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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m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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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25 오전 1:32: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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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음> 보통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라면, 그것이 영화적 재미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전형적 스릴러이든, 아니면 실화를 바탕으로 해 사회적 경각심을 이끌어내려는 목적이든 간에 우리는 그 영화를 보고 보통 살인범에 대해 부정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 온갖 잔혹하고 비정상적인 살인방법들을 보여주면서 '이런 짓을 저지른 사람은 정말 천하의 몹쓸 인간이다'라고 은근히 주장하고, 그것을 보는 우리 또한 '대체 저런 짓을 저지른 인간은 누구일까, 저런 짓을 한 인간은 가만 놔둬선 안된다'는 생각에 절로 살인범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 영화들이 목적에 두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우리의 이런 감정이기도 하고. 그런데 이 영화 <오로라공주>는 그런 목적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저 살인행각만 보여주면서 살인범에 대한 의문을 부추기려 하지도 않고, 그런 행각들로 인해 살인범에 대한 증오심을 심어주려고 하지 않는다. 포스터에 큼지막하게 정면에 자리잡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범인은 이미 누군지 대놓고 밝혀놓았다. 일단 살인범이 누구냐에 대한 의문점은 가질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 살인범의 표정을 보니 살인범하면 흔히 느껴지는 냉혈한적인 면을 찾아보기 힘들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눈은 왠지 멍해보이고, 거기에 눈물같은 것까지 고여있는 것이, 살인을 하는 데 뭔가 이유가 있어 보인다. 이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는 이것이다. 그녀가 살인을 하는 이유, 우리가 납득할 만한 그 이유를 찾아내는 것. 살인범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부추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살인범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이 이 영화의 목표인 것이다. 전혀 연관성이 없는 듯한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난다. 백화점 화장실에서 한 여인이 주방기구로 추정되는 날카로운 기구에 난자당해 숨진 채로 발견되고, 20대 여인이 마사지실에서 석고팩에 질식된 채 숨진 채로 발견되고, 웨딩홀 사장이 웨딩드레스 사이에 나체로 걸쳐진 채로 숨진 채 발견되는 등, 살인 수법도 극히 비정상적이면서 잔혹하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서 뭔가 공통점을 찾기란 상당히 힘들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강력계 형사 성호(문성근)와 정 형사(권오중)가 수사에 나서는데, 이상하게 성호는 이 사건에 대해 유난히 뭔가 감이 잡히는 눈치다. 그는 은연중에 범인이 누군지 지목한다. 정순정(엄정화). 30대 초반이며 외제차 딜러로 일하고 있는 그녀. 지극히 평범한 여인으로 보이는 이 사람이, 과연 무슨 이유로 살인행각을 벌이고 있으며 그 최종 목적지는 과연 어디일까? 일단 배우 면에서 이 영화의 단연 발견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주인공이자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인 정순정 역의 엄정화이다. 사실 전작들인 <결혼은, 미친 짓이다>, <싱글즈>, 최근작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 이르기까지 쿨한 현대 여성의 이미지를 연기하는 데 그녀보다 더 잘 어울리는 배우도 드물 것이라는 생각은 일찌기 들어왔다. 그러나 이 영화 <오로라공주>에서 그녀는 지금까지의 연기와는 180도 달라도 한참 다른 이미지의 모습, 그것도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게 훌륭하게 소화해냈다는 점이 칭찬할 만한 점이다. 사실 <내 생애...>가 개봉한지 얼마 안 되어서 이 영화가 개봉하게 되는데, <내 생애...>에서 봤던 자기 주장 강하고 발랄한 여성의 이미지는 이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 말끔하게 사라졌다. 