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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m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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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28 오전 1:40: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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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라는 것, 요놈이 참 간사하면서 미묘한 것이다. 추억이 현재라는 옷을 입고 우리가 함께 걸어갈 때는 그것이 어떤 매력들이 있는지 미처 모른다. 그저 지긋지긋하고 벗어나고 싶은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 추억이 현재의 옷을 벗고 과거의 옷을 입고서 우리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면, 그게 그렇게 아름답고 애틋해보일 수 없다. 다시 곱씹으면 절로 입안에 미소를 머금게 되는 그런 마력을 우리에게 부리는 것이 추억이다. 가장 힘들고 지겹다는 고등학교 학창시절이 나중에 가서 제일 멋진 추억으로 기억된다는 얘기가 아마 이런 추억의 진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얘기일 것이다. 나같은 경우도 그렇다. 아직 중고등학생 시절을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벌써부터 그 때를 생각하면 절로 흐뭇하고 애틋해지는 것이 참 감정이 묘하다.
이 영화 <사랑해, 말순씨>는 이렇게 추억이 우리에게 부리는 요상스런 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였다. 그 속에는 그 땐 너무 지긋지긋하게만 느껴졌던 엄마와의 추억, 성가시기 그지없는 동네 다운증후군 형과의 추억, 든든하고 과묵했던 친구와의 우정 등 다양한 얘깃거리가 들어있지만, 이 영화는 단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친구와의 우정 중 한 소재에 집중하지 않는다. 이들 다양한 소재가 정겹게 어우러져서 '추억'이라는 새로운 하나의 이름으로 뭉쳐 넉넉한 미소로 우리에게 손짓을 하는 것이다. 1979년 말, 박정희 대통령의 유고가 한창 전국을 떠들썩하게 할 무렵, 광호(이재응)라는 보통소년이 있다. 중학교 1학년으로서, 막 사춘기에 들어서 이유없이 반항적이기도 하고 여성의 매력에 진정 눈을 뜨게 되면서 꾸준히 그런 생각만 하게 되는 그저 보통 사춘기 소년이다. 광호에게 엄마 말순씨(문소리)는 세수하면 눈썹이 없어지는 괴물, 버스에서 자리차지하고는 시끄럽게 자기를 부르는 눈치제로, 차를 마실 때에는 티나게 후루룩소리를 내며 마시는 매너제로의 아줌마로 보일 뿐이다. 반면, 세들어사는 은숙 누나(윤진서)는 광호에게 여신과 같은 존재다. 피부는 비단결같이 새하야며, 눈물도 곧잘 흘리는 감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은숙 누나는 광호에게 꼭 지켜줘야 할 자기만의 천사로 보인다. 한편 이웃집에는 다운증후군에 걸린 재명이 형(강민휘)이 있는데 이 형 또한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맨날 '발길을 돌리려고~' 노래를 부르다가 광호만 보면 쏜살같이 쫓아오기 일쑤다. 이렇게 지긋지긋함과 산뜻함이 공존하던 광호의 일상, 그러던 어느날 광호에게 한통의 편지가 배달되는데 그것은 바로 다시 보내지 않으면 불행해진다는 이른바 '행운의 편지'. 아무것도 모르는 광호는 마냥 이 편지 앞에서 전전긍긍하는데... 이 영화는 어떤 강렬한 이미지나 화려한 영상, 개성이 뚜렷이 드러나는 이야기나 인물들을 갖고 있는 영화가 아니다. 그저 80년대에 들어서려는 무렵 우리가 흔히 볼 수 있었을 주변 사람들의 생활 모습, 그 수많은 시간들 중 한 순간을 포착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 역시, 강렬하게 두드러지는 연기보다는 그 시절 모습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연기를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 속 배우들의 연기는 충분히 합격점이다. 우선 엄마 말순씨 역할의 문소리. 이 배우는 보통 대단히 파격적인 역할이나 대단히 평범한 역할 모두에서 달인급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만큼 뚜렷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와 보통 사람과 똑같은 평범한 캐릭터 연기를 모두 잘 한다는 뜻일 것이다. 