "그저 장난삼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여성 직원에게 벗은 몸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유머감각"이고, 사람이 들어간 간이화장실을 뒤엎어 오물을 뒤집어씌워 놓고도 그저 멋쩍은 웃음만 지을 뿐. 그냥 장난이란 뜻이다. 회사 간부 사람들 역시 성희롱때문에 못살겠다고 고발이라도 하면 "그저 장난으로 하는 거고 유머로 하는 건데 그 정도에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냐"는 반응 뿐이다. 장난이라고 하기엔 정도가 해도 너무한, 어쩌면 악의가 일정량 내포되어 있을지 모르는 그들의 그런 행각들로 인해 광산 내 남성과 여성의 모습은 평범한 직장 동료가 아닌 혐오와 시기의 대상으로 변질되어 간다.
영화 내내 남성 직원들이 여성 직원들에게 "너희들이 우리 일자리 다 뺏어간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걸 보면 그들의 이런 행동은 단순히 장난이라기 보다는 질투와 시기가 살짝 섞인 행동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들의 이런 불만도 이해할 만하다. 영화 속 광산의 모습은 점차 쇠퇴의 길을 겪고 있어 직원들도 언제 해고되었다는 얘기를 들을지 모를 만큼 불안정한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가뜩이나 더 많은 직원들이 들어오면 경쟁심이 생길 텐데 광산 일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그들이 생각하기에) 여성 직원들까지 들어오니 더 불안해질 수 밖에. 그런 상황에서 다소의 질투나 시기를 표현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질투와 시기를 표현하는 그들의 방식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그들은 여성 직원들을 견제하는 수준을 넘어서,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기분이 들게끔 만든다. 남성 직원들 입장에선 그저 장난어린 시선으로 놀리는 듯 농담을 건네는 것일지는 몰라도 여성 직원들한테는 그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유리조각이 되어 몸 구석구석에 박힌다. 단지 좀 경력이 된 여성 직원들은 안타깝게도 하도 그 유리조각에 많이 찔려서 무뎌지고 결국은 안아픈 척 하는 게 상책이라는 슬픈 현실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일 뿐. 그런데,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이렇게 한쪽이 고통을 가하면 다른 한쪽은 무시하고 참기만 한다고 해서 유지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과감히 들고 일어서는 조시의 모습을 통해서, 성적 차별 대우, 나아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 형성에 있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 방법으로서 이 영화가 강조하는 중요한 것 첫번째는, 어쩌면 뻔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을 속이지 마라"는 것이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의도한 것만 아니라면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실수에 떳떳하고 절대 자신을 보호하려 들지 말라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남성 직원들이 여성 직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 앞에서 자신들을 포장하는 모습을 보면, 한편으로는 사정이 이해가 가는 부분도 조금 있긴 하나 대체적으로 다소 한심하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심정도 짐작하지 못한 채 본의 아니게(의도적인 면도 좀 있었겠지만) 상처를 입힌 그들은, 그 잘못을 인정하기 보다는 주변 환경과 구차한 근거들로 보호막을 형성하기에 바쁘다. "너희들이 일을 빼앗아가니까 하도 괘씸해 보여서 그렇다"며 당신들같으면 안그러겠느냐는 어조로 응수하고, 심지어는 온갖 사소한 약점들까지 치졸하게 들춰내고 부풀리면서 끝까지 자신에게 오는 상처를 최소화하려 노력한가. 인간의 본능 상 자신의 잘못을 들춰내는 건 싫어하고 최대한 덮어두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당연한 거지만, 인간 관계에 있어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보호하려 애쓰는 모습은 갈수록 더 큰 피고름만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넌지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자신을 보호하면 할 수록, 그만큼 남을 해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 말고 이 영화는 또 하나의 정말 중요한 진리를 역설한다. 바로 "똑바로 헤아려라"는 것이다. 더구나 성적 차별 대우라는 민감한 사안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 폭발시킬지 모르는 남녀 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상대의 마음을 반드시 헤아려야지, 그렇지 않고 일방적으로 감정의 돌을 던지는 것은 그 어느 참혹한 폭력과 비할 바가 못된다는 것을 영화는 이야기한다. 불안한 일자리 앞에서 자신들을 합리화하려 했던 남성 직원들이나, 그마저도 직장 잘릴까봐 두려워 쉬쉬했던 여성 직원들이나, 그들은 모두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보호막을 세우기에 바빴다. 때문에 상대방 입장을 생각해보고 헤아려 보는 일은 자연히 소홀히 한 채, 오로지 자기 보호에만 신경쓰며 상대방은 보지도 않고 돌을 던지기에 바빴다.