그저 멍한 듯, 그러나 차가운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면서 고분고분 목표물을 향해 다가가는 정순정의 모습은 일찌감치 엄정화가 이전에 보여줬던 발랄녀의 모습과는 궤를 달리 하고 있었다. 사실 엄정화가 영화에서의 발랄녀 이미지 외에도, 가수 활동을 통해서 어느 정도 느껴졌던 팜므 파탈 이미지도 적절히 가지고 있었던 게 사실인데, 이번 <오로라 공주>에서 그녀는 새삼 팜므 파탈 이미지를 새롭게, 그러면서 강렬하게 꺼내듬으로써 영화에서 또 한번 이미지 변신에 성공을 한 것이다. 그런데 엄정화의 연기는 이 정도 팜므 파탈스러운 이미지에서 그치지 않는다. 못보신 분들을 위해 자세한 설명은 금하겠으나, 영화를 보다 보면 정순정이라는 캐릭터가 대단히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차올라 있는 분노를 지니고 있음과 동시에 세상에 대해 희망 하나 남지 않은 서글픔까지 더해지면서 분노와 비애의 감정을 동시에 지니게 되는 캐릭터가 바로 정순정이다. 엄정화의 연기는 이러한 정순정의 복잡다단한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미칠 듯한 분노에 휘말려 살인행각을 벌이다가도 어느 순간 내재돼 있던 안타까운 서글픔이 다시금 터져 나오면서 보여주는 광기 어린 연기(특히 그녀가 어린 여자 아이 목소리 흉내까지 내며 울음을 터뜨릴 듯 내뱉는 대사들은 소름끼치기까지 했다)는 '저 배우가 저 정도의 연기 내공까지 갖고 있었군'하는 생각에 절로 '와' 소리가 나왔다. 엄정화가 이 역할이 원래 자기 역할이 아니었음에도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맡았다는데, 그만한 열정이 그녀의 연기 곳곳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확실히 그녀는 역할에 대한 대단한 열정을 지녔고, 또한 그 열정을 제대로 영화에 드러낼 줄도 아는 배우다. 엄정화가 극을 이끌어가는 면이 워낙에 많은지라, 다른 배우들의 연기가 상대적으로 비중이 너무 작은 점이 없지 않으나, 그래도 무리는 없다. 사실 성호(문성근)의 동료 형사 강 형사 역의 권오중의 연기는 그저 옆에서 투덜대거나 욕만 하는 정도에서 그쳐서 제대로 된 양념 역할을 하지 못한 게 아쉽기도 하지만, 성호 역의 문성근의 연기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꽤 호소력이 있었다. 그저 무표정으로, 감 잡히는 대로 수사를 하다가 가끔 참을 수 없는 감정에 울음을 터뜨리고, 그러다가도 '왜 이게 남의 일같니'하면서 아이러니한 비애감을 드러내기도 하는, 냉정하면서도 그래서 한편으론 무기력한 형사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자신이 출연한 영화들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게 전형적 상업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방은진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는 철학이니 인간 내면의 소통이니 하는 거창한 주제를 꺼내들며 여백의 미를 강조하지 않는다. 제목이 등장하기 전부터 잔혹한 살인 시퀀스가 펼쳐지면서, 후반부 쓰레기 매립장 장면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쉴새 없이 달려간다. 쓰레기 매립장 장면 이전의 살인 장면들은 수시로 긴장감을 조성하며 펼쳐져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게 만든다. 다섯 개의 살인 장면들이 전체 러닝타임의 처음 절반동안 다 나오는지라 후반부 클라이맥스로 가는 과정이 다소 지체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강렬한 감정적 임팩트를 주는 클라이맥스를 맞이하고 나니, 지체되는 듯 느껴졌던 과정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 이 영화는 방은진 감독이 기존에 너무 진지하고 예술적인 영화만 출연해서 이번 영화도 좀 예술적이고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단박에 깨줄 만하다. 감독이 말한 대로, 이 영화는 관객의 심장을 적절히 조이고 푸는 기술을 보여줄 줄 아는 전형적 상업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는 상업 영화로서 꽤 전형적이면서도 대단히 전형적인 방식에서 벗어난 면도 많이 가지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 이 영화는 우리를 살인범의 반대편에 서서 비난하는 쪽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 영화는 우리더러 살인범인 정순정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바라보라고 얘기한다. 끝에 가서 이런 감정이입의 과정이 좀 과잉인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일단 정순정의 시각에 제대로 자리를 잡게 되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는 생각부터가 번쩍 든다. 