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동안 이어져 왔고,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적시게 해준 영화의 장르라고 하면 아마도 멜로라고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한때 [접속],[편지],[약속] 등으로 이어지면 붐을 일으키기도 했던 우리나라 멜로영화들이 갑작스레 그 힘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요즘 우리나라 영화들의 추세이다. 대신 그 자리를 블록버스터 영화나 코미디, 공포같은 장르가 채워주고 있기에 그보다 자극이 덜한 멜로영화라는 장르는 크게 빛을 보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가운데 쌀쌀한 가을 날씨와 함께 선보이는 [내 머리속의 지우개]라는 멜로 영화 한 편은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과 기대감을 자극하게 해준다. 우선 다소 엉뚱한 제목부터가 시선을 끌고, 무엇보다 손예진과 정우성이라는 두 배우의 이름 때문에 기대를 가지게 될 것이다. 매번 뻔한 전개와 스토리로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려는 의도하에 만들어지는 멜로영화들 이기에 [내 머리속의 지우개]라는 영화 역시 그저그런 멜로영화 정도로만 생각하게 되겠지만 처음으로 연기호흡을 맞추는, 그것도 멜로라는 다소 낯뜨거운 장르로 호흡을 맞추는 두 배우의 연기와 뮤지비디오 연출자이자 유학파 감독인 이재한 감독의 연출력에 내심 기대를 가질 수 밖에 없도록 해주는 것이다.
유부남을 사랑했던 수진은 그 아픔을 달래며 편의점에서 콜라를 산다. 평소 건망증이 심한 수진은 그 콜라를 놓고 나와버리고, 다시 찾으러 간 편의점에서 콜라를 사들고 나오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 콜라를 아무 생각없이 따서 마셔버리는 수진, 그리고 그녀의 트름. 이게 바로 수진과 철수라는 남자의 첫 만남이다.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는 그야말로 두 남녀 주인공의 만남과 사랑, 아픔이 담긴 멜로영화이다. 우리가 이런 장르적 특징들을 하나하나 느껴갈때쯤 찾아오는 식상함과 진부함이 이 영화라고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 머리속의 지우개]는 그런 식상함과 진부함을 느끼게 될 틈마다 제목만큼이나 엉뚱하고 재치있는 이야기와 대사들로써 관객들의 실소를 자극하며 그 속에서 느껴지는 지루함을 덜어주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콜라와 트름으로 엮인 수진과 철수의 첫 만남부터 문 한짝이 떨어진 차를 타고 보기만해도 우스운 데이트를 하게 되고, 수진의 건망증으로 겪게되는 둘의 에피소드들까지 [내 머리속의 지우개]에서 그려지는 멜로는 특별할것도, 그렇다고 무미건조하고 밋밋하지만도 않은 이야기들로 관객들에게 예쁘장한 사랑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발랄하고 예쁜 수진과 다혈질의 삭막해 보이지만 부드러운 남자 철수가 보여주는 아기자기하면서도 잔잔한 사랑이야기들은 그 속에서 톡톡 튀는 엉뚱함과 재치들로써 여느 멜로영화들이 주는 유치함과 진부함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코믹한 정신과 의사나 괴팍한 목수 할아버지, 푼수같은 수진의 친구와 다소 당황스러운 철수의 엄마 같은 개성 있는 캐릭터들 역시 [내 머리속의 지우개]가 멜로영화로서 지닌 이색적인 느낌들을 전해준다. 바로 이렇게 뻔하고 유치해보이지만 결코 거기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 노력, 그것이 바로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가 가진 멜로영화로서의 가장 큰 매력이다.
첫 만남부터 심상치많았던 수진과 철수는 또 한번 심상치않은 사건을 계기로 결혼까지 하게 된다. 안정되고, 단란한 신혼생활을 만끽하고 있을때, 찾아 온 뜻밖의 불청객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아내 수진이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 가장 최근 기억부터, 즉 가장 사랑하고, 가장 아끼는 남편 철수와의 기억들이 하나둘씩 지워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내 머리속의 지우개]는 멜로영화로서의 매력과 함계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앞서서 수진과 철수의 배 아플 정도로 예쁜 사랑의 모습을 보았던 관객들은 뒤이어 찾아온 그들의 아픔에 함께 가슴을 메이게 되는 것이다. 수진은 간단한 건망증을 넘어서서 집을 잃기도 하고, 잠깐씩 엉뚱한 행동을 하는가 하면, 심지어 철수를 바라보며 옛 남자의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수진을 바라보며 울음을 억누른 채, 그저 대답만 해주는 철수의 모습은 보는이들 조차도 안타깝다. 바로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는 "알츠하이머 병"이란 낯선병을 소재로 하면서도 기억의 소중함과 사랑에 있어 기억이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는가라는 보편적이고 단순한 이야기로써 관객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해준다. 또한 그 이야기 전개와 방법에 있어서도 이재한 감독의 연출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것은 멜로영화이기에 보여줄 수 밖에 없는 다소 급작스럽고 억지스러운 후반의 리얼리티 부족이 [내 머리속의 지우개]에서도 그대로 엿보인다는 것이다. 자신의 병을 알고부터 힘겨워 하는 수진과 그 곁에서 바라보기에 더 힘겨운 철수의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렇지만 옛 남자와의 재회나 갑작스럽게 변해가는 수진의 모습은 처음부터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던 관객들에게는 당황스러울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빼놓 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예쁜 화면과 개성있는 음악, 그리고 아기자기 하면서도 멜로적인 소품들이 그것이다. 