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류인생> - 영화를 보기 전에 느꼈던 거장들의 무게감, 영화를 본 후 그 무게감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보기 힘들다.
1992년 영화 <서편제>로 흥행과 평단 모두에 합격점을 받으며, 최초 또는 최고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니던 임권택 감독. 그는 2000년 <춘향뎐>으로 칸을 노크하더니, 이윽고 2002년에는 <취화선>이란 영화로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올린다. 이로써 한국 영화사에 임권택 감독은 자신의 이름 석자를 확실하게 새겨 넣으며, 당당하게 '거장'이라는 칭호를 수여 받게 된다. 그리고 2004년 그 거장이 선택한 99번째 영화 <하류인생>. 영화의 뚜껑을 열지 않더라도, 일련의 그의 행적을 볼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무게감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하겠는가.
하지만 <하류인생>의 무게감은 여기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20년간 임권택 감독과 같이해온 정일성 촬영감독과 이태원 제작자가 <하류인생>의 무게감에 큰 힘을 실어주고 있다. 더욱이 음악계의 거장인 신중현아 참여하면서 그 무게감은 날개를 달게 되었다. 이와 같이 쉽사리 넘보지 못하는 이들의 존재 가치 덕분에 <하류인생>은 제작 당시부터 많은 관심과 기대를 한 몸에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만남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웃지 말아야 할 곳조차 터져 나오는 주변의 웃음소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처럼 <하류인생>이 가졌던 무게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거장에 대한 실망감만 가득 남긴 영화가 되어 버렸다.
영화의 잘못된 시작은 하류답지 못한 하류인생에서 기인한다. 영화는 50년대 말 자유당 정권 말기부터 70년대 박정희 정권까지 한 인물(최태웅 : 조승우)을 통해 하류인생을 보여주고자 한다. 하지만 그렇게도 노련한 이들이 왜 진정한 하류인생을 보여주기를 실패했을까 의문이 든다. 그들의 연륜으로 보았을 때, 진정한 하류인생이 무엇인지 몰랐을 리는 만무한데 말이다. 영화에 한 마디 대사처럼 건달이 하류인생이라는 등식 하나만으로 하류인생을 설명하려는 모양새가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하류인생>에서 보여준 하류인생은 태웅이 영화 제작 일을 하면서 보여준 아주 짧은 시간이 전부였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후반부를 지날수록 태웅은 하류인생이 아닌 하류인생을 도와주기까지 하는 상류의 삶을 살아간다. 그렇게 으리으리한 집에서 살아가는 하류인생이 우리 나라에 있었는지 너무나 궁금하다.
영화가 분명 코믹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웃음이 나왔던 이유. 앞 뒤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이들의 대화와 행동이 아닐까 싶다. 태웅은 계속해서 껄렁껄렁한 말투와 행동을 일관하는데, 어찌도 모든 상황을 똑같이 일관하려는지 그의 노력이 가상할 뿐이다. 특히 태웅의 아내인 박혜옥(김민선)과의 관계에서 많이 등장한다. 가장 볼만한 것은 태웅과 혜옥이 심각한 상태에서 거의 반강제적인 섹스를 하고 나서(물론 베드신이 보이진 않지만 대한민국 성인남녀라면 그 상황을 충분히 이해함) 언제 그랬냐는 듯이 너무나도 친숙해지는 모습이다. 이는 관객을 우롱하고, 더 나아가 여자하곤 섹스만 잘하면 만사 오케이라는 식의 표현도 서슴지 않는 대범함을 선사한다. 혜옥의 인물을 보면 그 당시 상당한 인텔리 계층이면서, 신여성을 표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남편에 굴복하고 복종하는 고루한 여성상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하류인생>이 더욱더 많이 놓쳐버린 것은 주변인물에 대한 배려이다. 태웅이 자식을 낳고 어머니를 찾아가는 모습. 화해의 분위기를 물씬 풍겨주지만, 태웅이 그렇게 잘 나갈 때조차 부모님에 대한 언급이나 등장은 전혀 없다. 또한 태웅이 조직활동을 할 때부터 같이 지내왔던 오상필(김학준)에 대한 점이다. 상필은 태웅과 더불어 영화를 이끌어 가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후반부에 그의 존재는 없어지고 만다. 태웅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과 방향에 가장 영향을 주었던 인물을 갑자기 없애버린 이유를 짐작하기 힘들다.
<하류인생>에서 그나마 눈 여겨 볼 만한 점은 각 인물들의 내면적인 변화이다. 태웅이란 인물의 전체적인 모습에서 하류인생을 발견하는 것이 아닌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의 내면적인 변화 속에서 하류인생을 찾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았나 싶다. 혜옥의 동생인 박승문(유하준)을 볼 때, 당시 사회의 부조리에 항거하는 그의 행동에서 점차적으로 현실적으로 타락하는 정신적인 모습은 정말 하류로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혜옥을 통해 들려주는 정치권과 깡패를 논하는 승문의 독백과 태웅과 일을 하면서 돈과 권력에 집착하는 대조적인 모습은 점차적으로 황폐화되는 내면을 볼 수 있다. <하류인생>에서 점차적으로 하류 인생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는 승문이 유일하다. 적어도 내면적인 모습에서 말이다.
거장의 혼이 들어간 <하류인생>. 그 거장들의 혼은 어디로 가는지 아쉬움을 달랠 길이 없다.
http://cafe.daum.net/movieandcitize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