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killdr
|
2000-12-30 오후 3:39:46 |
1011 |
[5] |
|
|
에니메이션하면 떠오르는 것이 '디즈니'와 '일본'이다. 뮤지컬과 같은 전개와 고전의 에니메이션화, 탄탄한 시나리오로 무장한 디즈니는 분명 에니메이션 왕국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는 또 다르게, 전 세계의 만화와 에니메이션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일본의 에니메이션은, 공식적으로 수입될 수 없었던 시절부터 이미 볼 사람은 다 본 에니메이션 시장의 제왕이다. 이렇게 세계 에니메이션을 양분하고 있는 이 두 제국틈에서 만들어지는 에니메이션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 대답을 주는 것이 말하고 싶은 에니메이션 "키리쿠와 마녀 (Kirikou Et La Sorciere) - 1998"이다. 나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보고 싶다. 내가 이야기할 것들이 많은 분들의 공감을 얻을지 모르겠지만,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이 에니메이션의 가치를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 에니메이션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뭘까? 사람은 원래 선하다는 성선설? 아니면, 항상 정의가 이긴다는 그런 이야기? 아니면, 소년이 진정한 어른이 되어가는 성장 영화를 본딴 에니메이션? 난 그런것보다는, 조금 다른 의미로 이 에니메이션을 이야기하고 싶다.
먼저, 왜 키리쿠는 태어나기 전부터 말을 하고, 태어나서 탯줄까지도 자신이 자르고, 악한일만 하는 카르바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끊임없이 찾는 것일까? 정의, 성선설, 그런 이야기보다는 다른 관점에서 보자.
이 에니메이션에 서양 사람들의 동양, 혹은 비 서양의 문명이나 문화에 대한 근원적인 동경이 깊은 곳에 숨어있다고 하면 심한 말일까? 이 에니메이션의 배경은, 아마도 아프리카 어디일 것이다. 그곳에 사는 부족에서 태어난 키리쿠의 이야기이다. 유럽에서 만들었는데, 왜 배경은 아프리카, 그것도 흑인이 주인공이고, 에니메이션으로는 드물게 가슴을 드러낸 여성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만들었을까? 거기에 마법사가 나오며, 주인공의 할아버지는 이집트풍의 옷을 입고 있다. 키리쿠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엄마 배속에서 말을 하면서 태어났다. 탯줄도 자기가 끊고, 태어나자 마자 말을 한다. 그리고 뛰어다닌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그리고, 아주 지혜롭다. 마법사의 함정도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다 알아내고 마을의 아이들까지 구해낸다.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 여기에 나오는 키리쿠는 난, 서양 문화의 상징으로 보고 싶다. 즉, 키리쿠라는 태어나면서부터 똑똑하고 힘도 있는, 지금의 '서양'을 대표한다고 보고 싶다. 반면에 악하고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으며, 나중에 거짓으로 드러나지만,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마법사 카라바는 아프리카 혹은 동양을 상징한다고 보고 싶다. 카라바, 즉 동양이라는 두려움에 대한 투쟁과 그 승리가 카라바의 부족 사람으로의 인정이다. 즉, 마을 사람들이 동양을 용서하고 받아들인다는 설정이 된다.
또 하나, 샘이 마른 마을을 구하고, 마법사의 고통을 해결해주고는, 키스 한번 하고 나더니, 태어난지 불과 몇일만에, 세상에서 제일 작은 아이에서 키크고 잘생긴 어른이 되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마법사 카라바에게 청혼을 하는 아이. 왜 그런 황당한 결론을 보여주는 것일까? 왜 갑자기 키리코는 카르바에게 청혼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렇게 보면 어떨까? 서양을 상징하는 아이 키리코(세계 4대 문명은, 불행히도 유럽대륙이나 아메리카에는 없다)는 동양 혹은 비서양을 상징하는 카르바를 지혜로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물리쳐 보통의 사람으로 돌아오게 한다. 그리고 단지 한순간의 '입술박치기'로 어른이 되어버린다. 그것도 아주 잘생기고 멋있고 키큰. 즉, 서양은 동양을 정복하고, 그 긴 역사에 담긴 모든것을 짧은 시간에 정복하고 빼앗아 더 큰 무엇을 이룩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면 어떨까?
키르코의 어머니는 마치 삶을 달관한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키스 한번으로 어른이 된 키리코의 얼굴을, 눈을 감은채 만져보고 그 사람이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본다.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 동양은, 서양이 아무리 겉모습을 바꾸어도, 그 깊이 내재되어있는 진실, 즉, 그 근원이 언제나 자신의 핏줄이라는 것을 알아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보면, 이집트풍의 옷과 수염을 한, 모르는 것이 없는 키르코의 할아버지의 존재, 마법사 카르바가 마을 사람들과 절대로 만나지 못하게 막는 인물. 그 전지전능한 할아버지의 존재는 서양인들이 막연히 두려워하는, 우리 동양 힘의 근원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보면, 이 에니메이션을 만든 사람들은, 서양의 성장과 발전에 동양이라는 존재의 보이지 않는 힘을 인정한 것이 아닐까?
마법을 가진 카르바는 그 중간자적 입장에 있는 사람이다. 카르바는 남자들에 의해 등에 독가시가 박힌 고통을 받고 대신 마법을 얻는다. 그 마법사는 서양에서도 혹은 동양에서도 모두 인정받지 못하는 제 삼자가 되어, 둘 사이에서 이익을 취하고, 서양이(부족) 동양(할아버지)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결국 서양의 상징 키리코에게 넘어가게 된다. 서양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도 하고. 그렇게 보면, 이것은 고대 문명은 모두 동양에서 일어났지만, 그것을 전수받은 서양이 그것을 발전시키고 성장시킨 세계사와 많이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뭐, 이런식으로 영화를 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3국의 공동제작한 이 에니메이션은 우리에게 익숙한 어느 에니메이션과는 다르다. 지금 개봉예정인 디지니의 에니메이션 "쿠스코? 쿠스코!" 나 일본 에니메이션의 전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와 차별되는 점이 분명하다.
에니메이션의 기본인 그래픽, 혹은 영상을 보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보이는 그런 섬세하고 미세한 묘사는 이 에니메이션에서는 없다. 어쩌면, 끊어지는 듯한 동작을 보여주는 등장 인물들...3D와 같은 느낌의 컴퓨터 그래픽, 실사 영화 버금가는 동작을 보여주는 다른 디즈니나 일본 에니메이션보다 그래픽이 떨어지는 느낌을 지울수 없다. 물론, 이런 단점들은, 등장 인물들의 캐릭터나 전달하려는 주제와 일치해서 자연스럽게 넘어가지만, 분명 자연스러운 동작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에니메이션은 약 80분정도의 짧은 시간에 등장인물의 캐릭터에 맞는 에니메이션, 에니메이션이 보여줄 수 있는 즐거운 상상력, 웃음을 모두 안겨주었다.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느낌을 주는 장르의 영화를 보았다고 하면 될까? 그 익숙하지 않음에도 즐거울 수 있는, 일본과 디즈니의 에니메이션과는 다른 즐거움을 주는 에니메이션이었다. 최소한, 이런 에니메이션도 있구나 하고 볼만한 것 같다.
이런 특징이 있는 에니메이션이 되어야, 디즈니와 일본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
|
|
1
|
|
|
|
|
키리쿠와 마녀(1998, Kirikou et la sorciere)
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