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몸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게 되면 그만큼 서로에 대한 마음도 멀어진다는 얘기일 것이다. 왠만큼 굳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몸이 멀어지더라도 계속 생각하면서 되새기면서 마음은 꾸준히 가까울 수도 있을 텐데, 또 사람 마음이 그렇게 원하는 대로만 되는 건 아닌가 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사람 마음은 몸이 멀어진다고만 해서 멀어지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때론 물리적 거리보다 서로를 잊게 하는데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게 있는데, 그건 시간이다. 물리적 거리에다가 시간까지 더해지면 그건 정말 왠만큼 강인하지 못한 사람이면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시간은 참 괘씸한 것이, 몸은 멀어져 있더라도 마음은 가깝다면, 아니 차라리 마음마저 완전히 멀어져 잊었다면 더 나을 것을, 가끔은 마음이 잊지 않았음에도 사람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하게" 한다. 이런 안타까운 삶과 사랑의 모습이 영화 <국경의 남쪽>에는 잔잔하면서도 곱씹을 수록 진한 설움이 배어나오도록 그려져 있다.
평양에서 태어나 평생 평양 토박이로만 살아온 북한 청년 김선호(차승원). 악단에서 호른 연주를 맡고 있는 그에게 단 하나의 소중한 사랑이 있으니 그녀는 바로 리연화(조이진). 성격도 워낙에 쿨하고 선호가 뭔 말을 하려고 머뭇거리고 있으면 한발 앞서서 뭔 말인지 알아서 말해주는 눈치도 쿨한 여성이다. 이들은 결혼을 약속하고 행복한 미래를 이어나갈 계획을 세우지만,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치게 되니 그것은 선호네 가족이 남한에 있는 할아버지와 자주 연락을 했다는 것이 정부에 발각된 것이다. 잡히면 수용소로 직행할 것이 뻔한 선호네 가족은 결국 북을 넘어 남한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선호는 연화에게 가서 함께 가자고 부탁한다. 그러나 연화는 자신은 남아서 부모님을 설득시킬 테니 넘어가거든 사람을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선호와 연화는 굳게 약속을 하지만 언제 만날지 알 수 없는 여정은 시작되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선호네 가족은 남한에 정착하게 된다. 선호는 연화를 남한에 데려오기 위해 사기까지 당해가며, 치킨 배달이니 웨이터니 온갖 일을 해가며 악착같이 돈을 모으지만 이것도 쉽지 않다. 그러던 중 선호는 연화가 북한에서 결혼을 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고 절망한다. 결국 선호는 자신이 일하는 치킨집 사장님이던 경주(심혜진)과 결혼을 하고 새로 식당까지 차리면서 남한에 확실히 자리를 잡는다. 그렇게 마냥 행복할 것 같던 어느날, 선호는 북에서부터 탈북자들이 단체로 남한에 내려오는데 거기에 그토록 기다리던 연화가 끼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우선 배우들의 연기부터 얘기하자면, 차승원은 이번 영화로 확실히 "연기파" 배우로서의 자리를 굳힌 듯 보인다. 오랜 시간 코미디 연기를 주로 해오다 작년에 <혈의 누>에서부터 연기 변신을 시도했는데(사실 그는 2000년에 <리베라 메>에서 제대로 된 악역 연기를 선보인 적이 있긴 하다), 그 과정을 거쳐 이번 <국경의 남쪽>에서 그의 연기의 깊은 맛이 제대로 우러난 듯 하다. 이전의 촐싹대고 가벼운 분위기의 차승원은 온데간데 없이, 이 영화 속 선호의 모습은 수줍고 여린, 그래서 남한에 올라와서 더 가슴아픈 일을 많이 겪게 되는 서글픈 청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전엔 유난히 선이 굵은 외모가 서구적 분위기를 물씬 풍겼던 그의 얼굴은 이 영화에서는 이상하게 북한의 수수한 총각으로서의 이미지가 생각보다 잘 와닿았고, 탄력있는 북한 사투리 연기에 현실의 아픔 앞에서 하염없이 꺼이꺼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까지, 진정성이 잔뜩 배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제는 단순히 관객들을 즐겁게 하는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가 아니라,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연기를 할 줄 아는 배우로 확실히 한 단계 나아간 듯해 꽤 뿌듯했다.
