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2.07 브로드웨이 시사회
<주>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다량 포함되어있습니다. 영화의 내용을 알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읽는 것을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자들은 알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이 여고시절 한권쯤은 읽었을법한 작은 책이 있다.
일명 "할리퀸 시리즈"라고 불리는 책인데, 셀수 없이 많은 소설을 포함하는 시리즈 임에도 불구하고 그 구조는 지극히 단순하다.
주로 위기에 처한, 혹은 아주 평범하게 살아가던 여성이 우연한 사건으로 돈 많고 잘생긴, 그러나 건방지고 시니컬한 남자를 만난다.
그리고 두어가지 시련을 겪으며 사랑에 빠지고, 그들의 사랑은 또다른 남자나 여자의 등장으로 위기를 겪는다. 그러나 결국은 시련끝에 사랑에 성공한다.
이 소설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이러한 단순한 스토리 구조에, 매번 바뀌는 등장 인물들의 의상이나 외모에 대한 묘사 때문이다.
소설의 드라마 구조가 단순한 대신, 대부분의 페이지는 여주인공이 입은 드레스가 얼마나 섬세하고 아름다운가, 남자 주인공의 외모가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들이 키스하거나 포옹하는 순간이 얼마나 황홀한가는 묘사하는데 시간을 할애한다.
요즈음 등장하는 '귀여니'의 인터넷 소설도 이런 맥락의 일환이 아닐까 한다. 다만, '귀여니 소설'의 경우는 그 연령층을 낯춰 10대에게 판타지를 제공한다. 아무래도 외국의 20대들의 사랑 이야기보다는 한국 10대의 이야기가 더 설레고 환상적인테니 말이다.
사실 이런 소설들은 무척 재미있다.
페이지 수는 힘들것 없이 수월히 넘어가고 중간중간 숨어있는 유머 코드들은 독자를 킬킬거리게 만든다. 결말의 내용이 뻔하건 어쩌건 간에 일단 마지막을 확인하게 만들고 싶어지는 힘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종류의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들을 <불량식품>이라고 부른다.
사실 불량식품은 영양가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 모양들도 조악하고 위생상태도 의심스럽기 마련이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이런 불량식품들이 맛있다는 것이다.
물론, 항상 불량식품만 먹는다면 심각한 영양 불균형에 시달리고, 심하면 영양실조까지 일으킬 수 있지만, 이러한 소소한 재미가 전혀 없다면 사는것도 참 피곤한 일일 것이다.
늘 심각하게 진지한 표정만 짓고 살아가는 것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재미없나.
게다가 이런 불량식품도 만든 사람이 뜻을 품고 심혈을 기울여서 잘 만든다면 <요리>의 경지에 오르지 못할 것도 없다.
장르는 약간 다르지만, 한때 황당함과 유치함의 극단으로 여겨졌던 '주성치 영화'가 "나는 유치합니다."라는 캐치프레이드를 스스로 자랑스럽게 인정하고 나오면서 하나의 장르로써 인정받고 이제는 매니아까지 거느리게 된 것이 그 예가 아닐까 한다.
뭐, B급 싸구려 영화의 대표주자였던 '타란티노'가 나름 스타일을 지닌 감독으로 인정받는 것 또한 그러하고 말이다.
가끔 똑같은 삼각관계나 진부한 우연의 연속, 눈물빼는 신파조의 드라마가 그 구조적인 한계를 넘어서 훌륭한 작품으로 남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사실, 너무나 유치한 것이라지만 아무도 그 존재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한다.
사실 우리가 찾는 진실이란, 얼마나 대단하고 멋있는냐가 아닐지도 모른다. 유치하고 뻔한 것이라도 상대에게 진실로 들리게 하는것,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을 명백한 진실로 인정하는 것이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늑대의 유혹>에 이은 감독의 시도를 그저 흥행을 위한 상업적인 태도로 치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형식이 어찌 되었건, 자신만의 이야기법과 하고자 하는 주제를 관객들의 가슴에 던져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솔직히 이 영화를 보고난 감상을 말하자면 실망이 크다.
영화의 구조는 익숙하다.
일단 불량스런 주인공의 액션씬으로 시작한다. (순간 <늑대의 유혹>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불량하고 건방지기 그지 없는 주인공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원치 않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갑자기 찾아온 첫사랑과 소중한 것들에 눈을 떠서 변화한다는 내용.
감독은 이 단순한 이야기를 두개의 막으로 구성한다.
초반은 건방진 주인공의 좌충우돌, 후반은 가슴아픈 사랑으로 몸부림 치는 과정.
영화의 초반은 나름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으로 보인다.
'현빈'은 이전 드라마들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를 순조롭게 끌어와 무리없이 캐릭터의 성격을 만들었고, 그가 좌충우돌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간간히 터지게 하는 폭소와 더불어 가뿐히 진행된다.
