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연극은 몇번, 뮤지컬은 그나마 홍보성의 무대 한 두번. 제대로 된 오페라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좋아하는 영화로 오페라라는 영역을 드나들어 본다는 것이 꽤 색다른 감동과 경험이다. 예전에 아무생각없이 본 영화에서 파리넬리의 '울게 하소서'는 부석거리는 심장의 그 한가운데를 파고들어 가늘고 강렬한 충격과 울림을 주었다. 이후, 물랑루즈에서의 이완맥그리거의 청아한 노래도, 시카고에서의 르레젤위거의 실루엣 장면도 오페라라는 장르를 전혀 모르던 내게 좋아하는 영화를 통해 오페라를 관심있게 넘보는 계기로 기억하게 되었다.
이 영화 오페라의 유령은, 스크린을 통해 거의 무대를 보는 것과 같다.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시작한 이후로 온몸을 휘감는 전율을 수차례나 느꼈다. 이미 폐허가 된 듯한 공연장이 너무 그럴 듯 해서, 묵은 먼지가 뒤덮혀 죽어있던 공간들이 한 순간에 선명한 칼라로 살아숨쉬기 시작할 때 부터였나보다. 콧대높은주인공으로 나오는 그여자(카를로타)의 목소리가 천장을 타고 끝도 없이 올라갈 때도 그랬고, 크리스틴의 청아하고 매력적인 목소리, 팬텀의 굵고 거친 목소리, 라울의 부드럽고 배려심있는 고음, 뚱땡이 아저씨 그리고 진짜 오페라단원이겠지 싶던 탁월했던 조연들, 코미디언같던 극장주들의 노래까지 포함, 한니발이니 뭐니 내가 알 지 못하는 것들이지만 비장하고 장엄하고 열광적인 그 오로지 그 무대만으로도- 그 중에서도 가면무도회장은 가장 오페라의 유령 다운 장면처럼 보여서 눈을 못떼고 봤다. 이 모든 무대가 펼쳐질 때 마다,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올라오는 전율을 몇번이나 경험했다. 초반부 약간의 지루함을 제외하면 클라이막스만 이렇게 여러번 섞어놓다니...너무 넘치는 건 아닐까싶을 정도로. 책에서 꽤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음에도 정확하게 감이 오지 않던 유령이 산다는 그 지하공간, 그것이 너무나 선명하게 재현된 것에 또한 감동스러웠다. 오페라만의 독특함이라면 모든 대사가 노래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하다못해 종반에 라울이 절규하고 소리지르는 장면조차도 노래로써 가능하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저렇게 싸운다면 어떨까...노래로 싸워지나??ㅋㅋ)
예전에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솔직히 제대로 공감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공감가는 코드도 아녔기 때문일테지만, 읽을 수록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읽는 지 의아해 했던 것이 생각난다. 선물받은거라..나름대로 끝까지 볼 려고 기를 쓰곤 했었는데 내 기억으론 늘 한자리를 비워두는 극장, 그리고 음습하고 우울한 지하공간에 사는 팬텀이란 인물이 대단히 미스테릭하게 느껴진 것만이 흥미를 끌었던 거 같다... 인간적으로 동정하기보단 무슨 추리소설의 범인쯤으로 생각했던 거 같고. 천재적 재능을 가진 불운한 인간과 그가 사는 세계의 석연찮음. 아쉬웠던건 대개 책을 보면 그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감동을 느끼게 되는데 아무래도 오페라의유령에선 그 음악과 그가 사는 지하공간을 상상해 보는 것이 한계가 있었던 거 같다.
소리가 없어 한계가 있던 그 책의 내용이(대체로 원작만한 영화가 더 어렵지만) 보다 훨씬 생명력있는 모습으로 온전히 살아서 내 눈앞에 장엄하게 펼쳐져 버렸으니 열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오페라공연을 봤던 사람들이랑은 또 다를테지만) 지저스슈퍼나 에비타는 들어본 적 있으나 이번 영화를 보고 엔드류 로이드 웨버를 처음 기억하게 되었다. 배트맨이 사는 집을 멋지게 그려내고 연출했던 죠엘 수마허. 그가 밑그림을 그리고 저 탁월한 음악가가 직접 음악을 맡았으니... 거기다 시종 궁금하던 것. 오페라에 주인공들이 어떻게 저 많은 곡들에 입을 맞췄을까 하는. 그게 주인공들이 실제로 부른거라니...놀라웠다. 아무튼 그런 저런 이유로 사소한 아쉬움 같은 것들은 부피가 쪼그마해졌다.