차승원 외에도 주목해야 할 배우가 또 있으니 바로 리연화 역의 조이진이다. 이 영화 이전에 찍은 영화가 <태풍태양> 한 편 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연기는 참 맛깔나고 진득했다. 북한에서 보여준 연화의 모습은 늘 "직사포"만 쏘며 당당함을 과시하면서도 수줍은 면도 은근히 있는 발랄한 젊은 여성의 모습이었고, 남한에서의 연화의 모습은 여전히 활달한 면은 남아 있지만 갑자기 변해버린 세상과 그동안 겪은 수많은 풍파때문인지 한층 더 연약해진 모습이었다. 조이진은 이 두가지 대립된 모습의 캐릭터를 특유의 거침없고 쿨한 이미지와 묘하게 조화를 이루어가면서 꽤 인상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감정을 적극적으로 토하고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못마땅한 것도 이를 악물고 얘기할 줄 아는, 단순히 남자주인공의 연인으로서의 수동적인 모습이 아닌 보다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라 더 인상적으로 다가온 듯하다. 경주 역의 심혜진은 아무래도 평범한 남한 사람이다보니 앞서 얘기한 두 사람에 비해서는 표면적인 포스가 좀 부족한 건 사실이었지만, 자칫 두 사람만 등장했다면 또 너무 단조롭게 흘러갔을 영화 속에서 삼각관계를 형성하되 악역은 아닌, 선량하고 이해심 많은 여인의 캐릭터로서 무게 중심을 잘 잡아주었다. 이외에도 선호 누나 역의 이아현, 매형 역의 유해진 등 조연들의 감칠맛 나는 사투리 구사와 간간히 나오는 유머감각 있는 연기가 극을 너무 늘어지거나 무거워지지 않게 균형을 맞춰주었다.
이 영화는 보기 드물게 북한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남한과 대립적으로 내세우는 게 아니라 거의 전면으로, 남한측 캐릭터와 북한측 캐릭터를 대비시키거나 대등한 비중으로 등장시키는 게 아니라 북한 사람들의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고 남한 사람들은 거의 주변인 역할을 하는 식 말이다. 그래서 초반에 등장하는 북한에 대한 묘사는 꽤 정교해서, 요즘 세상이 참 좋아져서 이렇게 북한의 모습을 세세히 들여다 본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선호가 연주하는 악단의 연주와 더불어 공연되는 초대형 스펙터클 뮤지컬, 태양절 기념으로 수많은 관중들이 단체로 춤을 추는 장면 등 거의 북한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광경들을 꽤 사실적으로 묘사한 듯 보였다. 당연히 북한에서 찍을 수 없었을테고 모두 남한에서 찍었을텐데, 그런 의심이 거의 들지 않을 정도로 북한의 모습을 잘 재현해놓은 듯 보였다.
이렇게 영화는 분단을 소재로 하고 있되, 남북한 측의 충돌이나 갈등, 화해보다는 우리가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새터민들의 현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전의 분단 소재의 영화들과는 사뭇 다른 전개를 이어간다. 이 영화에는 이전의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나 <웰컴 투 동막골>에서 나왔던 화해의 메시지나 인간적인 남북간의 화합 같은 건 표면적으로 강조되지 않는다. 정치적인 문제가 직접적으로 조명되면서 어떻게 폐해를 만들어가고 있는지와 같은 다소 민감하고 딱딱한 소재도 등장하지 않고. 이 영화는 조용히, 별다른 클라이맥스도 없이 조용히 북을 넘어 남한으로 온 새터민들의 삶을 그려나간다.
잔잔하고 별다른 굴곡이 없는 전개라서 자칫 지루해 질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오히려 영화는 극적인 상황을 강조하고 그 속에서 감동을 극대화시키려 하지 않음으로써 더 설득력을 발휘한다. 인물들의 심리는 조용히 흘러가면서 한 단계 한 단계 차근차근 그 감정의 두께를 더해간다. 남한으로 넘어온 선호의 삶은 북녘에 있을 때 가졌던 희망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남으로만 넘어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었지만 막상 남으로 내려온 뒤의 삶은 생각보다 무척이나 빡빡하고 고되다. 이런 삶 속에서 선호는 어떻게 뭐라 하지도 못하고 그저 묵묵하게 가슴으로만 그 서러움을 삭히며 살아갈 뿐. 이러다 결혼도 하고 새로 가정을 마련하긴 하나, 여전히 선호의 모습은 어딘가 힘이 쭉 빠진 듯한 생기 없는 모습이다.
선호의 이러한 고단한 삶은 연화가 남으로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고, 그러면서도 한층 더 고단함이 깊어진다. 새롭게 만나게 된 선호와 연화 사이에서는 충격적인 갈등이나 사건같은 것이 별다르게 일어나지 않지만(사실 선호가 결혼했다는 사실은 언젠가는 연화가 알게 될 부분이니), 시간이 지날 수록 알게 모르게 멀어진 두 사람의 감정의 폭은 생각할 수록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멀어지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맞춰 변해가야 했던 이들의 삶은 결국 그들의 사랑을 지난 시절의 추억으로나마 기억하게끔 만들어버렸으니 말이다.
