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이 슌지 감독의 2004년 신작 '하나와 앨리스'는 원래 인터넷을 통해 상영됐던 45분짜리 단편영화를 바탕으로해서 만들어진 영화다. 따라서 이번에 국내 개봉되는 135분짜리 장편 '하나와 앨리스'는 인터넷 단편영화와 아주 유사하면서도 또한편으로는 거의 완전히 다른 영화라는 인상을 줄 정도로 영화 곳곳에서 많은 차이점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 감상문은 인터넷 원본과 이번 극장개봉작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하고 각각의 매력포인트를 정리해보는 형식으로 써보겠다.
인터넷 단편영화 '하나와 앨리스'는 세편의 짧은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는데 단짝 친구 하나와 앨리스가 우연히 전철역에서 만난 한 남학생을 좋아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코믹하면서도 따뜻하게 그리고 있다. 1부는 하나와 앨리스가 전철역에서 문제의 선배 미야모토를 만나는 에피소드. 2부는 미야모토를 사이에 두고 하나와 앨리스의 관계가 묘하게 변해가는 과정, 3부는 선배를 데리고 해변으로 놀러간 하나와 앨리스의 갈등이 폭발한 뒤 학교축제를 통해 이 갈등이 해소되는 것으로 스토리가 전개돼 간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까 장편이랑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인터넷 단편은 학교선배를 놓고 벌어지는 하나와 앨리스의 대결을 코믹하게 다루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단편영화'라는 형식에 주력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영화의 계절적 배경이 겨울에서 봄, 그리고 가을로 이어지는 가운데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친절한 설명을 배제하고 대강의 스토리 라인만 제시하면서 아름다운 영상미와 조형적인 미장센에 주력, 단편영화로서의 미학적 완성도를 뽐내고 있다. 실제로 완성도가 대단히 높아 보는 이의 입장에서는 영화 스토리 라인이 다소 거친데도 불구하고 별불만없이 만족스럽게 관람할 수 있다.
그러나 장편 '하나와 앨리스'는 이와 다르다. 전혀 다르다. 장편은 단편영화로서의 형식적 혹은 미학적 완성도보다 극영화로서의 완성도에 주력하고 있다. 즉 전후관계가 완벽한 스토리 라인(특히 하나와 앨리스가 경쟁하듯 펼치는 거짓말 퍼레이드!). 입체적인 캐릭터들, 그리고 갈등의 고조와 카타르시스, 극의 종결 등이 더할나위없이 전형적인 형식으로 진행되어 가면서 관객들을 몰입시킨다. 이에따라 단편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이 느꼈던 극중 의문들은 이번 장편에서 모두 해소된다. 인터넷 단편에서 등장하는 비 속에서 춤추는 검은 추리닝 인물의 정체, 해변가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의 비밀, 그리고 하나와 앨리스의 가정배경들, 심지어는 하나의 집앞에 꽃이 그렇게 많은 이유까지 모조리 다 밝혀진다. 이건 보는 이에 따라 선호 여부가 달라질 것 같은데 어쨌든 한편의 극영화로서만 따지고 본다면 장편은 아주 흠잡을데 없이 극의 기본요소들이 완벽하기 때문에 단편을 보면서 어리둥절함을 느꼈던 관객들은 장편을 보면서 적어도 영화 스토리 라인이 이상하다든지 이해가 잘 안된다든지 하는 그런 일은 없다고 보면 되겠다.
