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내리는 눈과 교통사고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아시는 분들은 어느 정도 짐작하셨겠지만, 그건 바로 '뜬금없다'는 점이다. 완연한 봄의 기운이 감돌 4월에 눈이 내릴 것이라고 어느 누가 쉽게 상상을 하겠으며,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교통사고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둘 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노스트라다무스가 아닌 이상 예측을 하기가 힘들다는 점이 공통점이 아닐까 싶다.
이제부터 얘기할 영화 <외출>은 이 두 가지 소재가 '불륜'이라는 지극히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스러운 소재와 함께 어울려서 나온다. 두 미남 미녀 배우가 나와서 아찔한 불륜의 사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를 조장할 수도 있겠네 하는 생각도 들 수 있겠으나, 그건 아닌 듯하다. 뜬금없다는 게 공통점인 두 소재와 함께 나오면서 역시나 '뜬금없다'는 걸 주장하려는 것? 아마도 이쪽이 더 답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처음 영화가 시작하며 나오는 장면이 무슨 연락을 받고는 잔뜩 긴장하고 넋을 놓은 듯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인수(배용준)의 모습. 그는 방금 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차다. 공연 일도 제껴두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는 인수. 그의 옆에는 역시나 같은 사고에 관계된 서영(손예진)이라는 여인이 있다. 그의 남편 역시 같은 교통사고 때문에 크게 다친 상태이다. 그런데 사고 조사를 거듭 거치게 되면서 인수와 서영, 두 사람의 배우자는 서로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인수와 서영은 이중의 고통에 짓눌리게 된다. 같은 사고, 같은 처지 속에서 인수와 서영이 자주 옷깃이 스치고 마주치는 건 당연지사. 그들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으로써 서로 어느 정도 얘기를 주고받으며 친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게 좀 깊게 들어간 탓일까. 서로의 처지를 충분히 알고 있고, 그 슬픔의 깊이 또한 충분히 공감이 갈 두 사람은 그저 친분 이상의 감정에 휩쓸리게 된다. 자신들의 그토록 배우자들에 대해 분해 하고 원망했던, 흔히 남들이 그러는 '불륜'이라는 사랑 속으로.
일단 이 영화는 허진호 감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캐스팅이 상당히 화려하다. 그러나 허진호 감독의 전작에 출연했던 한석규, 심은하, 이영애, 유지태가 그랬듯, 이 영화 속에서의 배용준, 손예진 또한 톱스타라는 안전지대에서 빤히 보이는 이미지대로 노는 연기는 하지 않았다. 그저 허름한 점퍼나 걸치고, 잔뜩 흐트러진 상태로 혼자 처량하게 술도 마시는, 그저 보통 남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배용준의 경우는, 그가 지금까지 갖고 있던 특유의 다정다감 이미지, 그래서 상처받기도 쉬운 이미지를 이 영화에서 특히 잘 살려낸 듯 싶다. 왠만해선 화도 안내고, 왠만한 감정은 속으로 삭이며 그저 과묵하게 있는 모습이 예전 드라마에서의 그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거기에 불륜에 배신당하게 되면서 다소의 원한이나 서러움 또한 갖게 되는 면은 물론 다르지만. 그러나 잦은 클로즈업과 별 기교 없는 카메라워크 덕분인지, 그의 연기는 기존의 이미지를 보다 입체적이고 깊게 드러내지 않았나 싶다. 아내의 불륜까지 알게 된 뒤 술집에서 홀로 오열하는 모습이나, 후반부에서 콧물인지 침인지(?)까지 불사하면서 소화하는 눈물연기는 확실히 뭔가 진한 감정의 맛이 살아 있는 듯한 연기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속으로 아파하기만 하는 이미지는 기존의 '욘사마'스런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이라 아쉽기도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배용준보다는 손예진의 연기가 더 괜찮지 않았나 싶다. 물론 그녀의 이번 영화에서의 역할 역시 기존의 별칭인 '멜로의 여왕'에 잘 부합되는 적절한 역할이라, 그다지 의외의 선택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 속 처지가 그저 착하고 청순가련한 여학생이 아닌, '배우자의 불륜을 알게 된 유부녀'라는 점에서 깊이가 한층 더 깊어진 듯 싶다. 이 영화 속에선 배용준도 그렇고, 손예진 역시 그다지 많은 대사를 하지 않으나, 적어도 그녀가 보여주는 표정 하나만은 영화 속 서영이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잘 알려주는 듯하다. 참한 외모지만 초췌하고 기운없이 그저 멍한 듯 앞을 바라보는 눈빛, 남편의 불륜을 처음 알게 되는 순간조차 완전히 화를 내지 못하고 그저 숨을 멈추듯 머뭇거리기만 하는 모습, 한창 사랑에 빠져들 순간인 베드신에서 금방 사라질 인연에 안절부절 못하고 숨을 거듭 몰아쉬는 모습 등 대사보다는 표정이나 몸짓을 통해 보여주는 연기가 상당히 괜찮았다. 손예진이 지금까지 보여준 연기가 분명 여러 장르를 다양하게 오가며 보여주는 카멜레온 스타일은 아니나, 적어도 자신이 가장 잘 하는 멜로라는 장르내에서 갈수록 그 감정표현의 폭을 넓고 깊게 확장해 가고 있지 않나 싶다.