대표적으로 인상적인 장면이 연화를 쫓아온 선호를 향해 연화가 끊임없이 돌멩이를 던지는 장면이다. 연화는 그저 아무런 말도 없이, 목끝까지 차오른 서러움을 참을 듯 내뱉을 듯 하면서 선호에게 하염없이 돌멩이를 던진다. 이런 연화의 모습처럼, 세월의 흐름 앞에 멀어져 버린, 변해 버린 사랑 앞에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별 다른 게 없다. 그저 허공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허공을 향해 원망섞인 돌멩이를 던질 뿐. 세월은 끄떡하지 않고 흘러가면서 흐르는 자신의 등에 사람의 오만 감정도 함께 실어서 흘러가는데, 그건 사람의 힘으로는 좀체 잡기 힘든 것이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최대한 멀리 가지 않게끔 목놓아 부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런데 이 선호와 연화의 경우는 거기다가 끝을 알 수 없는 단절의 벽마저 둘 사이를 가로막아놓았으니, "결혼할 것 같다"는 얘기는 "결혼했다"는 얘기로 전해질 만큼 상대방의 진심은 좀처럼 전해지지 않고 더 멀어질 수 밖에. 어쩌면 이들의 사랑이란, 사람의 감정과는 반대로 너무나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월에 희생당한 사랑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들의 사랑이 더 절실하게 다가왔던 이유는, 영화적인 상황이 아닌 실제로 한국이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들은 불치병이나 기억상실 같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이유로 멀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한국의 상황에서만 가능한, 남북의 갈라짐으로 인해 생긴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 땅덩어리에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과 북한은 왕래하기도 소통하기도 머나먼 외국보다 더 어렵게 느껴진다. 이런 상황에서 연인의 헤어짐은 더욱 기약을 알 수 없게 만든다. 돌아오는 건 메아리 뿐인 굳건한 분단의 벽 앞에 선 이들에게, 세월은 더 이들을 몰아세우면서 그냥 가라, 시간은 어차피 흘러가게 되어 있으니 거기 따라서 그냥 가라고 부추기만 한다. 인간의 힘은 너무 약해서 어쩔 수 없이 거기 휩쓸려 가게 되고. 선호와 연화 뿐 아니라, 많은 새터민들도 이렇게 가슴이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많이 겪었을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이념적인 문제나 평화적인 화해같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기 보다는, 등장인물 각자의 감정에만 집중하고 점차 닳아져가는 그들의 사랑에만 집중하면서 한편으론 더 인간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념이나 생각의 차이같은 게 문제가 아니라, 무너질 생각을 하지 않는 단절의 벽 앞에서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잊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세월에 따라 변하며 멀어지게끔 부추기는 시간의 잔혹함이 더 큰 문제인 것이다. 변하기를 강요하고, 그 변화에 무뎌지게끔 강요하는 시간 앞에 인간은 너무나 나약하게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어서, 이들의 사랑은 더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것이다.
영화 중에서 참 인상깊은 대사가 있었다. "삶이란, 이해할 수 없는 음표로 가득찬 악보와 같아서, 내가 할 일은 그저 더듬더듬 연주하는 것 뿐이었습니다"라는 대사. 영화 속 선호와 연화의 모습과 겹쳐져서 참 많은 울림을 주었다. 삶이란 건 적어도 자기가 방향을 결정하고 이렇게 연주해야지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일텐데, 감정을 비웃듯 굳게 잠겨 있는 분단의 벽과 무심하게 흐르는 시간은 그들로 하여금 어떤 악보인지 알아볼 새도 없이 그저 닥치는 대로 연주하라고 몰아세우기만 한 건 아니었을까. 영화 속 선호가 내내 지쳐 보이는 모습을 보였던 것도 아마 이런 세월의 부추김에 지쳐서 였을 것이다. 잔잔한 영화의 흐름만큼 세월도 잔잔하게 흘러갔겠지만, 그만큼 세월은 생각보다 더 잔혹했다. 이렇게 영화는 분단을 소재로 하긴 했지만 뭐 이념의 차이라거나 불가피한 갈등때문에 가슴에 남았던 게 아니라, 흐르는 시간의 벽 앞에 그저 무릎꿇고 휩쓸려 갈 수 밖에 없었던, 단지 새터민이 아니라 감정을 지닌 한 인간이 가져야 했던 안타까운 초상이라 더 가슴에 깊이 남았다. 하염없이 흘리는 선호의 눈물처럼, 이상하게 내 마음도 하염없이 그저 먹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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