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픽사의 신작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을 보고 느낀 점을 간략히 써보겠습니다. 픽사의 최신 애니메이션이라든지, 미국에서 흥행대박을 터트렸다든지, 3D 애니메이션 기술의 정점을 보여준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은 생략하겠습니다. 이미 다 알려진 것들이고 또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이 글에서는 순전히 '인크레더블'이라는 영화를 보고 제가 느낀 점, 영화의 구조와 특징, 돋보이는 점과 아쉬운 점, 한국 관객으로서 한번쯤 생각해 볼만한 점 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겠습니다.
우선 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이 영화는 '슈퍼 히어로' 영화입니다. '슈퍼맨'이나 '배트맨'시리즈같은 영화들을 떠올리시면 이 영화가 대충 어떤지 짐작할 수 있구요, 은퇴한 히어로 부부가 다시 일선에 복귀하고 자녀들까지 대를 이어 슈퍼 히어로가 된다는 점에서 스파이 키드나 기타 여러 스파이 장르 액션 영화들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메가폰을 잡은 브래드 버드 감독은 이미 영화사에 기록된 숱한 스파이물, 슈퍼 히어로물들의 클리세들을 모아모아 이 작품 안에서 3D로 새롭게 한번 구현해 보겠다는 야심을 품은 것 같은데 결과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대성공입니다. 그래서 어찌보면 이 영화는 3D의 기술력도 돋보이지만 사실은 기존 실사 슈퍼 히어로물에 바치는 철저하고도 매혹적인 오마쥬가 더 인상적인 작품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따라서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사를 화려하게 수놓은 숱한 유명 스파이 영화들과 슈퍼 히어로 무비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데 이러한 즐거움은 영화를 많이 보신 시네필 특히 액션물 매니아들에게는 정말로 큰 선물이라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또 이 작품은 기존 슈퍼 히어로 영화들과는 달리 주인공의 자아 정체성과 관련된 갈등과 고민을 매우 심도깊게 다루고 있어 관객을 놀라게 합니다. 이는 일반적인 액션영화의 장르 컨벤션을 크게 벗어나는 것으로서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이자 이 영화의 작품성을 높이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액션팬들은 '액션장면 자체의 양과 질'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주인공 부부가 보여주는 이같은 고민들의 모습은 색다르기도 하고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같은 점은 평상시엔 평범한 시민으로 살다 비상시엔 슈퍼 히어로로 변신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작품인 '슈퍼맨'을 떠올려보면 더욱 뚜렷해집니다 슈퍼맨은 미스터 인크레더블보다 출생과정의 비밀이 훨씬 더 복잡하기 때문에 영화에서 자신의 자아정체성과 능력에 대한 고민을 충실하게 다루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데도 실제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슈퍼맨은 평상시엔 말 그대로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별 불만없이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데요, 오히려 이같은 평범한 삶이 자신의 유별난 신분을 감추는데 큰 도움이라도 되는 듯 시종일관 감지덕지한 모습을 보이죠. 물론 비상사태가 벌어져 슈퍼맨으로 변신해 출동할 때는 더더욱 슈퍼 히어로로서의 자신의 본래 역할에 충실합니다. 이런 컨벤션에 익숙한 관객들은 이 영화에서 인크레더블이나 부인인 엘라스티 걸이 보여주는 다양한 고민들을 접하면서 9.11이후 '안팎으로 거센 도전에 직면한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의 정당성과 효용성을 놓고 고민하는 엉클 샘'을 떠올려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대한 찬성과 반대는 일단 논외로 치더라두요. 따라서 이 영화는 단순히 3D애니메이션 특유의 현란한 영상미뿐만 아니라 슈퍼 히어로 액션 장르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와 오마쥬까지 성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멋진 3D 애니메이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같은 큰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눈에 띄는 심각한 약점들을 안고 있습니다. 이 약점들은 하나같이 위에서 이야기한 이 영화의 장점들과 연관이 있습니다. 우선 이 영화는 기존 실사 액션 블럭버스터에 비해 핵심적인 액션씬이 다소 부족할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극 후반부에 배치돼 있습니다.