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모습이 과연 한결 같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겁니다. 당장 할아버지·할머니 세대까지만 거슬러 올라가도 사랑은 정이라고 했거든요. 더 올라가면 꼬마 신랑이 등장하는 때도 있고, 눈을 돌려 서양을 살펴봐도 지금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랑을 위해서 온 집안 발칵 뒤집어놓고 세상 떠 버린 줄리엣은 우리나라 법률상 당당한 미성년이기도 하죠(채 열 네 살도 안 된 나이...). 즉, 사랑이란 그 시대의 사람들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모습이 투영되기 마련입니다. 요즘 같으면 순수와 도덕 정도가 투영되지 않을까 싶군요. 당연히 그 둘에 배치될 경우 사랑이란 감정 자체는 엉뚱하게도 후순위로 밀려나고 맙니다. 그것이 바로 제도라는 틀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숭배하는 사랑이죠.
영화에는 서른 살 인영과 열일곱 살 석이 등장합니다. 학원 선생과 수강생 관계인 그들이지만, 그들 각각을 한 때 훑고 지나갔던 사랑의 기억이 서로에게 자극받아 다시 고개를 쳐들게 됩니다. 주변의 시선은 곱지 않고 과거의 기억들마저 현실로 나타나 상황은 복잡해지기만 하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사랑을 이어갑니다. 서른이든 열일곱이든 나이와 상관없이 사랑은 기쁘고 고통스러우니까요.
그처럼 변함없는 사랑의 감정을 강조라도 하려는 듯이 과거의 시간은 현재의 시간으로, 과거의 공간은 현재의 공간으로 묘하게 파고듭니다. 그럼으로써 열일곱의 사랑은 순수하고, 서른의 사랑은 세속적이라는 관객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영화가 하는 이야기와 현실 사이에는 분명 커다란 간격이 존재합니다. 영화는 감정에 충실하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습니다. 제도는 완강하고 안타깝게도 사람들마저 순수하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감정에 충실하란 당부는 현실이 꿈꾸는 판타지일 뿐이며, 현실과의 괴리감은 관객이 영화를 보며 느끼는 괴리감과 동일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순수한 감정에 푹 젖어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감정이란 그 시대의 요구에 의해 재단된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오직 감정에 충실하라.' 그것은 분명 동물이 되라는 의미는 아닐 겁니다. 어찌됐든 그렇게 해 본 적이 없기에 현실에서 얼마나 실현 가능할지 그저 궁금할 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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