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3D 애니메이션은 요즘 애니메이션의 대세가 되었다. 11년 전 픽사 스튜디오가 <토이 스토리>를 내놓을 때만 해도 영화 사상 최초의 3D 장편 애니메이션이라면서 대단한 스포트라이트와 함께 우려도 적지 않았는데, 이게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대성공하고, 픽사가 이후 성공작들을 내놓다가 다른 한편에서 드림웍스까지 <슈렉>으로 흥행 잭팟을 터뜨리면서 3D 애니메이션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애니메이션계가 눈독들이는 새로운 흥행 활로가 된 것 같다.
이 과정에서 이십세기폭스 사와 블루 스카이 스튜디오가 내놓은 <아이스 에이지>는 어쩌면 다소 얌전하게 얼굴을 드러낸 영화였다. 픽사처럼 새로운 활로를 개척한 것도 아니고, 드림웍스처럼 도발적인 유머를 구사하지도 않으면서 상대적으로 조용하지만 괜찮은 흥행성적과 함께 3D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했다. 4년 전에 봤던 <아이스 에이지>는 그래서 그런지 픽사의 작품처럼 한치의 빈틈도 없는 완벽한 완성도도, <슈렉>처럼 눈부신 패러디와 유머로 가득한 발칙함도 갖고 있지는 않으면서 비교적 무난하고 수수한 재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4년 만에 등장한 속편 <아이스 에이지 2>를 보고 난 지금, 이 영화 역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확실한 자기들만의 매력을 착착 다듬어 가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전편에서 아이를 두고 한바탕 소동을 겪다가도 결국 친구로 뭉치게 된 맘모스 매니(레이 로마노)와 나무늘보 시드(존 레귀자모), 그리고 검치 호랑이 디에고(데니스 리어리). 매니는 한층 더 자신이 정말 최후의 맘모스인가에 대한 의심이 커진 듯 하고, 시드는 여전히 눈치 없고 참견이 많으며, 디에고는 여전히 터프함을 과시하지만 그래도 성격은 착해진 듯하다. 그런데 순탄한 삶을 지내고 있던 이들에게 또 한번의 위기가 닥치니, 전편에선 빙하기가 그들을 괴롭힌 데 이어 이번에는 난데없는 해빙기가 다가온 것이다. 천금같이 덮여 있던 얼음들이 녹고 갈라지고 봇물이 터지면서 또 한번 동물들의 생존이 위협당하고 이들 역시 또 한번의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여정 중 일행은 예상치 못한 동무를 만나게 되니 그는 바로 매니가 최후의 맘모스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 줄 여자 맘모스 엘리(퀸 라티파). 그런데 문제는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주머니쥐 오빠들(숀 윌리엄 스콧, 조쉬 펙)과 함께 자라서 그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주머니쥐라고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매니에겐 그래도 종족 번식의 희망이 남아 있건만, 이런 골때리는 문제들을 껴안고서 그들의 여정은 계속되는데.
최근에 나오는 3D 애니메이션일 수록 기술의 발전을 보여주는 건 이제 이득이라기보다는 필수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컴퓨터 사양도 날로날로 높아지는 마당에 그래픽 기술이 제자리라면 오히려 영화의 자질을 심하게 의심해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 역시 만족스런 그래픽 기술의 발전을 보여준다. 매니, 시드, 디에고, 다람쥐 스크랫까지 거의 모든 캐릭터들이 털을 갖고 있는데, 이들의 털은 한층 더 결이 살아 있고 뽀송뽀송한 느낌이 더해져 시각적으로 풍성한 느낌이 더 강하게 전해진다. 또한 빙하가 녹는다는 설정만큼 물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리저리 터지고 튀는 투명한 물살들은 진짜 손발을 담궈보고 싶을 만큼 실감나는 물기를 자랑한다. 