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3.08 대한극장 언론시사회
<주>이 글은 다량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내용을 알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읽는 것을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특정 인물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으니 굳이 이름은 밝히지 않겠지만, 나름 꽤나 유명한 지식인으로 거론되던 분을 조금 알고 지내게 된 적이있었다. 그렇고, 이미지가 워낙에 진보적이면서도 균형잡힌 가치관의 소유자라는 평판이 많아서 내심 꽤나 기대를 했었다. 가능한 한수 배우고 싶다는 열망에 불탔었다. 뭐 이러저러한 자세한 이야기를 늘어놓자면 너무 길어지고,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엄청난 실망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처음 놀란 것은 익숙해진 위치에서 나오는 놀라운 거만함, 그리고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모르게 드러나는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랄까. 마지막 종지부를 찍은것은 술자리에서 드러난 단정치 못한 행동거지(완곡하게 표현해서)였다.
이런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은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아무튼 그날 이후로 평판이나 이미지를 믿지 않게 되었다.
영화는 환경운동을 하는 여교수를 비추면서 시작한다. 매력적인 외모에 지성을 갖춘 여인, 왠일인지 다리를 절기는 하지만 그것이 묘한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여인이다. 그러나 제목으로도 쉽게 짐작할수 있듯, 이 교수는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른 인물이다.
흔한 말로, 여우하고는 같이 살아도 곰하고는 같이 못산다고 한다.
그런데 여우로 봐 주기엔 이 여인 너무 빤히 들여다보인다. 이리저리 내숭을 뿌려대면서 살짝살짝 눈웃음을 던지지만, 요즘말로 '고수'라고 부르기에는 좀 어설프다. 게다가 남자들의 시선을 끄는 어린 제자는 아예 대놓고 구박을 한다. 이런수에 누가 넘어가랴 싶은데, 놀랍게도 다 넘어간다. (알면서 넘어가는건지, 몰라서 넘어가는건지...)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도 별반 다르지는 않다. 환경운동이라는 간판아래 모인 인물들은 PD,교수,초등학교 선생님이라는 사회적인 위치에도 불구하고 술자리서 은근슬쩍 농이나 주고받고 추파나 던져댄다. 여기에 여교수의 과거를 아는 남자 '박작가'(지진희)가 합류하면서 얽히고 설키기 시작한다.
누구나 철없이 바보짓을 한 학창시절은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모범생으로 착실히 살아왔더라도, 돌이켜 회상하면 얼굴이 붉어지는 창피스런 기억 하나 정도는 갖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녀의 과거가 그냥 살짝 얼굴 붉힐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과거를 알면 알수록, 현재의 그들도 그닥 달라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다만 차이라면 과거의 그들은 본모습 그대로가 노출되었고, 현재의 그들은 직업과 사회적인 위치라는 포장지로 숨겨져있다는 것 뿐이다. 그녀의 과거는 숨기고 싶은 비밀이지만, 현재의 그녀 또한 비밀 투성이이다.
과거와 현재에 대칭점으로 존재하는 두개의 죽음은 이러한 상황의 유사성을 강하게 만든다.
영화의 초반 여교수의 어설픈 내숭과 사랑게임에 가증스러움을 느끼지만, 일상의 모습들이 나열되며 점점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의 행동에 놀라게 된다. 차라리 뻔뻔스럽지만 자신의 욕망의 본질을 직시하고 있는 여교수의 편을 들어주고 싶어진다. 어쩌면 이 부분에 있어서는 여성관객과 남성관객의 느낌이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라는 감정에서 남자와 여자의 입장과 생각이 다르니만큼 같은 상황을 보는 느낌도 다를 것이다. 더구나 영화의 방식은 어느 한쪽의 시선이 아닌 관찰자의 입장으로 일상을 나열한다. 비슷한 상황을 겪어본 남녀는 각각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투영해서 영화를 감상할 것이다.
반면, 이 감정없는 시선으로 관찰한 일상의 나열은 영화를 지루하게 느끼게 만든다. 여교수를 중심으로 여러 인물의 관계가 얽혔음에도 불구하고, 그 에피소드간의 긴장감이 떨어지기에 극적인 추진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에피소드들이 소재를 기준으로 응집력있게 배치되지 못해, 정리되지 않고 산만한 느낌이 강하다. 이러한 추진력의 부족은 결말에 이르러도 절정을 느끼기에는 부족하다.
게다가 제목에서 주는 유혹의 짜릿한 느낌을 잡아내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다. 애초에 여교수가 대담무쌍하게 여러 남자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설정이기에, 그 미묘한 감정의 부딪힘들이 기대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유쾌하고 장난스럽지만, 유혹하는 이와 유혹당하는 이의 감정 줄다리기의 쾌감은 약하다. 노출의 수위는 낮지 않지만 에로틱한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이때문일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돋보인다. 우리 주위의 인물들에게서 가끔 발견하는 양아치 기질(?)을 무리없이 연기해 낸 지진희, 욕심많고 가증스러운면서도 뭔가 어설픈 여교수의 문소리는 "역시"이다.
게다가 조연들의 연기도 참으로 대단하다.
PD역의 조성하, 안교수역의 김영호, 문교수역의 정우혁은 표정 하나로 대사를 넘어서는 전달력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배우들의 저력이 넘쳐나는 영화이다.
어찌보면, 감독이 이런 배우들의 저력을 적재적소에 정리하지 못한것이 문제인듯 하다. 새로운 방식의 코메디로써의 시도는 좋으나, 싱싱한 소재를 잘 살리지 못했기에 더욱 안타깝다. 개인적으로 문소리씨의 팬이라 이 영화의 아쉬움의 공백에 미련이 남을 뿐이다.
written by suy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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