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킹콩'과 관련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 4~5살 정도 때로 추정되는데, 그 때 TV에 나오는 거대하고 무섭게 생긴 고릴라를 보고는 잔뜩 겁을 먹어서 이불 안으로 들어가 숨었던 기억이 난다.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화면 전체를 압도하고 날카로운 이를 지닌 거대한 몸집의 고릴라인 것으로 봐서 아마도 킹콩이 아니었나 싶다. 이렇게 내게 '킹콩'이라는 것은 단지 가끔 케이블 TV에서 해줬던 76년 버전이나 지나가는 정도로 봤었던, 그 외에는 그저 대표적인 몇몇 이미지로만 남아 있던 그야말로 전설적인 '몬스터'였다.
그 대표적인 이미지들이란, 가슴을 치며 으르렁거리는 거대한 몸집, 수많은 조명들이 비치고 있는 가운데 한밤중에 빌딩 꼭대기로 올라가 난동을 부리는 모습, 그리고 녀석의 손에 쥐어져 있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금발 미녀. 이 정도다. 아마도 이 '킹콩'이란 캐릭터는 지금까지 이 한 장면, 빌딩에서의 대치 장면으로 거의 설명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이 장면이 가지는 의미는 꽤 컸다. 그런데 이 피터 잭슨 감독 버전의 <킹콩>은, 절대 그게 다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사실 '킹콩'이라는 이름이 가져다주는 뭔가 통통 튀는 듯한 어감이나, 도시 한복판에서 난동을 부리는 대표적인 이미지 등이 녀석을 그저 생각없이 분노하는, 동시에 즐거운 흥미의 대상이 되는 괴수로 여기게끔 해 온 게 사실인데,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의 느낌은 한마디로 <킹콩>이란 절대 장난으로 볼 영화, 절대 한낯 괴수로 치부할 녀석이 아니라는 것이다.
때는 1930년대. 연극, 영화 문화가 미국에 꽃피던 시절이지만 동시에 돈에 눈이 먼 이들이 그저 자극적인 예술만 추구하던 시절이다. 코미디 배우 앤 대로우(나오미 와츠)는 꾸준히 일해오던 극장이 적자가 쌓임으로 인해 문을 닫자 거지 신세가 되어 버린다. 그렇게 선망해 오던 극작가 잭 드리스콜(애드리언 브로디)의 신작 오디션도 영 기회가 오질 않고. 한편, 한때 거의 대박 직전까지도 갔었던 영화 감독 칼 덴햄(잭 블랙)은 사파리, 야생동물 영화만 찍는 그의 굳은 심지로 인해 이젠 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것도 찍어보라는 영화사로부터 질책을 받고난 중이다. 칼은 영화사 몰래 자신만의 드림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기기로 하고 친구이자 극작가인 잭 드리스콜을 비롯한 선원들, 조수들과 함께 촬영 로케에 나선다. 그러나 급작스럽게 비게 된 여주인공 자리. 그러나 칼의 눈에 극적으로 앤이 띄게 되고, 너무나 이상적인 여주인공의 이미지인 앤을 칼은 즉석에서 캐스팅해버린다. 성공의 길이 열릴지도 모르는 영화 촬영의 길로 나서는 앤, 그러나 그녀는 그들이 탄 배가 명목상 목적지인 싱가포르가 아닌, 사람도 살지 않고 이름만 들어도 오싹한 '해골섬'으로 가리라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한다. 암튼 이들은 미지의 섬을 향해 기약없는 항해를 떠나는데, 섬에 도착한 일행은 거대한 몸집의 무언가와 그를 숭배하는 괴기스런 종족을 만나면서 순식간에 흩어지게 된다. 더구나 아리따운 앤이 그 거대한 무언가를 위한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끌려가면서, 일행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나선다. 그들 앞에 어떤 상상도 못할 치명적 위기가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일단은 배우들 면면에서 피터 잭슨 감독의 캐스팅 센스가 꽤 맘에 든다. 진짜 30년대 클래식 여배우가 그대로 살아나온 듯한 우아한 이미지이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처연하고 현실때문에 고되어 보이는 여인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나오미 와츠, 특유의 우수에 어린 이미지답게 예술과 돈 사이에서 양심적인 고민을 끊임없이 하는 작가의 모습을 잘 보여준 애드리언 브로디, 작품에 대한 무한한 열정으로 쉴새없이 달려들다가 그 열정이 무너져 버린 순간 예술에 집착한 나머지 광기를 드러내는 모습을 탁월히 소화한 잭 블랙 등 연기 좀 한다는 배우들이 모이니 확실히 블럭버스터라도 연기들이 부실하지 않고 실했다. 특히나 잭 블랙은 이전 영화들에선 그 특유의 '나대는' 모습을 곧잘 보여줘 항상 웃음을 줬는데, 이번에는 그 활동적인 이미지가 진지한 쪽으로 넘어오면서 꽤 무게가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여전히 그의 빠릿빠릿한 눈빛은 그대로였지만, 거기에 무모함과 때론 무섭기도 한 광기까지 더해지면서 상당히 복합적인 캐릭터를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사실 이 영화도 은근히 캐스팅이 화려하지만 막말로 이들은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인 타이틀롤 '킹콩'을 충실히 보좌하는 것이 역할일 것이다. 그만큼 킹콩 이 녀석이 가져다주는 무게감은 다른 배우들의 연기보다 훨씬 압도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컴퓨터 그래픽의 산물인 것이 쉽사리 믿기지 않을 정도로 털과 피부의 질감, 표정 묘사가 대단히 사실적인 건 기본이다. 사람을 그저 벌레 잡듯이 두 손가락으로 잡고 다니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 생물들을 튕겨버리는 그의 위력은 진짜 말그대로 '상상을 초월한다'. 입이 쩍 벌어지는 넓이의 절벽을 아무렇지도 않게 점프하며 지나다니고, 도심의 자동차들을 간편하게(?) 손으로 쓸어버리는 등 우리와는 행동반경부터가 다른 그의 행동은 어쩌면 이 영화의 스케일이 얼마나 여타 영화들과 차이가 나는지를 보여주는 시작점일 것이다.