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듯 스토리 자체가 슈퍼 히어로로 활동하던 주인공 부부가 잠정은퇴를 한 뒤 다시 복귀하는 식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인데요, 이 영화의 핵심 액션장면의 기술적 완성도와 화려함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기가 막힙니다만 문제는 너무 극 후반부에 액션장면이 몰려있다보니 초장부터 화려한 액션씬이 등장하길 기대하는 관객들에게는 영화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같은 실수를 했던 가장 대표적인 할리우드 블럭버스터를 들라면 역시 '진주만'을 빼놓을 수 없겠죠. 이 영화 역시 진주만을 둘러싼 역사적 사실들과 주인공들의 이야기들을 번갈아 꼼꼼하게 소개하느라 막상 영화의 핵심적인 스펙타클 액션씬인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장면은 영화가 시작된 지 한시간 반이 지나서야 등장함으로써 영화팬들의 원성을 샀죠. 따라서 이와같은 구조적인 약점이 영화의 흥행이나 평판에 끼칠 타격은 위에서 이야기한 영화 전반부 인크레더블 부부의 고민에 대해 관객들이 얼마나 깊이 공감해 주느냐에 따라 좌우될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또한가지 뚜렷한 약점은 주인공들의 내적갈등을 심도있게 묘사한 것에 비해 이들을 상대하는 악당 캐릭터 '신드롬'에 대한 묘사는 크게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의아했던 점인데 이 영화는 주인공 캐릭터 구축에는 공을 많이 들이면서도 막상 영화 내러티브를 떠받치는 또다른 큰 축인 악당 '신드롬'에 대해서는 캐릭터 구축이 너무나 부실해 극을 이끌어가는 메인롤 캐릭터간의 균형감이 크게 흔들려 보입니다. 영화상에서 신드롬은 어린시절 인크레더블과의 개인적인 트러블로 인해 상처를 받고 결국 악당으로까지 성장하는데 이같은 설정은 물론 기존 슈퍼 히어로 영화들에서도 많이 등장합니다만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그후 신드롬이 어떤 과정을 거쳐 악당이 되었는지가 불분명하며 악당이 된 후 그가 지향하는 세계관도 너무나 유치해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그냥 좋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만 이 작품은 주인공 부부가 단순히 힘만 자랑하는 무식한 히어로들이 아니라 많은 고민을 가진 인간적인 캐릭터임을 집중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들과 대립하는 악당 캐릭터들에 대해서도 이에 버금가는 캐릭터 구축이 필요하죠. 그렇지 않으면 주인공들의 고민이 평면적인 악당 캐릭터 때문에 아주 설득력이 떨어져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극 후반부 인크레더블 가족이 일전을 치르는 악당 신드롬의 본거지 장면은 그 층실하고 세밀한 묘사로 관객들의 감탄을 자아내지만 막상 이런 거대한 악의 제국을 건설한 주인공에 대해서는 이처럼 묘사가 치밀하지 못하다 보니 관객으로서는 왠지 앞뒤가 뒤바뀐 것 같다는 당혹스런 느낌을 감출 수가 없는 게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둘러싼 논란 중에 하나인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해서도 잠깐 이야기해보죠. 이 영화는 슈퍼 히어로가 주인공인데 영화사에서 슈퍼 히어로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어디까지나 미국 대중문화가 낳은 산물입니다. 따라서 미국 할리우드산 슈퍼 히어로 영화에 등장하는 그 숱한 정의로운 주인공들은 바로 세계의 경찰인 미국 자신의 아이콘에 다름아닌거죠. 근데 이 영화는 그런 슈퍼 히어로가 단순히 힘만 자랑하는 무식한 근육맨이 아니라 사실은 자신의 능력과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때론 좌절하기도 한다는 뜻밖의 내용을 담고 있어 현재 미국이 안고있는 고민들의 편린을 엿보게 하고 있습니다. 20세기 세계의 세력판도는 다극화 블럭의 대립이 부른 두차례의 세계대전과 이후 양극체제에 바탕을 둔 냉전체제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일국 체제중심 즉 '팍스 아메리카나'로 진화해 왔습니다. 이렇다보니 이 과정에서 자국의 이익과 안전 극대화를 위해 노력하는 미국의 입장과 나머지 세계간의 대립의 골이 점점 깊어지고 있고 이는 격렬한 반미주의의 전세계적 표출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근데 문제는 이같은 고민을 해결할 뚜렷한 대안이 현재로서는 없다는 점입니다. 팍스 아메리카나같은 일국중심의 세계체제는 필연적으로 반미주의를 부릅니다만 만약 팍스 아메리카나가 무너지게 되면 세력재편을 둘러싼 무력충돌이 불가피해져 또다른 세계대전을 불러올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를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만 팍스 아메리카나를 대체할 새로운 체제는 엄청난 비용을 필요로 한다는 점만큼은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할 것 같습니다. 이같은 사실을 과시라도 하듯 미국은 전세계의 바램과는 반대로 일방주의적 외교정책을 추진해온 부시를 재신임했구요, 이로인해 전세계가 크게 실망하고 있죠. 