이런 물기에 젖은 캐릭터들의 털의 모습 또한 윤기가 좔좔 흐르는 것이 실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또한 빙하가 가끔 결정적으로 무너질 때마다 보여지는 스펙터클한 장면들도 절대 소홀히 하지 않고 여느 실사 블럭버스터 못지 않은 거대한 시각적 쾌감을 전해주기에 충분했다. 3D 애니메이션의 가장 좋은 점 중 하나가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서 적어도 이러한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발전의 최대치에 가까운 모습을 항상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편에서 나름의 개성이 각각 존재했던 캐릭터들의 면면은 그 개성이 더 뚜렷해지면서 캐릭터 감상의 재미를 더 풍부하게 해주었다. 무뚝뚝하고 퉁명스럽지만 속정은 깊은 매니는 속편에 와서 자신이 정말 최후의 맘모스인가에 대한 의심, 회의가 더 심해지면서 나름대로 갈등하는 모습이 강화되었고, 시드는 전편과 마찬가지로 눈치 없이 떠들고 참견을 잘 하지만 한편으론 친구들을 적절히 중재할 줄도 아는 기특한 녀석으로 더 발전한 듯하다. 디에고는 전편에서 악당에서 주인공들 편으로 돌아선 것에서 모자라 이제는 물 공포증까지 들키는 바람에 맹수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지만, 그러면서도 먹이사슬의 상위권을 차지하고픈 욕구는 여전히 남아 있는 꽤 입체적인 캐릭터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기존 캐릭터들에 비해 2편에 등장한 새로운 캐릭터들 또한 재치만점의 개성으로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그중 발군의 캐릭터는 매니의 짝인 맘모스 엘리. 덩치에 맞지 않게 주머니쥐 형제들과 자라는 바람에 자신이 주머니쥐라고 곧이곧대로 우기고 다니고,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주머니쥐들의 행동이다. 그 덩치로 꼬리로 나무에 매달리고, 나무에 올라가고, 나무 뒤에 숨고...;; 맘모스의 형태를 하고 있고 분명히 맘모스인데도 성장 환경의 차이로 인해 정체성에 갈등을 느끼는 모습이 무겁지도 않고 재미있게 그려져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그녀 옆에서 마치 헐리웃 영화에서 진지한 주인공 옆에서 촐싹대는 친구처럼 늘 촐랑거리는 행동만 하고 다니는 주머니쥐 형제의 모습도 유쾌했다. 진짜 무슨 20대 청년들처럼 손에다 눈을 갖다 대면서 "널 지켜보고 있다"는 시늉을 하질 않나, 제작자들의 센스가 상당하구나 싶었다.
아, 다람쥐 스크랫을 빼놓을 수 없다. <아이스 에이지> 시리즈가 뭔가 특이한 게 있다면 그 중 일부는 다람쥐 스크랫 덕분이다. 똑같은 빙하기를 배경으로 주 내용은 매니와 시드, 디에고 일행의 여정인데 이들과는 전혀 상관없는(물론 가끔 뭔가 큰일을 저지르기도 하는 녀석이지만) 캐릭터인 스크랫이 또 자기 나름대로 거의 평행하게 작은 에피소드를 만들어가는 것이 이 시리즈의 특징이다. 특히나 속편에서 한층 더 강조된 스크랫의 눈물겨운 도토리 사랑은 매번 안타깝게 도토리를 놓치는 모습을 지켜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단순히 배꼽잡고 웃게 하는 것을 넘어 스크랫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애정까지 심어준다. 대사 하나 없이도 과장된 표정과 몸짓으로 영화 내내 웃음을 책임진 기특한 캐릭터였다. 엔딩 크레딧을 살펴보니 이 스크랫의 목소리(그래봤자 낑낑~ 에헷! 정도지만;) 연기를 맡은 사람이 1편과 <로봇>의 감독인 크리스 웨지였다는 것에 살짝 놀랐다.
전편도 그렇고 속편인 <아이스 에이지 2>에서도 일단 상상력 면에서는 어느 정도 점수를 먹고 들어간다. 빙하기라는 시기는 우리가 책에서나 접해봤던 시기지 직접 눈으로 목격했다거나 구체적인 체험담을 들어본 적은 단 한번도 없는, 정말 우리가 상상만 해야 할 시기이다. 동물들의 모습도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의 동물들이 가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우리가 머리 속에서 상상만 했던 빙하기의 구체적인 모습들, 그 시기의 동물들을 시각적으로 구현함으로써 상상의 나래를 한껏 넓게 펼치게 해준다. 한껏 날렵하고 홀쭉한 나무늘보나 어금니가 강조된 호랑이, 악어의 조상인 것 같은 입큰 해양생물, 얼굴이 꼭 사람같이 생긴 거북이에 이르기까지 상상력이 총동원된 듯한 동물들의 독특한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았다.