킹콩의 활약을 시작으로 해서 여러 생물들의 등장으로 영화는 그야말로 사이즈가 차원이 다른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한 시간 정도 너무 사람들만 나오고 그들 이야기만 풀어간다고 불평할 필요가 없다. 그 뒤에는 정말 지칠 정도로 쉴 새 없는 스펙터클을 보여주니 말이다. 공룡과 같은 메가톤급 동물들이 아주 떼로 등장하다보니 이들이 보여주는 액션은 규모 면에서 가히 압도적이다. 우거진 숲의 모든 나무, 바위들이 거침없이 무너지고 부서지며, 사람은 그저 개미 떼처럼 그들에 비해 너무 작을 뿐이다. 그 뿐이랴, 킹콩과 공룡이 보여주는 한바탕 격투신은 그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가를 고려해 볼 때 흔히 생각하는 기술과는 판이하게 다른 무지막지하게 과격하고 파워풀한 기술을 선보인다. 밀림, 바위절벽을 가리지 않고 펼쳐지는 그들의 육박전은 그 사이를 이리저리 피해다녀야 하는 인간들을 너무나 초라하게 만들 뿐이다. 카메라도 감당을 못하는 듯 화면을 거의 뒤덮는 스펙터클이다.
이렇게 거대한 동물들이 나타나 무지막지한 비주얼만 보여주는 건 아니다. 누가 피터 잭슨 감독 아니랄까봐, 온몸을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듯한 으스스하고 불쾌하기도 한 공포를 심어주기도 한다. 섬에는 그야말로 생전 처음 보는 다양한 곤충들, 생물들이 등장하는데 <반지의 제왕>의 오크무리들 때보다 피터 잭슨 감독의 상상력이 한결 더 반영된 듯 싶다. 무슨 몸 두께가 왠만한 방울뱀만한 지네, 사람은 사정없이 빨아들이는 날카로운 이빨의 수상생물(?) 등 보도듣도 못한 듯한 곤충, 생물들이 주인공들을 둘러싸며 가히 살인적인 소름을 선사한다. 피터 잭슨 감독 특유의 질퍽한 비주얼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정말 이렇게 다양한 감각적 경험을 선사하는 이 영화의 비주얼은 정말 2억달러 허투루 쓰진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끔 만든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영화가 이만큼의 완성도를 보여준 건 피터 잭슨이 이 영화에 대해 갖고 있는 절대적인 존경심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말처럼, 그만큼 '살인적인' 존경심을 갖고 있지 않은 감독이 이 영화를 맡았다면 이 결과만큼 확실하게 멋진 작품으로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피터 잭슨 감독은 그가 갖고 있는 절대적인 존경심에 맞게, 이 영화에 최대한 많은 것을 담으려 했었는가 보다. 진짜 영화를 보면 그렇다. 1930년대 한창 자극적인 예술에 경도되는 사람들의 심리, 그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입을 헤벌리게 만들 수 밖에 없는 압도적인 비주얼, <타이타닉>을 뺨치는 애절한 러브스토리 등이 이 영화 한편에 다 들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렇게 많은 것들은 그저 겉만 훑고 지나가거나 대강 보여주기만 하지 않는다. 아예 러닝타임이 세 시간을 넘는다. 그만큼 이 영화는 이렇게 많은 부분을 공략하면서도, 각 부분을 확실하고 깔끔하게 결판을 짓는다.
이제 컴퓨터 그래픽으로 못만드는 게 없는 시대에 와서 감독은 첫째로 아마 전작들이 한계를 가졌던 비주얼에도 보다 신경을 써 시각적으로 확실히 즐길 만한 작품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는 확실히 증명이 된 듯 싶다. 이 영화에 나오는 킹콩의 소동이나 정글 속 모험과 같은 장면들은 흔히 생각해 온 유치하고 뻔한 장면들이 아니라 진짜 입이 떡 벌어지는 스펙터클의 향연이다. 그런 점에서 일단 피터 잭슨의 첫번째 의도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감독은 이 영화에 단순히 기술적 발전으로 대신할 수 없는 더 강렬한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그것은 킹콩과 앤의 애틋한 '로맨스'이다. 사실 금발 미녀가 갖고 있는 연약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봐서 이전에도 로맨틱한 측면이 조금이라도 그려졌겠지만, 이 영화는 특히 장르가 멜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 감정의 농도가 진하다. 앤은 정말 안타까운 연인을 바라보듯 킹콩을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그에 대한 킹콩의 눈빛 역시 괴수의 눈빛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맑고 간절하다.