남성 직원들은 매우 직접적인 감정의 격랑 앞에서, 그들은 여성 직원들도 똑같이 돈을 벌려고 일을 한 것이고, 똑같이 가정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을 시작한 것임을 헤아리지 못했다. 떳떳하게 일하고 싶은 직장에서, 몸갖고 떠벌리는 별 시덥잖은 농담은 얼마든지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직장 고위급 간부들은 여성들이 사내 부당한 성적 차별대우에 도저히 못견디겠다는 것만 알았을 뿐 그래도 여성들은 먹고 살기 위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절대 일을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은 몰랐다. 청소년기에 불운한 과거가 밝혀진 조시 앞에서, 많은 이들은 그녀가 그만큼 "헤픈 여자"였다는 생각만 했지 그만큼 더 마음이 다치기 쉬운, 더 행복해지고 싶어하는 여인이라는 건 몰랐다. 심지어 그녀의 아들마저도, 그런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어머니를 수치스러워하기만 했지 어머니의 그런 수치심마저도 뱃속 아들에 대한 사랑은 꺼뜨릴 수 없었음을 알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까지도, 연약한 딸이 자기 직장인 광산에서 일한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기만 했지 그만큼 딸의 삶이 절실했다는 것은 헤아리지 못했다.
이처럼 이 영화는 단순히 성적 차별 대우와 이에 대한 남녀간의 성적 대립을 넘어서서, 남을 헤아리지 못하고 무턱대고 돌을 던지는 인간관계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얼마나 깊은 멍을 남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드러내보이고, 그만큼 상대방의 심정을 최선을 다해 헤아리는 것, 그것만으로도 다함께 웃으며 공생할 수 있는 인간관계는 형성될 수 있음을 이 영화는 가르쳐주고 있다. 무슨 전지전능한 신처럼 상대방의 마음을 읽으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렇게 한 만큼, 이 사람은 이만큼 힘들지 않았을까", "이런 상황이 이 사람에겐 그만큼 아프고 고달픈 건 아니었을까", 짐작이라도 해주라는 얘기다. 그 짐작대로 상대방이 다치지 않게 지나갈 수 있게끔 소통의 길을 터주는 것 만으로도, 보다 성숙한 인간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힘주어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정작 중요한 판결 장면을 건너뛴 채, 마지막 갈등 속에서 화해한 조시와 그녀의 아들은 운전 강습을 한다. 서툰 운전 솜씨에서도 그저 하하 웃으면서 조시는 아들에게 다시금 운전대를 쥐어준다. 이 영화는 이러한 남녀간, 가족간, 사회 내의 사람들 간의 갈등을 꺼뜨리는 데 일조한 이 사건이 단지 모든 갈등의 종결지점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서로와 소통하는 법을 가르쳐준 하나의 첫 레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 운전대를 잡고 그런 험난하지만 그만큼 뿌듯함이 남을 인간 관계로의 여정을 향해 혼자 힘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정확히 보이지 않아 쉽지 않지만 헤아릴수록 더 탁 트인 길이 맞이할 그 여정.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그 첫 레슨을 참 가슴 벅차게 몸소 가르쳐주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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