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딱 2년전, 고3 올라가기 전 겨울 방학 때 황석영 님의 소설 [심청]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그 효녀 심청이 인당수에 빠져서 용궁으로 간 게 아니라, 중국인들로부터 구조되어서 중국으로 팔려간다는 설정으로부터 전개되는 내용의 소설이었다. 중국, 싱가폴, 일본 등을 거쳐가며 부자 노인의 첩, 기생, 서양인의 첩 등 온갖 파란만장한 삶의 과정을 밟는 심청의 모습은 꽤 스케일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수많은 남자들을 거치며 그들로부터 수많은 생채기를 입고 점차 많은 비애와 아픔을 가슴에 쌓아놓게 되면서 결말에 가서는 그 많은 슬픔들을 다 안기에도 벅찼던 한 작은 여인의 삶이 상당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이 영화 <게이샤의 추억>도 처음 제작 소식을 들었을 때 이런 내용이 나오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헐리웃에서 게이샤라는 소재로 매우 특이하겠지만, 그들의 생활을 화려하게 그림과 동시에 그들의 삶의 애환을 깊게 그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영화를 본 결과는, 반은 딱 맞았고 반은 좀 아니었다.
때는 1929년 일본, 우리의 주인공 치요(장쯔이)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다 어른들로부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언니와 함께 끌려가 집을 떠나게 된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이 교토의 하나마치라는 마을. 그곳에서 치요는 처음 "게이샤"라는, 화려한 아름다움과 매혹적인 기술을 겸비한 여인들을 보게 된다. 같은 집에 기거하던 동네 최고의 게이샤 하츠모모(공리)는 손님들 앞에서는 천상의 여인이지만 여자들 앞에서는 오지게 더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던지라, 새로 들어온 치요 역시 눈엣가시처럼 대우한다. 하츠모모의 놀림과 괴롭힘과 더불어 언니와 함께 마을을 떠나려던 계획도 발각되고, 그때문에 치요는 평생 하녀 신세가 될 위기에 놓인다. 그러던 와중에 다리 위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던 치요를 회장(와타나베 켄) 아저씨가 너무도 따스하고 친절하게 대해주고 빙수까지 사준다. 회장의 따스한 마음씨에 반한 치요는 그 옆에 함께 걷는 게이샤들을 보고 반드시 게이샤가 되어 자신도 그의 곁에 서리라 다짐한다. 때마침 치요는 하츠모모와 쌍벽을 이루는 게이샤지만 성격은 정반대인 마메하(양자경)의 눈에 들고, 마메하는 치요에게 혹독한 게이샤 과정을 가르친다. 눈치도 실력도 장난이 아닌 마메하의 도움으로 치요는 사유리라는 게이샤로 거듭나 화려한 데뷔를 하게 되고 순식간에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에 위협감을 느낀 하츠모모는 시시각각 사유리를 무너뜨리려는 계략을 펼치고, 그 속에서 사유리 또한 마치 게임을 해나가듯 매 순간을 맞이해야 한다. 거기다 게이샤는 거들떠도 안보던 손님인 노부(야쿠쇼 코지)의 적극적인 공세까지 시작되지만, 그런 와중에도 사유리의 마음은 여전히 회장을 향해 있었는데.
우선 이 영화를 얘기하면서 그냥 넘어가면 큰일날 부분이 시각적인 부분이다. 한마디로 어디 흠잡을 데가 없는 완벽한 시각적 쾌감이다. 영화가 끝난 뒤 대체 촬영과 미술 담당이 누군지 찾으려고 엔딩 크레딧을 훑어볼 만큼 촬영과 미술 부분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화폭이 그대로 옮겨진 듯한 각종 기모노 의상들, 빨강, 파랑, 노랑 등 원색적인 색감으로 표현된 게이샤들의 생활 모습은 관객의 시각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마치 일본이 아닌 제3세계인 듯한 판타지적인 분위기도 풍겼다. 촬영 역시 말이 필요없었다. 때론 유연하게, 때론 정적으로 조심스럽게 연결되는 카메라 구도는 여러 명장면을 배출했는데, 어린 치요가 터널처럼 연결된 붉은 관문을 뛰어가는 장면은 서정미의 절정을 보여주었고, 사유리의 첫 단독 우산 퍼포먼스는 나 역시 극장 내 관객들과 함께 그 안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만큼 실감나게 아름다웠다. <시카고>에서 뮤지컬 무대의 스케일을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오는 재능을 발휘한 롭 마셜 감독은 이번 <게이샤의 추억>에서도 역시 스크린을 무대처럼 만들어 화려한 색감으로 관객을 마비시키는 재주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확실히 시각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한 치의 오점도 없다.