아마도 감독은 이를 통해 킹콩의 너무도 기구하고 안타까운 운명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실 킹콩은 겉으로 보면 두려울 게 없는 막강 고릴라로 보이지만, 꽤 힘든 생을 살아왔다. 자신보다 몸집이 큰 공룡들과 끊임없이 섬 안에서 세력 다툼을 해왔고, 그 강력한 힘때문에 역시나 수많은 생물들로부터 습격을 받아왔다. 그 와중에 그 섬의 원주민들은 녀석에게 끊임없이 제물을 바쳐왔고. 어쩌면 킹콩의 삶은 강력한 힘으로 인한 무지막지한 다른 생물들의 견제, 그저 목적없이 맹목적이기만 한 원주민들의 숭배에 둘러싸여 꽤 고단하고 빡빡한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그런 킹콩의 삶에서 앤이란 여인은 어쩌면 새삼 삶의 즐거움을 선사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앞에서 적극적으로 재롱도 부려주고, 킹콩의 투정에 단호하게 안된다고 버티기도 하고, 몸짓을 통해 소통도 시도해 보려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킹콩은 그런 앤에게 그 어떤 흑심이나 불쾌한 마음 없는, 정말 순수하게 그녀만을 향한 사랑을 키워왔을 것이고, 그런 진심에 앤도 절로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걸 또 그대로 보질 않는다. 이는 최대한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걸 원하는 당시 문화와도 관련이 되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킹콩은 그저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짐승 또는 희소성이 짙어 흥미로운 돈벌이 용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짐승 취급을 받는 킹콩 녀석은 진실한 감정에 힘입어 여인에게 헌신하고 최선을 다하는 동안,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들은 녀석을 그저 쇼로 크게 돈을 벌어다 줄 특종감으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 앤에 대한 킹콩의 진실된 그리움, 속은 것에 대한 진지한 분노 등 킹콩의 진실된 감정 하나하나 조차 그저 관객들의 웃음거리, 감탄거리만 될 뿐이다. 온갖 미끼와 위선으로 자신을 도시에 가둬 둔 인간들에 대한 킹콩의 절실한 분노는, 인간들에게는 그저 거대한 미친 짐승의 최후의 발악으로 보일 뿐이다.
피터 잭슨 감독은 이렇게 킹콩이 보여주는 인간보다 더 숭고한 사랑에 크게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이렇게 감동받은 바를 감독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보다 더 깊게 해석하여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킹콩의 사랑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한층 진중하면서도 여운이 남는다. 상종 못할 사람에게 짐승같다고 흔히 말하는 이 세상에서, 진실한 사랑의 감정 앞에 자신의 안위마저 버릴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짐승보다 그런 짐승의 절실한 감정마저 돈으로 사고 파는 인간들이 나을 게 뭐가 있는가? 끊임없이 거대한 자연으로부터 위협받고 공격받으면서도 그 자연으로 돈벌 생각에 눈이 먼 인간이 더 나을 게 뭐가 있는가? 하고 영화는 묻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킹콩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간 대목도 그런 메시지를 반영해주지 않나 싶다. 난 사실 지금까지 그 녀석이 빌딩에 올라간 이유가 '뭐 금발 여인 들고서 한바탕 인질극 하려고 그런 거겠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철저히 인간 입장에서 내놓은 편견이었음이 드러났다. 킹콩은 단지 진심으로 마음을 나누고 픈 여인 앤과 다시금 아름다운 일출 풍경을 보면서 '아름답다'는 감정을 되짚어보기 위해 빌딩으로 올라갔던 것이다. 다른 거창한 목적 없이, 그저 사랑하는 이와 소통을 하려고. 분명히 꼭대기라 눈에 띄어 목숨이 위협받을텐데도 불구하고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짐승이 감정이 어딨어?' 이런 생각은 단지 인간 입장에서 바라본 지극히 편협하고 우스운 시각일 뿐이다.
이렇게 피터 잭슨 감독은 비단 화려한 비주얼 뿐 아니라, 내재하고 있는 메시지 또한 더욱 강렬하게 담아내 <킹콩>을 그저 눈요깃거리인 괴수영화가 아닌 간절한 감정과 눈물을 자아낼 만한 멜로드라마의 면모도 함께 심어놓았다. 세 시간동안 시각적으로도 확실히 압도를 해주고, 감동도 확실하게 주니 이 어찌 즐겁다 하지 않을 수 있으랴. 감독의 절대적인 존경심이, 그만큼 영화를 절대적으로 멋진 영화로 만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