이렇게 상상력의 여지를 풍부하게 남기는 "빙하기", "해빙기"라는 설정은 한편으로 또 하나의 독특한 설정을 불러들인다. 빙하기라는 시기가 우리가 그냥 일상생활 속에서 소소하게 지나치는 하루가 아닌, 문자 그대로 "지각변동"을 일으킬 만한 결정적 시기라는 것이다. 전편에선 얼음이 얼었듯, 2편에선 얼음이 녹게 되면서 땅의 상태, 자연의 상태를 완전히 뒤바꿔 놓는다. 이런 시기에서 주인공들 역시 그저 일상 생활만 할 여유가 없이 끝없는 피난과 여행을 거듭해야 하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재난과 맞서야 한다. 언제 어떻게 목숨을 잃을지 모르고, 종족 자체의 생존이 흔들릴지도 모를 상황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캐릭터들은 희희낙락 즐겁게 놀아도 사실 이들이 맞닥뜨린 상황은 마냥 즐겁게 볼 상황이 아닌 것이다.
영화 속 캐릭터들의 심리적 갈등을 통해서도 이런 심각한 상황은 얼마든지 느껴진다. 대표적인 게 매니의 경우인데,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최후의 맘모스"라는 주변의 말을 곱씹는다. 또 한번 동물들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이 온 지금, 정말 자신이 마지막 맘모스일까하는 고민은 더욱 절실해진다. 안그래도 자신과 닮은 존재를 찾고, 기왕이면 종족 번식도 해봐야 좋은 상황에서 절체절명의 재난까지 다가오니 더 절실해질 수 밖에. 마지막 결정적인 위기에 봉착하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고민이 생존의 갈림길을 앞두고 더 강렬하게 맞부딪친다. 그러나 함께 생존의 위기를 겪었고, 똑같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엘리를 만나게 되면서 매니는 이전과는 다른 맘모스의 모습으로 한층 더 성장해 간다. 매니 뿐 아니라 마냥 터프한 맹수였던 디에고도 물 공포증이라는 나름의 난관에 부딪치면서 갈등하고, 시드도 좀 코믹하긴 하지만 "불의 신" 사건과 더불어 위기에 봉착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보통 애니메이션에는 주인공과 맞서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키는 적이 있는 반면, 이 영화에는 특별히 주인공들과 대립되고, 끊임없이 갈등을 낳는 적이 없다. 변화무쌍하고 때론 대단히 위협적인 자연의 변화 자체가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거는 적이기 때문이다. 냉혹하고 변화무쌍한 자연의 모습 안에 죽기만을 바라는 대머리독수리들도 있고, 공격적인 해양생물들도 포함되는 것이다. 이렇게 거대한 자연이 적으로 버티고 서 있는 상황 속에서, 우리의 주인공들은 생존을 앞에 두고 나름의 갈등을 겪으면서도 서로를 중재하고 이어주고, 떨어질라치면 손을 맞잡아주면서 험난한 여정을 완성해 간다. 분명 성격적으로 하나씩 결점들이 어느 정도 있는 캐릭터들이면서도, 서로 몸과 마음을 뭉쳐 함께 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죽이 잘 맞는 일행들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으로는 독특하게 재난영화에다 로드무비 형식까지 합한 상황에서, 이들 주인공들은 갈등과 협동의 묘한 조화 속에서 어른 관객들이 봐도 무리없이 기분 좋을 멋진 동무들이 되어 간다.
이렇게 이 <아이스 에이지> 시리즈는 유별나게 도발적이거나 기술에 있어서 확 눈길을 사로잡는 발전을 했다거나 하는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지만, 이번 <아이스 에이지 2>를 통해서 어느덧 더 선이 뚜렷해지고 그 매력을 더욱 독특하고 선명하게 가꾸어나간 친구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2편의 흥행 성공으로 인해 3편도 나올 예정이라는데, 이제 자기들만의 확실한 매력을 보여줌으로써 기특한 캐릭터들로 자리매김한 이 친구들이, 3편에선 아주 빛을 발해주기를 기대한다. 또 한번 생존의 위기 속에서, 또 한번 티격태격하다가 화해하고 더 굳건한 동무가 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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