또 장편은 단편과 달리 하나가 주인공이 아니라 앨리스가 주인공이다. 인터넷 단편 '하나와 앨리스'는 원래 일본 네슬레의 초콜렛 브랜드 런칭 3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일본 네슬레사는 단편 인터넷 영화를 기획하면서 이와이 슌지에게 자사 모델인 스즈키 안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만들어줄 것을 주문했으며 따라서 단편은 하나와 앨리스가 미야모토 선배를 놓고 사랑싸움을 벌이게 되지만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하나(스즈키 안)이며 최후의 승자도 역시 하나의 몫이다. 장편에서는 달라진다. 인터넷 영화를 본 관객들은 아마 깜짝 놀랄텐데 장편에서는 하나가 아니라 앨리스가 주인공으로 전면 부상한다. 따라서 단편에서는 거의 평면적인 캐릭터이며 하나의 사랑을 방해하는 다소 얄미운 캐릭터로 그려진 앨리스가 장편에서는 굉장히 입체적이고 살아 움직이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변신한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연출력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이 장편에서는 앨리스와 관련된 소소한 장면들이 다수 삽입돼 있다. 물론 단편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장면들이다. 예를들면 앨리스가 이혼한 뒤 따로 사는 아버지와 오랫만에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라든가(한가로와 보이지만 영화의 핵심적인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또는 길거리에서 캐스팅된뒤 오디션을 보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 그리고 여기서 밝히기 곤란한 마지막의 그 엄청난 장면 등등....이 모든 장면들 덕분에 인터넷 단편을 재밌게 본 관객들은 비슷한 장면들이 이어지는 것 같긴 한데 주인공이 바꿔어 버리는 놀라운 영화적 재미를 이 장편을 통해 맛보게 된다.
하지만 장편이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장편은 이와이 슌지의 빼어난 연출력과 관객의 허를 찌르는 기획력, 그리고 주연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기타 이와이 감독의 전매특허인 아름다운 영상미 등이 어우러진 수작임에 분명하지만 문제는 단편 역시 수작이라는 데 있다. 따라서 인터넷 단편을 본 관객 입장에서는 더할나위없이 잘 만들어진 45분짜리 인터넷 영화가 장편영화로 확대제작된 걸 봐야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몇가지 불만사항을 감수해야한다. 우선 첫째로 45분짜리 단편을 2시간이 넘는 장편으로 확대했기 때문에 장편은 단편보다 다소 좀 늘어지는 느낌을 준다. 단편에서 느껴지는 그 조형적이고 미학적인 아름다움도 장편에서는 거의다 사라져 버린다고 보면 된다. 또 하나를 좋아하는 팬들은 단편에서는 피해자로 그려졌던 하나가 장편에서는 오히려 가해자 비슷하게 바뀌는걸 보면서 다소 기분이 상할 수도 있겠다. 장편은 또 원래 하나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앨리스가 주인공인 영화로 탈바꿈 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앨리스 관련 에피소드들을 새로 포함시키고 있는데 이게 오히려 영화의 집중도를 상당히 떨어지게 하고 있다.
이런 모든 불만들에도 불구하고 장편 '하나와 앨리스'는 한동안 '이와이 월드'를 대표해나갈 작품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섬세한 연출로 그려낸 사춘기 소녀들의 발랄한 세계와 그 안에 감추어진 아픔들이 일본영화이면서도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기 때문인데 아마 우리나라 관객들에게도 상당히 어필할 것임이 분명하다. 주연인 스즈키 안과 아오이 유의 깜찍한 연기를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며 특히 앨리스역을 맡았던 아오이 유의 캐릭터 연기가 아주 돋보인다. 불행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나 소극적일 수 밖에 없는 앨리스는 사랑에도 실패하고 오디션에서도 계속 낙방을 해 영화내내 보는 관객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그래서인지 그 아픔들을 조용히 안으로 삼키기만 하던 앨리스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보여주는 그 폭발적인 장면은 정말 감동적이다. 개인적으로는 '빌리 엘리어트'의 클라이막스 장면이후 이 정도로 정서적 충격을 주는 장면은 처음이다...
요즘 일본영화가 하락세라는 말들이 있지만 최근 들어 '하나와 앨리스'를 포함해 내가 본 몇편의 일본영화들은 그런 세간의 평가들을 무색케 하는데 충분했다. 아마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나 '6월의 뱀' 또는 옴니버스 영화 '잼 필름스'같은 작품들을 본 영화팬들은 일본영화의 저력이 여전하다는데 동의하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와이 팬들에게는 이번 11월이 축복의 달임에 틀림없을것 같다. '하나와 앨리스'는 이와이의 신작을 애타게 기다려온 이와이 월드 신도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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