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를 만나는 안나에게 래리는 이렇게 묻는다. 그 놈이랑 잤어? 그 놈이 나보다 더 잘해? 어떻게 더 잘하길래? 가장 마지막에 한게 언제야? 오늘?? 몇 번 했어? 빨기도 했어? 어디서 했어? 저 쇼파에서?? 저긴 나랑 처음한데잖아? 내 생각안나든? 이 화냥년 !
내 여자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하면, 남자는 궁금하다. 그 놈이랑 어디까지 갔는지. 내 남자가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하면, 여자는 아프다. 어떤 여자이길래. 그리고 아직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남아있는지.
'사랑은 눈으로 들어온다'는 예이츠의 시 처럼, 앨리스와 댄은 길거리에서 첫 눈에 반한다. 플래시처럼 터졌을 첫 눈빛의 찰라를 흐느적대며 잡아내는 오프닝 씬. 앨리스가 댄에게 '안녕, 낯선사람~' 이라고 처음 말을 건내는 장면은 그 속도 만큼이나 숨을 멈추게 하고 로맨틱한 그 느낌은 필자의 입술로 번져버렸다.
'사귀는 사람 있어요?' '언어학을 전공한 애인이 있긴 한데...' 언어가 잘 통할 것 같은 애인이 있지만 육체가 잘 통할 것 같은 당신에게 더 끌린다는 눈빛을 보내는 순간, 가혹하게도 이 영화의 로맨스는 시작한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막을 내린다.
등장인물은 단 네 명. 대사가 있는 사람도, 이름이 있는 사람도 오직 네 명 뿐이다. 이 네 사람이 만들어 가는 사랑 이야기는 더 할 나위 없이 솔직하기 때문에 추하고 챙피하다. 영화 [Closer]는 사랑을 주제로 하고, 사랑을 수없이 말하면서, 사랑을 결코 보여주지 않는다. 사랑의 과정 따위는 관심 밖이라는 듯 철저하게 생략하고 건너뛴다. 영화속에는 만남의 짜릿함과 전쟁같은 헤어짐의 고통만이 존재한다. 칠순 노장 감독은 첫눈에 반한 사랑을 믿지 않나보다. 운명같이 찾아왔다고 믿은 사랑도 어찌어찌 사귀다보면 추잡한 질투와 옹졸한 불신으로 얼룩져 막을 내리게 되는 법이라고.
"너에게 말할게 있어. 나, 안나를 사랑해. 처음 만났을 때부터... " "운명처럼 말하네. 사랑은 순간의 선택일 뿐이야. 그 순간에 거부할 수도 있는 거라고." "난 이기적이야. 행복해지고 싶어." "내가 싫진 않지만 지겨워진 거니?"
댄은 첫 눈에 반한 앨리스를 버리고 다시 첫눈에 반한 안나에게 다가간다. 그 놈의 운명적인 만남은 어쩜 그렇게 자주 운명적인지.. 하지만 래리와 섹스했음을 눈치 챈 댄은 다시 안나를 창녀 취급한다. "사랑하는 너에게 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너를 사랑하는 맘은 그대로야." "그대로라고? 니 몸도 그대로니?"
두 남자는 두 여자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진실을 말하라고. 사실을 말하면 용서해준다고.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진실은 오히려 진실을 망가뜨리고 한낱 섹스 앞에 사랑을 무릎 꿇린다. 도대체 그들이 사랑한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사랑하기는 했었는가.
연인들은 "진실"만을 쏙 빼놓았으면서 이제야 진실을 알았다면서, 세치 혀의 날을 세워 사랑하는 사람의 진실한 가슴을 후벼파기 일쑤다. 연인들 사이에 끊임 없이 일어나는 불신과 질투의 상처 위에는 '믿음'이라는 딱지가 앉아야 아물어지지만, 어느 순간 '진실'이 다가와 그 딱지를 뜯어내고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긴다.
영화 [Closer]는 '거짓' 보다도 '진실'때문에 오히려 사랑이 멈추게 되는 이야기이다. 어떤 평론가가 이 영화는 사랑을 막 시작한 연인들에게는 저주같은 영화라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오히려 그런 이유로 사랑을 많이 해보지 않았거나 이제 사랑을 막 시작한 사람에게 이 영화를 선물해주고 싶다. 사랑을 시작할때는 열정만 있으면 되지만 사랑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진심이 깨어지지 않게 보호해주는 거짓과 타협의 껍질'도 필요하기 때문에...
마지막 앨리스의 대사가 아직도 마음속에서 웅웅거린다. "가지마, 사랑해." "사랑이 어디있는데? 보여줘. 만질수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어. 네 말에만 있는 사랑은 공허할 뿐이야"
뉴욕으로 돌아간 앨리스의 슬픈 모습 위로 흐르는 노래는 이 겨울 최고의 명장면 이다.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죠. 이제는 당신에게서 내 마음을 뗄 수가 없네요.'
Filmania CROP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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