남 일에 관심도 없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재경'(현빈)이 낯선 환경과 부딪히며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은 관객이 맘 편하게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솔직히 <웰컴 투 동막골>이후 불어온 강원도 사투리 붐에 살짝 편승한 것은 좀 거슬리긴 한다.
게다가 순박하고 착하게만 그려진 시골 학생들의 모습은 지방 출신 필자가 보기엔 좀 말도 안돼 보이면서 지방색에 대한 편견인듯 해서 좀 짜증나긴 하다.
하지만, 영화의 유쾌한 에피소드를 봐서 눈감고 넘어가 줄만 하다.
일단 따지지 말고 편히 웃고 즐기자는 영화의 장르적 습성을 고려해서 말이다.
그러나 영화의 중반부터 이야기는 심하게 삐걱거린다.
누가봐도 가장 확연히 눈에 띄는 것은, '재경'(현빈)과 '은환'(이연희)이 사랑에 빠져드는 부분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몇번의 우연으로 만났던 두 사람이 두어번 티격거리더니, '은환'의 병명이 밝혀지면서 갑자기 사랑에 빠졌다고 울부짓는 '재경'은 필자를 심한 혼란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런 가장 중요한 감정선이 빠져버린 상태에게 계속 밀어붙이는 두 사람의 고통스러운 눈물은 관객을 어찌할바 모르게 만든다.
'은환'의 죽음을 앞두고, 둘이 추억의 장소를 찾고 어린 시절을 회상한들, 남은 시간을 안타까워하며 서로를 기억하려 한들...
일단 관객이 사랑에 빠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왠지 눈물을 강요당하는 듯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거기에 갑작스럽게 끼어드는 시골 학교의 사랑스런 뮤지컬 공연은 관객이 어디에 감정을 실어야 할지 더욱 우왕좌왕하게 만든다.
(몇가지 춤동작에서 뻣뻣한 모습으로 폭소를 끌어냈건만 본 공연에서 갑자기 브레이크를 추는 친구의 모습은 가히 황망의 극치이다.)
어차피 단순한 구조로 장르적 특성을 살리고자 했다면, 정확히 목표를 잡고 이야기를 풀어나갔어야 하지 않을까.
첫사랑 달콤함, 인간성의 순화, 시한부 사랑의 안타까움, 순수한 학창시절에 대한 미련, 우정의 아름다움 등등 너무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몰아넣어버리는 터에 이야기는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감독의 전작 <늑대의 유혹>이 첫사랑에 대한 느낌과 한 아이의 죽음이라는 단순한 플롯으로 매끄럽게 진행되었던 것과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그의 전작은 적당히 양념을 친 맛있는 불량식품이었는데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황당한 상상력으로 나름 장르적 가능성까지 보여줬던 그의 작품 <화산고>의 스타일에 대한 아쉬움에 비할 수 없지만 말이다.)
후반에 이르러 감독이 뭘 해야 할지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면서부터, 영화의 책임은 전적으로 현빈의 기존 이미지와 매력에 실려버린다.
눈물 흘리는 현빈, 사랑 고백하는 현빈, 고민하는 현빈, 몸부림치는현빈, 애교 부리는 현빈, 귀여운 현빈 등등...
이런 한 배우의 매력으로 영화를 채우려고 하면서, 어쩌면 이러한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기 위해 후반부의 이야기와 에피소드들을 무리하게 만든듯한 의심까지 든다.
마치 한 배우의 팬픽을 보는 듯한 분위기로 영화는 어물쩡하게 마무리된다.
아무리 매력적인 배우를 등장시켜도, 아무리 신선한 신인을 등장시켜도, 기본적으로 최소한의 드라마가 등장하지 않는 영화는 맥이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생략되는 바람에, '재경'이 유산 상속을 포기하는 것도 이해가 되질 않고, '은환'의 죽음을 앞에두고 두 사람이 아무리 눈물을 쏟아내고 와 닿질 않는 것이다.
'은환'역의 이연희가 꽤 사랑스러워 눈에 띄였고, 연기가 나쁘지 않았기에 더 아쉽다.
드라마 <아일랜드>에서 꽤 괜찮은 신인의 가능성에 주목했었고,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의 무리없는 연기로 가능성을 기대했던 현빈이라는 배우에 대해서도 아쉽다.
두 배우의 연기가 최고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무랄데도 없었기에,조연들의 연기도 자연스러웠기에 순간 길을 잃어버린 이 영화가 더욱 딱하다.
좀 더 두사람의 감정선에 신경을 써서, 사랑에 빠져드는 감정을 부각시켰더라면 하는 아쉬움.
너무 많은 욕심을 부렸기에 장르의 전형성마져 놓쳐버린 영화가 아닌가 한다.
이러한 영화의 장르라는 것이 '가슴도 차갑고 머리도 차갑지만 눈은 뜨거운 영화'라면, 이 영화는 그만 '가슴도, 머리도, 눈도 차갑다.'
불량식품으로써도 맛이 없어진 이 영화를 도대체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written by suy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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