사실 나는 파리넬리를 너무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다(물론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그러니..나는 이렇게 오페라란걸 보면 내가 알고 있는게 그뿐이니 오로지 파리넬리만을 비교하곤 한다) 솔직히 영화속에서 크리스틴보단 카를로타가 훨씬 노래를 잘하는 것으로 들렸다. 그녀(카를로타역)의 가창력이 탁월했지만 얼굴이 좀 적절하지 않은 관계로...(미안하지만) 에미로섬(크리스틴역)이 되지 않았나 싶다. 영화속에서의 그녀의 목소리는 순백의 꽃처럼 티가 없는 목소리여서...최고의 가창력이라고 할 수 없으나 감성을 울리는 것으론 그나마 너무 노련하다싶은 카를로타보다 적합하다고 위로해본다. (주인공은 얼굴과 목소리가 함께 따라주어야 함으로 캐스팅면에서도 상당히 어려웠겠다 싶다) 하이톤의 부드러운 라울의 목소리나 그의 얼굴은 나름대로 매력이 있었으며 팬텀은 솔직히 처음부터 좀 맘에 썩 들진 않았다. 나는 그가 다른 모든 사람들의 가창력을 무용지물로 만들만큼 탁월하리라고 기대했었나보다. 그가 오죽하면 사람이 아니라 유령으로 불리웠겠는가(물론 그의 신출귀몰한 행동을 제외하더라도) 선천적으로 기형인 얼굴을 댓가로 주고(?) 나온 재능이라니 일반 사람보다는 다른 한차원 뛰어난 영혼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을 거란 환상을 품었었다. 그러나 막상 그의 목소리는 굵고 거칠고 파워풀했으며 또한 평범했다...ㅡ.ㅡ 개인적으론 별로였고 지하세계에서 자란 사람치고는 너무나 건장하고 힘이 넘쳐서...동정심이 별로 들지 않았다. 이모든 사소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연기와 목소리 둘다를 요구하는 캐스팅은 아주 힘들었을거라고 생각되므로 그들의 노력이나 연기는 박수쳐주고 싶다. 덧붙여 오페라라는 장르에 대해 문외한인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소감일 뿐이니까 뭐.
아쉬운 거 하나더 얘기하면 초반에 유령의 모습이 너무 일찍 드러나버린 거 같다. 음악에 비중이 깔려 그의 심리적인 것은 좀 부족해서 연민과 동정은 있지만 그의 편이 되기에는 모든게 부족했고 또한 좀 더 극적 긴장감이 증폭된 후에...그의 모습이 출연하고 그의 노래를 들었더라면 했는데.. 책에서의 미스테릭하고 신비스럽던 그의 모습은 초반에 너무 일찍 드러나버려 극장에 떠돌던 풍문과 유령에 대한 소문등 신비함에 대한 호기심역시 일찍 사라져버렸다. 주인공은 오페라의 유령이었지만 심정적으론 라울과 크리스틴에게 밀리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그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보며, 어느곳하나 약하지 않는 건장한 체격을 보며 곱상하고 배려심있는 라울에게 시종 손을 들어주고 막판까지 그와 잘되길 바랬다. 마치 악마로부터 공주를 구하러 가는 기사마냥 라울의 구원을 절실히 바랬으며 종반에 그녀가 라울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마지막 선택'을 하는 것을 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사랑은 결코 집착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유령인 그의 사랑은 그녀에게 있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었으며 영혼의 울림이였으나, 그 것은 밝고 신선한 햇살이 아닌, 우울하고 음습한 지하공기처럼 그녀에게 스며든 것이다. 사람들로 부터 버림받은 육신, 그의 일그러질 수 밖에 없었던 영혼.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고통은 결국 그만의 것으로 돌아갔으며, 괴이한 모습으로 극장을 지배했던 그의 인생은 모두를 쏟았던 한 여자의 마음조차 얻을 수 없었음에 무너져내렸다. 초반에 도무지 공감가지 않았던 그의 모습과 노래들이 후반 그의 광기가 서린 연기로 빛이 났으며 다행히 종반엔 그의 불행한 인생에 대해 한숨을 쉬거나 혹은 안타까운 시선을 거둘 수가 없을 지경으로 이르렀다. 그나마 제라르 버틀러(팬텀)가 괜찮았다고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사랑은 광기와 집착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풍이 불면 옷을 여미는 것과 같으며 조금씩 텄던 사랑일지라도 어디론가 숨어버리게 하는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방법이 문제였을까. 역시 불행한 외모란 어쩔 수 없는 장애이며, 지극한 사랑으로 극복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현실적 한계일까. 조금 다른 얘기지만 슈렉을 선택한 드림웍스의 신선함은 발견할 수 없는. 또한 나역시 비참한 그 몰골보다는 라울을 선택하고만 한계이듯이.
묘지로 가는 그 거리 하나마다 옛 시간들을 회고하는 라울. 크리스틴은 행복한 여자다. 모든 시간이 흐른 후에도 라울과 팬텀의 사랑은 여전했으며 미칠듯한 열정과 분노의 시간도 먼지와 세월에 덮혀 아득하고 그리운 추억만을 남기는 것이다. 추억으로 묻히기 이전. 그 모든 것들이 생명을 가지고 있었던 그 순간들. 이 모든 것들이 아직은 생생히 살아있는 그들에 의해, 열광적인 무대와 전율을 일으키는 목소리에 의해,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달된다. 몇천원으로 보기엔 너무나 호사스럽고 강렬한 경험이었다.
'04.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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