이 영화는 소재 면에서만 볼 때는 허진호 감독의 전작들과는 상당히 다르게 좀 자극적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는 주인공이 불치병에 걸리긴 했지만 그 전개가 지극히 생활적이고 담담했고, <봄날은 간다> 또한 한 남녀의 사랑과 이별의 궤적을 어떤 자극적 소재없이 그저 조용히 따라간 데 반해 <외출>은 불륜이라는 소재 특성상 격정적인 장면도 꽤 있고, 아찔한 순간을 연출해내는 장면들도 꽤 있다. 그러나 역시나 감독은 불륜이란 소재를 '사랑과 전쟁'틱하게 자극적이게 그려내지 않았다.
대사와 행동을 최대한 절제함으로써 두 사람의 사랑이 결코 함부로 다가서는 사랑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 한 듯 싶다. 두 주인공은 대화를 해도 '무슨 일하세요?'라고 물으면 바로 자기 직업 얘기하고 '그쪽은 무슨 일하세요?'라고 하듯 그저 할 얘기만 딱 하고 구구절절 대사를 늘어놓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스킨쉽이나 애정표현 또한 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로 느리고 조심스럽기 때문에 함부로 막 달려들어서 자극적으로 느껴지는 사랑으로는 보이지 않게끔 그려내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이때문에 오히려 관객은 두 사람의 감정에 몰입하기가 좀 힘든 감도 없지 않다. 불륜을 아름답게 그리는 것이 목적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멜로 영화인 특성상 관객들이 두 사람의 감정의 격랑에 어느 정도 몸을 담글 수는 있게 해주면 좋았을 텐데, 대사와 행동이 많이 절제된 탓에 관객의 관찰력을 더욱 요구한다. 또 허진호 감독의 이전 영화들처럼 가슴에 팍 꽂히는 독특한 명대사(이를테면 <봄날은 간다>에서 '버스와 여자는 떠나면 잡는게 아니란다')를 찾기도 어렵고 말이다. 요런 점이 단점이라면 좀 단점이다.
이 영화는 허진호 감독의 전작과 달리 소재부터 확 사람을 잡아끌지만, 말하고자 하는 건 전작들과 꾸준히 이어지는 연장선상에 있지 않나 싶다. <봄날은 간다>에서 그랬듯, 이 영화는 역시나 사랑이 갖고 있는 '불가항력'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첫째로, 우리가 흔히들 로망처럼 품고 있는 '변하지 않는 사랑'과는 달리 사랑은 세상의 흐름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인 인수와 서영은 처음 배우자들이 서로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배신의 눈물을 흘리며 그들은 원망한다. 인수는 혼수상태에 있는 아내 수진에게 "너 차라리 그냥 죽어버리지 그랬니"라는 말을 나지막하게 내뱉으면서. 그러나 막상 그들 또한 그들이 그렇게 원망했던 방식의 사랑에 빠져버리지 않던가. 물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다보니 생겼기 때문인지 그 연유는 좀 다르겠지만, 아무튼 역시나 배우자가 있는 사람들끼리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같은 흐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 자신들 또한 그런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앞으로 자신들이 어떤 길로 가게 될지 알 수 없게 된다. 당시 사랑에 빠졌을 배우자들의 마음을 이해라도 하는 듯, "내가 미쳤나봐요"하면서 자신을 원망한다. 그들 역시 그런 처지에 빠지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자신이 그렇게 원망하던 상황으로 어느 순간 스스로 들어서 버리는 것, 이것 역시 인간이 어떻게 의도한 대로 갈 수 없는, 사랑의 불가항력적인 속성인 것이다.
두번째로, 사랑의 급작성이다. 지극히 단조롭고 조용한 전개 속에서 뭔가 극적인 부분을 찾아내기도 어렵지만, 이 영화 속 사랑은 갑작스럽게 시작되고 갑작스럽게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건 앞에서 얘기했듯 '불륜'이란 소재가 '4월의 눈'과 '교통사고'라는 소재와 나란어깨동무하며 나온 이유와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않은 4월이란 시간에 눈이 내리듯, 전혀 예상하지 않은 시기에 교통사고가 생기듯, 이들의 소위 '불륜'이라 불리는 사랑 또한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들 마음 속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어떤 예고도 없이, 상대를 사전에 정해주지도 않고 무작정 찾아오는 사랑인데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버티거나 밀어낼 수 있으랴. 이 역시 사랑이 갖고 있는 불가항력의 또 다른 면인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두 드라마의 두 대사가 생각났다. 첫번째론 드라마 <거짓말>에서의 대사.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거야. 교통사고에 노인이고 유부남이고 홀아비고가 어딨어. 나면 나는 거지'라는 대사 말이다. 두번째로는 좀 생뚱맞겠지만 최근에 본 <굳세어라 금순아>에서의 어쩌다보니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사랑하게 됐더라는 말이다. 이렇게 이 영화는 '사랑'이라는 명제의 인력보다 더욱 강한 두 가지 면을 제시하고 있다. 언제 누구를 데리고 올지 모르고, 어느 순간 그 깊은 천국이자 늪에 빠뜨릴지 모르는 성질 말이다. 마지막, 그들의 '우리 이제 어디로 갈까요?'라는 말처럼, 사랑은 거기 현재 몸담고 있는 당사자들 조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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