그러나 적어도 미국내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할리우드에서는 이러한 전세계에 만연한 반미정서를 어느정도 인식하고 있고 이같은 자아성찰이 일부 작품들에 반영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크레더블'이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고 있는 미국의 진지한 자아성찰이 녹아있는 작품이냐 아니냐를 놓고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만 어쨌든 이 작품은 여태까지의 슈퍼 히어로 영화들과는 달리 주인공 히어로들의 고민의 비중이 큰 것만큼은 사실이고 그래서 이는 '할리우드가 그려본 세계경찰 엉클샘의 고민'일 가능성이 그만큼 큰 거죠.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독불장군식 70년대 '슈퍼맨' 영화와 달리 온가족이 힘을 합쳐야 겨우 악당을 물리칠 수 있다는 메세지를 유달리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으로 '다자간 협력'을 추구하는 미국 정계 판도내 자유주의 노선을 일정정도 따르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물론 할리우드를 제외한 일반적인 미국인들(마이클 무어가 '백인 쓰레기들'이라고 부른)이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를 이 영화에서처럼 힘을 합칠 가족으로 인식하느냐, 적으로 인식하느냐는 또다른 문제이긴 합니다만.
사족으로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든 생각 하나만 덧붙이겠습니다. 미국은 확실히 대중문화에 비교우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 그동안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숱한 액션영화들이 이 영화를 만드는데 큰 토대가 됐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 영화의 배경음악 역시 잘 들어보면 70년대 블랙 엑스플로이테이션 장르 이를테면 '샤프트'같은 영화에서 나왔던 음악과 무척 흡사합니다. 이같은 풍요로움은 확실히 부러운 것이긴 합니다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미국은 차를 대중화시킨 최초의 나라이지만 현재는 미국의 카 메이커들이 일본이나 독일 제조업체들에 많이 밀리고 있지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루지 않겠습니다만 '인크레더블'을 보면 사양길로 접어든 미국의 카메이커들의 부침이 떠오르는게 좀 마음에 걸립니다. 픽사가 3D 애니메이션이라는 신천지를 개척한 뒤 요몇년간 미국 영화계에서는 이 신기술을 이용한 애니메이션이 잇따라 발표됐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기술적인 진보에도 불구하고 이들 3D 영화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눈에 띄게 새롭다고 할만한 것들이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내러티브를 새롭게 만들어내지 못하고 그저 기존 이야기들을 패러디하는데 급급하다든지 유명 배우들 데려다 성우로 기용한 점들을 마케팅 포인트로 삼고 있다면 이는 좀 생각해 보아야할 문제입니다. 미국은 현재 대중문화에서 분명히 세계적인 비교우위를 자랑하고 있지만 이 같은 우위를 유지해 가는데 있어서 기술적인 진보에만 치중한다면 이는 언젠가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이 글의 서두에서도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인크레더블'을 보면 영화사를 장식한 숱한 슈퍼 히어로 무비들의 클리세가 정말 밑도 끝도없이 반영돼 있습니다. 이는 영화팬들을 즐겁게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이 영화는 새로움보다는 기존의 컨텐츠를 신기술이라는 겉만 화려한 당의정으로 감싸 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가능합니다. 이는 미국 영화계의 문제니만큼 제가 여기서 열을 낼 필요는 없지만 요즘 잘나간다고 기고만장하고 있는 한국 영화계가 반면교사로 삼아야할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해보는 얘기입니다.
날씨도 추운 연말인데 화끈하고 잼난 액션물, 보고나서 후회가 되지않는 깊이있는 애니메이션을 원하시면 망설이지 말고 '인크레더블'을 선택하십시오. 멋진 액션장면을 즐기시는 분이라면 앞부분만 좀 참으시면 곧 눈앞에서 불꽃이 번쩍이는 듯한 화려한 액션씬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될 겁니다. 미국제 애니메이션은 너무 느끼해서 싫다는 분들도 한번 속는 셈치고 이 영화를 보십시오. 깊이있게 그려진 주인공 부부의 고민과 자녀들의 대활약상에 아마 넋이 송두리채 빠지게 될 것입니다. 특히 섬에서 보여주는 아들 '대쉬'의 믿어지지 않는 달리기 장면을 절대 놓치지 마십시오. 정말 그 장면만큼은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길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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