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스파이크 리는 상업영화와 거리감을 둔 아웃사이더적인 재담꾼이다. 그의 영화를 찬찬히 살펴보면 지극히 독설적인 비판을 서슴치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의 전작 중 가장 최근작인 '25시'를 보더라도-'She hate me'를 논외로 치는 까닭은 이 작품의 국내개봉이 이뤄지지 못했으며 필자역시 구경도 못해서-단 하루의 단상을 에워싸는 권태로운 불만들이 타인종과 본인 스스로에 대한 불만으로 폭발되는 양상으로 발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마치 랩을 하듯, 에드워드 노튼이 늘어놓는 미국사회의 다인종에 대한 폭언은 이 영화가 짊어지고 있는 본질적인 화두로 귀결된다.-
이 영화는 일단 스릴러라는 장르로써 위용을 자랑하고 관객을 손짓한다. 허나 이 영화의 엔딩크레딧을 뒤로 하고 극장문을 빠져나온 관객들은 결코 스릴러영화를 봤다라는 기분만을 지닐 수가 없다. 이 영화는 스릴러라는 장르를 빙자해서 블랙코미디적인 비판적 조소를 내면에 숨겨놓고 있다. 하지만 이는 불쾌함보다는 의외의 발견에 대한 반가움에 가깝다.
시작부터 영화는 묘한 분위기로 말문을 연다. 달튼 러셀(클라이브 오웬 역)의 직설적인 나레이션으로 출발하는 이 영화는 노골적으로 관객에게 이 영화를 보는 주안점을 요구한다. -물론 호환, 마마보다도 무섭다는 불법비디오에 대한 주의는 아니고-
흔히 우리는 '왜'라는 물음에 주목한다. 어떤 사건이나 사실을 접하게 되면 그에 대한 원인이 궁금해지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나 그러다보면 '어떻게'라는 사실은 살며시 외곽으로 밀려나 추후에 주목받더라고 당장은 소외되기 일쑤다. 특히 스릴러라는 장르안에서 관객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어떻게'보다는 '왜'에 가깝다. 그 본질적 이유는 '어떻게'보다는 '왜'가 은폐되어 관객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또한 과정보다는 원인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키는 것이 결말까지의 긴장감 유지와 농축된 긴장감으로부터 장르자체에서 기대되는 유종의 미를 수확하기가 더욱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 영화는 '어떻게'를 관객에게 요구하는가.
이 영화의 '왜'라는 물음은 관객에게 스릴러다운 서스펜스적 긴장감으로부터 빚어지는 재미라는 요소에 국한된 것이 아닌 관객에게 지적인 논의점으로 맺어질 수 있는 생각할 수 있는 여지로써 차용된다는 것에 있다. 말 그대로 이 영화의 '왜'는 단순히 장르의 목적이 아닌 메세지적인 측면으로의 활용에 있다는 것.
그렇다면 어째서 '어떻게'를 부각시킨것일까. 그것은 '왜'라는 질문을 오용할 가능성이 있는 관객의 시선을 '어떻게'에 잡아둠으로써 장르적인 재미를 살림과 동시에 '왜'라는 질문의 은폐를 통한 목적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것에 있다. 또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재미를 살림과 동시에 메세지적인 측면의 은유를 동시에 공존시키고자 하는 의도에 가깝다. 한마디로 이 영화의 스릴러라는 장르자체가 맥거핀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에서도 클리셰처럼 울궈먹어질 스릴러라는 장르의 도태를 다른 측면으로 활용한 기발함으로까지 여겨진다.
어쨌든 이 영화는 생각보다 담담하다. 무언가 긴장감이 확 하고 터져버릴것만 같은 묘한 분위기 조성은 유지되지만 결과적으로 상황이 몰고가는 긴장감의 폭주는 이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지루하지 않은 담담함이 보여주는 진지함이 관객을 갸우뚱하게 만들며 스크린으로 몰입하게 하는 우직함을 보인다.
