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파와 쌈마이는 공통적으로, '뻔하다'는 이유로 대다수에 의해 천대받지만, 실제로는 그 본질에 대한 뿌리깊은 경멸을 간직한 자가 아닌 이상 대다수의 관객을 매료시킬 수 있다. '생각 없이 만든 영화', '웃고 즐기기에 좋은 영화'라는 결코 유쾌하지 못한 평가를 대체적으로 받는 <가문의 위기_가문의 영광 II>가 단시간 내에 300만을 돌파한 것을 보면, 쌈마이 코미디의 관객들은 자의에 의해 선택한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도 그 작품성 자체는 결코 인정하지 않는 경향을 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사로 따지면 <미워도 다시 한번> 이래 명맥을 이어온 신파의 커리어가 <친구> 이후 조폭 신드롬과 맞물려 세를 불려온 코미디와는 격을 달리한단 얘기다. <너는 내 운명>은, 멜로의 그늘에 숨어 유사품 행세를 하던 정통 신파극을 다시금 양지로 꺼내온 작품이다.
이 영화가 통속신파극이라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만, 그래도 미심쩍은 사실은 이 영화의 감독이 박진표라는 사실이다. 먼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박진표가 <여섯 개의 시선>에서 보여 준 일종의 통찰력 내지는 풍자성이다. 여섯 개의 에피소드 중 <신비한 영어나라>의 연출을 맡은 박진표는, 영어를 잘 발음하기 위해 예닐곱 어린 아이의 혀를 절개하는 학부모를 통해 우리의 현실을 냉철하고 섬뜩한 시선으로 조명한 바 있다. 그렇기에, 쿨한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는 <너는 내 운명> 같은 영화를 박진표란 사람이 만들었다는 데에 있어, 그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센세이션을 일으킨 박진표의 데뷔작은 분명 <죽어도 좋아>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올드보이>의 박찬욱,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박광수,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임순례 등 박진표에 비해 전혀 모자람 없는 감독들의 인권 프로젝트인 <여섯 개의 시선>에서 박진표의 활약은 분명 좋았지만 동급 최강이라 일컬을 수는 없었단 얘기다. 그의 명실상부한 대표작이라 말할 수 있는 <죽어도 좋아>에서 <너는 내 운명>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죽어도 좋아>가 화제가 되었던 것은 성기 노출과 함께 그것이 '노년'의 성과 사랑이라는 파격적인 소재를 다뤘다는 점인데, 여기서 중요한 건 '사랑'이 아니라 '노년'이기 때문에 화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처음부터 '사랑'에 관심이 깊은 사람이었고, 그런 그가 차기작으로 신파에 가까운 멜로극을 선택했다는 것은 어찌보면 류승완이 액션을 하고 임상수가 허를 찌르는 것처럼 당연한 얘기다.
그런데 <너는 내 운명>은 시작부터 하나의 핸디캡을 안고 출발한다. 서사 구조 상 두 주인공이 가까워져서 결혼에 골인하는 전반부가 있고, 앞에서 정기검진으로 복선을 주었던 AIDS 얘기가 급부상하며 중심 축으로 떠오르는 후반부가 있다. 문제는 2시간 남짓한 러닝타임에 두 가지 이야기를 모두 넣으려면 자칫 죽도밥도 안될 수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반부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사실상 영화가 주는 잔재미는 전반부에 밀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후반부에 극도로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전반부에 관객의 감정을 끌어올려 낙차를 크게 둘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두 가지를 모두 녹여내는 전자의 방법을 택한 것이지만, 그 때문에 중간중간 그 연결이 부드럽지 못한 부분이 눈에 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물은 그 힘은 강력하지만 그만큼 옆으로 '새는' 물도 많다.
그러나 이런 부족함도 메꿔줄 수 있는 것이 바로 배우의 연기력이다. 전도연과 황정민은, 무엇보다 캐릭터를 장악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 배우들이다. 단순히 연기를 잘 한다고 말하는 것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는데, 이들의 능력은 특히 인물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이 인물에 몰입되는, '캐릭터=배우'의 공식이 성립되는 몇 안 되는 배우들이다. 전도연은, <해피엔드>의 불륜을 저지르는 커리어우먼과 <내 마음의 풍금>의 열 일곱 초등학생을 같은 해에 소화한 배우다. 그 이후의 과정도 결코 식상하지 않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의 학원 강사처럼 잔잔하게 리얼리티를 전할 필요가 있는 역할과, <피도 눈물도 없이>처럼 '센 영화'의 '센 캐릭터'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배우가 전도연이다. 황정민은, 물론 도회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그의 외모 탓인지,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을 주는 작품도 있다. 이를테면 <바람난 가족>의 주영작 같은 역인데 그러나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아, 저 사람이 지금 저 느낌을 불편해 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갖게 할 뿐 연기에 대한 혹평이 올 수가 없는 연기를 펼친다는 것이다. 언급한 <바람난 가족>도 이러한 효과 덕분에 이중적인 변호사의 태도를 완벽히 재연할 수 있었다. 그 역시 <달콤한 인생>의 백사장 역으로 놀랍도록 비열한 연기를 펼친 뒤 <너는 내 운명>을 선보였다. 목장 경영이 꿈이고, 돈 모으는 데 이력이 난 순박한 농촌 총각 김석중을 재연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없지 않다. 그러나 '똘중이'가 될 수 없는 사람은 황정민 밖에 없다.
하지만 <너는 내 운명>은 분명 깔끔한 구석이 없는 영화다. 마치 맵고 짠 양념이 군데군데 배어 있어 먹을 때는 맛있지만 먹고 나면 양념과 국물이 흥건히 남는 음식처럼, '쿨함'을 추구하는 시대에 역행하는, 과거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한 괴상쩍은 영화다. 그러나 연출이나 연기, 혹은 미술, 음악 등 자잘한 것이라면 몰라도, 이 영화의 내러티브에 대해서 그 어떤 이도 반론을 제기해서는 안된다. <너는 내 운명>은 신파극이기 때문이다. 통속적이고 신파적인 눈물샘을 자극한다는 이 장르는, 이 영화를 위한 완벽한 변론이 된다. 신파극에 있어 쿨하지 못하다고 지적하는 것은 허공에 소리치는 느낌이다. 며,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구시대적인 영화 장르인 '신파극'이 쿨함에 지치고 질려버린 신시대에 새로운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박진표는, 분명 그 자신이 작가주의적 영화를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가정신을 결코 꺼내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또 다른 의미의 웰메이드 영화다. 물론 감독이 주장하는 상업영화라는 별칭도 놓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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