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중 게이샤를 비롯한 등장인물의 대사가 영어로 나오는 것이 첨엔 다소 어색했지만, 자막이 깔리는 영화는 좀처럼 보지 않는 미국이란 나라에서 미국 제작자와 미국감독이 만든 헐리웃 영화이므로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일본어 대사로 나왔다면 더 사실적이고 공감이 갔겠지만, 솔직히 미국제작사에서 만든 미국영화인데 자국영화 시장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면서 일본어 대사를 사용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것이다.
이 영화는 중국의 국민배우인 장쯔이, 공리등이 일본의 게이샤역할을 맡았다는 이유로 중국에서는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다. 물론 자기나라를 대표하는 배우가 과거에 자기 나라를 침략하고 만행을 저지른 나라의 기생 역할을 맡은 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배우인 김윤진씨도 이 영화에 게이샤 역으로 캐스팅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캐스팅은 바꿔서 생각하면 오히려 일본측에서 자존심이 상할 일인 것이다. 일본 전통의 게이샤 역을 자국배우가 아닌 다른나라 배우가 도맡았다는 것은 그만큼 일본배우중에는 쓸만한 배우가 없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고전의 춘향이나 어우동, 논개같은 역할을 중국이나 일본배우가 맡는다면 그 얼마나 분노할 일이겠는가. 그런점에서 우리나라 김윤진씨가 이 영화에 참여하지 않은 점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헐리웃의 신화같은 존재 스티븐 스필버그 제작에, '시카고'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롭 마샬이라는 헐리웃 정상급 감독의 작품에, 주인공 장쯔이의 오랜 친구역으로 등장할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는데 말이다. 더구나 애초에 김윤진씨가 거절한 그 역할은 결코 비중이 작지도 않은, 오히려 후반부에 조그만 반전을 일으키는 괜찮은 역할이었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이 영화가 과연 헐리웃 영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낯익은 동양계 배우들이 많이 나온다. 장예모 감독의 영화에서 항상 선한 눈으로 등장했던 중국의 국민배우 공리가 다소 파격적인 악역 게이샤 '하츠모모'로 출연하고 이제는 중국이 아닌 세계적인 스타로 우뚝선 장쯔이가 파란만장한 게이샤의 삶을 사는 주인공 사유리역을 맡았다. 장쯔이를 게이샤로 훈련시키는 사부역할로 우리에게 예스마담 시리즈로 익숙한 양자경이 나오고, 일본의 국민배우(우리나라의 안성기와 견줄만한) 야쿠쇼 코지가 장쯔이를 사모하는 노부역으로, 역시 라스트 사무라이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까지 올랐던 와타나베 켄이 장쯔이가 평생 사모한 회장님으로 나온다.(이 역할은 <마지막 황제>의 존 론도 캐스팅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정말 아시아계 배우 개스팅으로는 엄청난 캐스팅임에 틀림 없다.
이렇게 헐리웃 대작영화에 아시아의 정상급 배우들이 총출동했는데 유독 한국배우는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없지는 않다. 영화 초반 하츠모모(공리)가 사랑하는 남자로 나온 청년이 바로 한국계 헐리웃 배우 칼윤(한국명 윤성권)이고, 중반부에 아주 반가운 얼굴로 깜짝 출연을 하는 의사(닥터 크랩)가 바로 매트릭스2 리로디드에서 키메이커로 나온 한국계 '랜달 덕 김'(한국명 김덕문)이다. 비록 한국계 이민 2세 배우들이지만 중국,일본 배우들 틈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는건 무척 반가운 일이다.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의 역량있는 배우들이 이런 아시아계 배우를 필요로 하는 헐리웃 대작 영화에 출연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하다. 이유는 단 한가지로 본다. 바로 '영어'다.
아무리 연기를 잘하고 재능이 뛰어나도 '영어'가 안 되면 헐리웃 영화에 출연하는것은 무리다.
이 영화에서 게이샤 역할이 중국 배우에게 돌아간 것도 배우의 지명도 측면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영어구사력에서 일본 여배우들이 중국 여배우에 뒤쳐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나라 배우들도 이제 '영어'를 잘 익혀서 헐리웃 영화에서도 자주 얼굴을 볼 수 있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배우가 되었으면 한다.
이 영화의 초반부는 마치 '마지막 황제'나 우리영화 '서편제'같은 영화의 감동을 기대케 하는 대작의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역시 헐리웃 감독이 만든 헐리웃 영화였다. 나레이션으로 이 영화의 이야기를 풀어주던 늙은 게이샤(장쯔이)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고, 영화는 결국 헐리웃 영화답게 해피엔딩으로 끝나버렸다.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가슴 아린 슬픔이나 우리나라의 '한'과 같은 정서는 역시 찾아 볼수 없었다. 차라리 이 원작을 이탈리아의 베르톨루치 감독이나 한국의 임권택 감독님께서 만드셨다면 정말 수작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마저 들었다. 이 영화는 그야말로 제목 그대로 '게이샤의 추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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