처음에 '대체 왜 저렇게 별 거 아닌 걸로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는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 나중에 그녀의 속사정을 알고 나면 '아, 충분히 이해가 간다'는 생각이 든다고나 할까. 한마디로 이 영화는 요즘 세상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그로 인해 얼마나 무기력하게 변했는가를 비극적인 어조로 토로한다. 정순정의 살인 행각의 원인이 된 딸 민아의 죽음, 그러나 정순정에게 살해당한 이들은 적극적으로 민아의 죽음에 도움을 줬다거나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민아에 대해 무관심했다. 그저 아이가 잘 있든 말든 길거리에 홀로 남겨뒀고, 위험하든 말든 택시비가 모자라니 길바닥에 내려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무관심이 끔찍한 죽음을 불렀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 일 아냐' 하면서 서로 아이를 밀치다가 결국 아이는 깊은 구덩이에 빠져 다시는 헤어나오지 못한 것이다. 이런 극단적 이기주의는 단지 '남'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래도 정순정의 딸 민아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형사 성호조차도 그랬다. 그는 민아의 엄연한 아버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형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딸의 죽음 앞에서 그냥 아무렇지 않다는 듯 '경찰에 신고해라'는 말만 내뱉었다. 그가 민아의 죽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진 않았어도, 그 죽음의 뒷모습을 그저 방관했다는 점에서 그도 정순정에게 살해당한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그가 살인사건을 수사하다가 '이게 어쩜 이렇게 남의 일 같냐'하는 말을 하는 순간도, 아직 그가 내 일마저 남 일 보듯 하는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상기시킬 뿐이다. 이렇게 심지어 아는 이들까지 남의 일이라며 서로 밀어내는 판국에, 한 아이의 참혹한 죽음과 그에 대한 어머니의 끝없는 절규는 그저 허공에 메아리도 치지 않고 흩어질 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나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할 줄 모르고 그저 소극적으로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는 사람들의 무기력함에 피해를 받은 그들의 안타까운 심정은 그저 안에서 썩어 문드러져 가는 것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어떤 이의 위기나 아픞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난 몰라'하면서 돌아서는 사람들보다 그 일말의 인간적 감정조차 발견하지 못한 분노와 슬픔에 살인을 저지르는 정순정이 과연 더 나쁜 인간이냐고. 나아가서 이 영화는 또 묻는다. 우리가 살인 당하는 영화 속 인물들 더러 '죽어도 싸다'고 얘기할 수 있을 만큼 결백한 사람들이냐고. 우리들 역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러한 지독한 무관심에 익숙해졌을지도 모른다. 길거리에 길을 잃은 아이가 있어도 그저 불쌍한 듯 쳐다보다가 지나가는 것이 부지기수였을 것이고, 주변에 누가 다치거나 움직이지 못해 곤란을 겪고 있는 사람을 봐도 역시나 그저 안타까운 듯 쳐다보다가 그냥 지나쳐 가는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우리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휙 내던지는 무관심과 이기주의가 어쩌면 정순정이 벌이는 식의 살인보다도 더 잔혹하고 비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이야기한다. 정말 마땅히 대가를 치루어야 할 범죄 앞에서조차 사람들은 그저 남의 일이라고 치부한 채 돌아서버리고, 피해자들의 뼈를 깎는 슬픔은 그저 공중분해되는 이런 상황은 분명 눈뜨고 보기 힘든 상황이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전형적 연쇄살인 스릴러이면서도, 한편으로 스릴러의 모양새를 한 지독한 비극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에 가서 정순정이, 쓰레기 매립장에 쌓인 쓰레기들처럼 인간이 가진 일말의 감정도 그저 자기의 소중함 앞에서 마냥 던져버리는 지독한 사람들의 모습 앞에서 피맺힌 절규를 하는 모습은 정말로 우리에게 강렬한 펀치를 날린다. '만약 현실에 정말 정순정이 있다면, 우리 또한 정순정의 다음 희생자가 되지 않을 자신이 과연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 생각을 하면, 정순정이 아니라 나 자신이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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