어떤 멜로영화든지 음악과 화면은 그 영화의 백미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 역시 멜로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시가적, 청각적 즐거움을 마음껏 내보여주면서 관객들을 그 속으로 빠져들게 해준다. 전국의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연출해낸 환하고 깨끗한 배경이나, 예쁘고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꾸며진 철수와 수진의 집 등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부러움마저 사게한다. 또한 향수를 자극하게 하는 뽀얀 화면과 전원을 배경으로 한 영화 속 장소들은 멜로영화가 주는 안정적이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주는데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마치 유럽풍의 느낌을 풍기는 영화음악들도 놓칠 수 없는 요소이다. 아마도 영화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다소 의아함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멜로영화라 하면 흔히 듣게되는 감미로운 팝송이나 잔잔한 발라드풍의 음악과는 달리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영화음악은 앞서 말했듯이 [내 머리속의 지우개]가 멜로영화로써 가지게되는 식상함을 덜어줌으로써 색다른 느낌의 멜로영화로 만들어 준다. 특히, 휘성,거미,빅마마 등 가창력으로 인정 받은 우리나라 가수들이 참여한 OST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은만큼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가 들려주는 로맨틱하면서도 가슴을 찡하게 만들어주는 음악들이 영화를 보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자, 매력인 것이다.
멜로영화라 하면 관객들에게 가장 큰 호기심과 기대감을 가지게 하는 요소는 그 어떤 것보다 가슴 아픈 사랑을 연기하게 될 두 남녀 주인공일 것이다. 멜로영화 속 캐릭터 역시 그 스토리처럼 전형적인 인물이 대부분이다. [내 머리속의 지우개]역시 수진과 철수라는 이름들처럼 전형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의 캐릭터이다. 의류회사를 다니며 화목한 가정의 첫째딸인 수진은 발랄하고, 예쁘면서도 항상 건망증으로 엉뚱한 행동을 일삼곤 한다. 그리고 병으로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어가는 여자를 바라보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 철수는 듬직하면서도 자상한 그런 남자이다. 얼핏보면 어울리지 않는 두 캐릭터이지만 영화에서 그려진 이 둘의 사랑은 때론 웃음으로, 때론 눈물로 채워주면서 관객들을 자극한다. 그리고 이런 캐릭터를 연기하는 정우성과 손예진 역시 자연스러운 커플연기로써 관객들에게 웃음과 눈물을 전달한다. 우선 아픈 아내를 눈물 맺힌 눈으로 바라보는 남편을 연기하는 정우성의 멜로연기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지금껏 보여준 남성적이고, 고독과 강렬함으로 가득찬, 그리고 다소 무게잡힌 눈빛연기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정우성의 부드러운 멜로연기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유발시킬 것이다. 비슷한 캐릭터를 연기했던 박해일이나 이정재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가슴 찡한 눈물과 감정연기를 보여주는 정우성은 철수라는 인물로 기존의 이미지를 살리면서도 그 속에 부드러움을 겸비한 색다른 캐릭터를 보여준다. 그리고 드라마나 영화들로 멜로적인 이미지의 대표적인 여배우로 알려진 손예진 역시 기대만큼의 연기를 보여주며 정우성과 함께 가슴 한구석을 적셔주는 수진이라는 캐릭터를 예쁘게 표현해준다. 전혀 다른 느낌의 두 배우가 만들어내는 멜로연기는 영화 속 포근한 화면과 차분한 전개 속에서 매우 사랑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과 풍성한 볼거리로 치장된 블록버스터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공포영화나 단순한 즐거움을 주는 코미디 영화가 대부분인 요즘 가을이란 계절을 실감하게 해줄만한 가슴 찡하고 잔잔한 멜로영화를 기다리는 관객들도 있을 것이다.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는 그런 관객들에겐 너무도 기다려지는, 그리고 항상 같은 장르의 영화들에 지루해져 버린 관객들에겐 괜한 호기심을 가지게 하는 영화이다. 뮤직비디오 연출가이자 [컷 런스 딥]이라는 사회성 짙은 영화 한편으로 데뷔한 이재한 감독의 멜로영화라는 점과 상반된 이미지로 부드러운 멜로연기를 보여줄 정우성과 손예진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연기는 영화를 그 어떤 요소들보다 그들만의 매력으로 가득 메워준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요소들로 눈물 흘리게 하면서도 여러가지 이색적인 요소들까지 가미하여 얼굴에 미소를 채워주기도 하는 슬프지만 기분 좋은 멜로영화가 바로 [내 머리속의 지우개]이다.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는 기억할 수 있기에 소중한 사랑, 그리고 사랑하기에 잊혀져가는 기억을 붙잡고 싶어하는 그 마음을 바라보며 쌀쌀한 가을 날씨에 따스한 눈물을 느끼게 해 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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