사실 이영화자체가 상당한 은유에 가깝다. 뉴욕 한 가운데의 저명한 신용은행이 백주대낮에 4명의 무장강도에게 허탈하게 점령당하는 과정은 마치 백주대낮에 뉴욕의 심장부인 국제무역센터의 두 쌍둥이가 비행기 두대에 연신 엊어맞고 녹다운된 911테러를 상기시킨다. 또한 증발되어 버린 테러리스트들은 미국이 이를 갈며 아프가니스탄에 폭탄을 퍼부었지만 끝내 찾지 못한 빈라덴의 정체만큼 모호하다. 또한 이 영화는 여전히 유효한 미국사회내의 911테러의 공포를 블랙코미디식으로 풍자하는데 터번을 쓴 아랍계 인질이 범인들에 의해 밖으로 풀려나자 오히려 그 인질을 향해 경찰은 '아랍놈이잖아!'라면서 질색하고 그를 구타하기까지 한다. 이는 이 영화에서도 출연한 조디포스터의 '플라이트 플랜'에서 그녀가 아랍인을 향해 근거없는 혐의를 뒤집어 씌우던 분노와 오버랩된다. 또한 후반부에 범인과 같은 의상을 착용한 인질들이 경찰들의 진압직전에 쏟아져나와 인질과 범인을 가릴수 없는 아비규환같은 시퀀스에서 확인되는 것은 불신감이다. 911테러전까지만 해도 적은 불명확했다. 그러나 911테러이후로 적은 명확해졌다. 아랍. 그것은 미국의 명백한 적으로 규정되었으며 내색은 하지 않아도 은연중에 지니는 적대감으로 발전되었다. 사실 모든 아랍인이 적이 아닌 것은 알지만 걔중에 누군가가 적일지도 모른다는 경계감. 결국 그것은 아랍사회전체에 대한 반감으로 표출되고 결과적으로 타인종에 대한 경계심으로 발전되며 미국사회내 다양성에 대한 위기감으로 귀결된다. 범인도 인질도 알 수 없는 그 상황과 중간중간 액자처럼 끼워넣어지는 시간을 거스른 심문장면은 현재 미국사회가 지닌 심리적 패닉상태를 은연중에 묘사하고 풍자한다. 또한 텅빈 은행에 진입한 경찰이 포획한 범인들의 총이 모두 장난감이라는 사실은 마치 대량살상무기를 빌미로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이 증명하지 못한 그들의 살인무기처럼 허탈하다. 상황은 종결되었지만 변한 것은 없다. 피흘리고 죽은 희생자도 사라진 돈다발도 존재하지 않는다. 범인은 증발했다. 이 영화는 그렇게 기존의 범죄스릴러를 뒤집은 기발함을 역공세하며 영민한 자성적 목소리로 승화시킨다.
무엇보다도 쿨한 것은 이 영화가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방식인데 이영화가 취하던 장르적 도피에서 다시 장르로의 귀환으로 태도를 바꾸는 듯한 종결방식은 상당히 넌센스적이면서도 유쾌하다. 사라진 범인이 다시 나타나면서 마지막 선물까지 남기고 사라지는 여유로움은 관객에게 충분한 쾌감으로 다가온다. 또한 이 영화가 보여주는 도덕적 방식의 범죄행위는 마치 관객에게 범인에 대한 스톡홀름 신드롬(Stockholm Syndrome)을 각인시킬 정도로 우호적인 인상을 준다. 솔직히 911테러 당시 무너지는 쌍둥이 빌딩을 보며 쾌감을 느꼈다는 사람은 있었지만 바그다드에 내리꽂아지는 미사일 더미를 통해 쾌감을 느꼈다는 이는 없지 않은가. 이런 인상은 이런 면과도 그리 멀지 않다.
또한 흑인소년에게 총을 맞았다는 백인 경찰의 인종차별에 대한 확증적 진술과 터번을 빼앗겨 분노를 표하는 시크 교도 인질, 그리고 폭력적인 게임앞에 담담하며 과정보다는 결과적인 성공을 긍정하는 흑인 꼬마 등의 묘사는 '크래쉬'가 보여주던 아름다운 인종간의 종속적 차별 허물기보다도 현실적이며 그런 현실을 뭉뚱그리며 그 상태 그대로 묘사해내는 모양새가 오히려 담담해보인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연기력으로 무장한 배우들이 화려하게 전면배치되어 있다는 것 자체로써도 매력이다. 키스 프레이저 역의 덴젤 워싱턴과 달튼 러셀 역의 클라이브 오웬, 그리고 마들린 화이트 역의 조디 포스터까지. 이 세명의 배우가 한 영화에 출연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영화는 당연히 주목받아야만 하며 그런 시선적 기대감에 이 영화는 확실하게 부응한다. 세명의 배우가 보여주는 연기력 만으로도 영화에 대한 종전 부연설명을 싸그리 잊어버려도 괜찮을 것만 같다. 또한 존 다리어스 역의 윌리엄 데포 역시 반갑다.
어쨌든 독설적인 랩퍼처럼 직설적으로 자국내의 불만의식을 거침없이 토해내던 스파이크 리는 상업영화의 틀을 쓰며 풍자적인 여유를 장착했다. 허나 이는 전혀 비관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의 무기가 하나 더 늘어버린 것만 같은 형세다. 보다 많은 관객에게 그가 지닌 비판적 문제제기 의식에 쉽게 다가설 수 있게 만드는 이 영화는 경외감 그 자체이며 장르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지적인 메세지 소통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한손에 거머쥔 영민함으로 그자체를 보여주는 바람직한 추임새이며 새로운 장르적 변환의 신선함마저 엿보인다. 긴장감은 의외로 단아하지만 그 끝에는 유쾌한 웃음이 흩날린다. 비범하면서도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결말은 이 영화가 추구하는 다양한 바람직함 중에서도 가히 으뜸이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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