배우들의 연기도 만족스러웠다. 사실 주연인 장쯔이보다는(영화 내내 부각되는 푸른 눈빛, 눈 속에서 펼치는 우산 퍼포먼스는 정말 멋졌다) 그녀의 양 옆을 대립적으로 보좌하는 공리와 양자경의 연기가 더욱 눈부셨다. 사실 공리는 이전에 장이모우 감독의 영화에서는 지극히 구수하고 향토적인 모습을 보여주다가 <2046>에서부터 상당히 자태가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번 영화를 보니 그녀가 그렇게 숨막히게 아름다운 배우라는 것을 새삼 제대로 깨달았다. 게이샤로 치장했을 때에 나타나는 그 결 고운 아름다움과 더불어 역할 특성상 시종일관 보여주는 지독한 "악"의 카리스마 역시 스크린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자잘하고 세밀한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뭔가 강렬하고 선굵은 아름다움이랄까. 왜 언론들이 공리더러 "중국이 세계에 선사한 가장 아름다운 선물 중 하나"라는 극찬을 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겠더라.
공리와 반대로 "선"의 카리스마를 보여준 양자경의 연기 역시 나무랄 데가 없었다. <와호장룡>에서 강함과 부드러움의 오묘한 조화로 감탄사를 자아내게 했던 그녀는 이번 영화에서는 섬세한 춤사위와 다소곳한 행동양식, 빠른 두뇌회전으로 여성스러우면서도 대담한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공리와 마찬가지로 서양 여배우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동양 배우만의 보다 깊고 굵은 카리스마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더불어 이 두 배우 모두 나이가 마흔이 넘어도 전혀 사그라들지 않는 미모도 놀라웠다.
이런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좀 안좋은 점들도 갖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헐리웃 영화가 동양을 배경으로 했을 때 저지르기 쉬운 실수인 "오리엔탈리즘"의 반복이다. 보통 헐리웃 영화가 동양을 배경으로 하면 두 가지 실수를 저지르기 쉬운데 지나치게 동양을 비하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동양을 미화하거나 둘 중 하나다. 물론 이 영화는 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오리엔탈리즘"의 사전적 의미처럼, 이 영화에는 서양인들은 거의 접해보지 못했을 동양 세계의 신비로운 모습에 대한 동경이 시종일관 흐르고 있었다.
원색적인 색감이 강조된 화려한 시각적 이미지들은 앞서 말했듯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경을 안겨다주기도 하지만, 현실성에 있어서는 그만큼 마이너스가 되는 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 속 교토의 모습은 진짜 일본 어느 한 곳에 있는 도시가 아니라 그저 일본의 모습을 한 어느 다른 세계 같았다. 그래서 보기에 아름답고 멋있어 보이기는 했지만 현실성과는 좀 거리가 먼 부분도 없지 않나 싶었다.
영화 속 오리엔탈리즘으로 인해 마이너스가 된 또 다른 부분은 게이샤에 대한 무조건적인 미화다. 영화 속 대사에서도 나오듯 게이샤가 기생과 달리 몸은 절대 팔지 않고 예능을 파는 직업이긴 하다.(이 부분에서 잠시 "그럼 우리나라의 기생은 지저분한 직업이란 말인가?"하면서 잠시 발끈하기도 했다) 순결을 빼았겼다는 것이 가치 매기는 데에 엄청난 타격이 되기까지 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래도 게이샤라는 직업이 남자들에게 유흥을 제공하고 때론 애인도 되어줘야 하는 뭐라 설명하게 힘든 묘한 성격의 직업인데 그로 인해 발생하는 현실적인 갈등이 없었을까? 영화는 그 갈등 부분을 좀 소홀히 한 듯 싶다. 물론 영화에서 게이샤는 사랑을 할 수 없다는 운명 때문에 사유리가 많이 고민을 하지만, 이 고민 또한 지극히 낭만적으로 들린다. 사랑과 관련된 고민 말고도 화려함 뒤에 숨겨진 현실적 제약과 여러 난관 때문에 삶에 대해서 보다 본질적으로, 더 뼈아프게 갈등을 겪는 경우도 분명 있을텐데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좀 얕게 나간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분명 게이샤의 삶이 가져다 주는, 단지 "사랑"이 아닌 "삶"의 아이러니와 비애를 강조했더라면 감동의 지진해일을 몰고 올 수 있었을 것을, 그러지 못해 감동이 좀 반감된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더구나 상당히 허무한 엔딩은 영화 속 사유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저 "사랑"이었던 것인가, 다른 문제요소는 결국 없었는가 하는 생각이 더욱 들게 해 아쉬웠다.