개성있는 캐릭터야 그렇다치고, 지극히 평범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도 오히려 꽤 어려운 일일텐데 그런 점에서 대단한 배우라 아니할 수 없다. 이번에 문소리가 맡은 역할은 당연 후자 쪽이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을 우리들의 '엄마' 스타일. 살짝 눈치도 없는 것 같고 촌스럽게도 느껴지지만, 그래도 도무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엄마의 모습이 문소리의 연기 속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었다. 그녀가 내뱉는 대사 하나하나는 가공의 연기가 아닌, 그저 실제 생활에서 얘기하는 듯한 진한 삶의 분위기가 물씬 녹아들어 있었다. 정말 보통의 엄마들에게서 느껴질 듯한 인간적인 따뜻함이 보는 내내 풍겨나왔다. 과연 문소리는 한국 여배우들 중에서 리얼리즘 연기로는 일인자로 손색이 없는 듯하다. 시작 크레딧에선 이름이 두번째로 나오지만 사실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광호 역의 이재응 군의 연기는 우리가 흔히 아역배우들에게서 기대하는 수준 그 이상의 연기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아예 광호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적겠지만, 이재응 군이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연기는 단순히 성인 배우들의 들러리 수준의 연기와는 거리가 멀다. 문소리와 같은 연기파 배우와 함께 호흡을 맞춰도 전혀 부족한 기색을 볼 수 없이, 자연스러운 광호의 모습을 보여준다. <식스 센스>의 헤일리 조엘 오스먼트처럼 너무 신들린 듯해 가끔 아이답지 않다고까지 느껴지는 연기도 아니고, 짜증도 곧잘 부리고 소심하기도 한 그저 보통 사춘기 소년 모습 그대로를 보여줘서 오히려 전혀 거부감 들지 않고 절로 흐뭇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따뜻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진짜 아이가 엄마한테 투정을 부리듯 하는 모습이 저절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광호의 짝사랑 은숙 누나 역의 윤진서 또한 무리없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광호가 우러러보는 대상이라 이전의 청순하고 화사한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가서 은숙 누나 특유의 천사같은 이미지를 재연하는 데 딱 적합했을 뿐 아니라 예상치못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함으로써 살짝 '깨는' 모습도 무리없이 보여주었다. 이 영화에 또 한명의 주목해야 할 배우가 나오는데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다운증후군 배우인 재명이 역의 강민휘다. 시도 때도 없이 '발길을 돌리려고~' 노래를 부르면서 돌아다니며 천진하게 웃는 모습은 볼 때마다 영화의 기분좋은 활력소가 되어 주었다. 그저 진짜 다운증후군 배우라서 흥미만 유발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다른 배우들과 잘 어우러져 순수한 재명이의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기특하게까지 보였다. 재명이의 마지막 등장 장면에선 저렇게 깊은 감정 연기까지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아, 막내 혜숙이 역의 박유선 양도 빼놓을 수 없다. 그 동글동글한 이목구비와 더불어 또렷또렷한 말투가 선사하는 궁극의 귀여움은 영화의 또 다른 활력소다. 후반부, 그 고사리같은 손을 오빠 손에 포개며 "오빠 사랑해"하는 모습은, 정말 한마디로 동생 삼고 싶을 만큼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특별히 영화 전체를 쥐고 가는 특별한 사건같은 것이 없다. 사춘기 중학생 소년의 자잘한 일상과 가족들 간의 모습, 소년의 학교 생활, 이웃들의 모습 등 지극히 평범하고 잔잔한 이야기들이 영화 전체를 이끌고 간다. 그나마 극적인 소재가 '행운의 편지' 정도가 될 것이다.(그러나 이 행운의 편지 이야기가 나중에 이야기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치기는 한다) 그래서 뭔가 큰 사건을 기대하면서 본다면 너무 잔잔하고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오히려 그저 80년대에 들어서는 시기의 한 소년의 평범한 삶을 엿본다고 생각하고 그 자잘한 일상을 따라가보면, 그 속에서 겪게 되는 소소하지만 공감이 가는 삶의 모습에 절로 빠져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고, 그로 인한 정치적 혼란 속, 강압적인 학교 선생님들, 한창 성인영화와 성인잡지에 빠져드는 아이들의 모습 등 충분히 있었을 법한 과거의 구수한 추억들이 수를 놓는다. 