대사가 영어로 되어 있다는 것도 참 희한한 부분이다. "곰방와"(저녁 인사), "아리가또 고자이마스"(고맙습니다), "오네상"(언니) 등 형식적으로 하는 말 이외에 모든 말이 영어로 되어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지극히 불필요한 얘기를 할 때엔 일본말로 하다가 중요한 얘기를 할 때 갑자기 영어로 바뀌기도 했었다. 물론 미국 영화사에서 투자를 하고 미국 제작진들이 제작을 했다지만, 요건 너무 미국인들의 입맛에 맞게만 아시아의 한 문화를 요리하려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들 원어민급으로 유창한 것도 아니요, 다소 어색한 발음으로 영어 대사를 구사하는 게 영화 보는 데 전혀 지장이 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같은 대사라도 배경이 되는 일본의 언어로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을 배우들의 어색한 영어 발음때문에 감동이 다소 줄어드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아마도 배우들이 일본 배우들로만 구성된 게 아니라, 중국, 일본, 거기에 한국계 배우들(칼 윤, 랜달 덕 김)까지 가세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왕에 일본의 게이샤 문화에 대해 그리려 했다면 리얼리티를 좀 더 살리게끔 그냥 모두 일본 배우들로 캐스팅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인들이 보기에 한국인이나 일본인이나 중국인이나 생김새가 거기서 거기로 보이겠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확 차이가 나기 때문에 게이샤와 같은 일본인 역할을 맡아도 분위기가 다르게 보인다. 더구나 장쯔이, 공리, 양자경 같은 배우들은 중국 배우인데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배우들이라 이들의 모습을 보고 정말 일본의 게이샤처럼 느끼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제작사가 진정 원작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저 표면적으로 게이샤 문화를 꾸미지만 않고 집중 탐구하고자 했다면 스탭들은 미국인들이라도 배우들은 모두 일본인들로, 대사도 일본어로 했을 것이다. 이건 배경은 일본인데 일본인으로 나오는 배우들은 한중일 사람들이 섞여 있고, 대사는 또 영어로 하니 이게 일본의 고유한 문화에 대해 얘기하는 건지 아님 동서양 퓨전 문화를 얘기하고 있는 건지 헷갈리기도 했다.
제작자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을 보자마자 영화화를 위해 판권을 구입했다고 하는데, 그는 제발 단순히 영화 속 화려한 게이샤 문화에 반한 게 아니라, 그 속에 숨은 인간 본연의 내면적 갈등과 기구한 운명 속의 비애에 반해서 판권을 구입했기를 바란다. 그러나 영화는 아쉽게도 그렇지 못하다. 영상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숨막히게 아름다웠지만, 잠시 사랑이 문제가 되긴 하지만 게이샤는 매혹적이고 아름답기만한 직업이고, 사유리의 갈등도 그저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한 갈등에서 그친다. 물론 유별난 운명을 지닌 한 어린 여인의 "러브스토리"를 그린 것이라면 괜찮은 모양새를 갖춘 영화겠지만, 영화 내내 나이 든 사유리가 담담한 어투로 나레이션을 할 만큼 시대를 관통한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의 애환, 비애가 충분히 들어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그저 서양인들에겐 생소해 솔깃해질 게이샤들의 생활 모습에 역시 그들 취향에 걸맞는 낭만적인 러브스토리가 첨가된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이제는 단순히 동양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처음 보는 실험체 마냥 보지 않고 제대로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그 속에서 동양인들이 겪게 되는 고유하고 깊은 삶의 고민과 희노애락을 그린 헐리웃 영화가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색안경을 벗을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났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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