사실 영화의 배경이 10.26 사건 이후인지라 그 사회적 배경의 특성상 다소 무거운 소재나 상황들도 많이 등장한다. 학교 선생님들은 그 당시 학생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권위적인 학교의 모습을 반영하듯 학생들 패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갑작스런 대통령 사망에 어수선해진 나라의 칙칙한 분위기는 학생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제대로 놀 수조차 없게 만든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그 당시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들춰내 사회적 메시지를 주려 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저 그 거대한 사회 속에서 부대꼈던 평범한 작은 소년의 일상, 그 개인적인 감정을 따라갈 뿐이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14살 중학생 소년들에게 대통령의 유고니 뭐니 하는 얘기들은 피부에 와닿지도 않고 관심도 가지 않는 이야기다. 그저 아이들은 여전히 변함없이 점심시간에 죽어라 축구도 하고 쿵쾅거리며 교실과 복도를 뛰어다닐 뿐이다. 이렇게 영화는 당시 험악하다면 험악했을 사회상에 관계없이 그저 마냥 즐거운 마음으로 시끄럽게 놀았던 아이들의 입장에서 이야기한다. '그때 대통령 유고고 뭐고 우리가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었어. 그냥 우린 놀기 바빴지' 하며 회상하듯이 말이다. 대신에 이 영화는 이 개인적인 '추억'이라는 소재에 대해서 꽤 진지하면서도 아련한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앞에서 말했듯, 지금은 그저 지긋지긋하고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싶은 우리 삶 주변의 여러 일들이, 나중에 기억 속으로 멀어져 가면 얼마나 멋지고 다시 불러오고 싶은 추억으로 변하는지를. 광호에게도 그랬다. 맨날 자길 쫓아와서는 모자나 뺏어가는 재명이 형, 세수하면 눈썹이 없어지고 평소에는 화장품 냄새만 짙게 풍기는 매너꽝 엄마 속에서 '어우, 지긋지긋해'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여러 산전수전을 겪은 1년 뒤 광호는 그 지겨웠던 일들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추억들이었는지 깨닫는다. 엄마에게 무심코 '엄마 사랑해'하고 말했던 그 때, 엄마가 '오늘은 짜장밥 먹자'면서 환하게 웃고, 재명이 형이 옆에서 손잡으며 함께 웃어주고, 같은 학교 철호가 놀러와서 같이 밥먹자고 하고, 은숙 누나도 함께 나와서 즐겁게 춤을 추는 그 지극히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평생 간직하고픈 눈부신 추억으로 승화되는지 말이다. 앞으로 다가올 많은 삶의 산전수전 속에서, 잔잔한 일상은 오히려 축복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렇게 광호처럼 뒤늦게 깨닫는다. 이렇게 추억이라는 것은 사람 약을 참 잘 올린다. 어쩌면 우리가 참 무딘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멋지고 좋은 일들, 사람들인지 모른 채 그저 여기서 더 나은 행복만 바라보며 달려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럴 수록 달려가는 속도를 조금 늦추면서, 나와 함께 가고 있는 사람들과 내 주위에 생겨나는 여러 일들을 제대로 돌아나 보면서 간다면 지금의 삶도 얼마나 흐뭇하고 아름답겠는가. 추억은 과거로 멀어질수록 더 아름답고 눈부시게 변한다. 지금도 이 모든 것들이 행복하고 뿌듯하다면 나중에 과거의 기억으로 멀어졌을 때 그 얼마나 찬란한 금빛 추억이 되겠는가. 이렇게 영화 <사랑해, 말순씨>는 지금도 시간의 배를 타고 한 걸음 씩 멀어져 갈 우리의 자질구레한 추억들에게 애정을 표시하는 영화다. 우리의 엄마와 우리의 가족, 우리의 이웃과 친구들, 우리를 수시로 스쳐갔던 그 모든 소소한 일상들이 어쩌면 모두 '말순씨'일지도 모른다. 촌스럽고 유치하게 느껴질지라도 생각할 수록 흐뭇한 미소를 머금게 만드는 추억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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