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 있자...내가 아홉살 때... 정확히 십년 전이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지극히 어린이다운, 아무런 근심없는 생활을 보냈었다. 학교에선 친구들과 명랑하게 어울렸고, 집으로 와선 피아노 학원을 다님과 더불어 거의 매일마다 비디오 가게를 들락날락거리면서 영화 만화 할 거 없이 닥치는 대로 비디오를 빌려 보았었다. 집에선 지극히 응석받이였고, 밖에서도 다른 아이들보다 유난히 성숙했다기 보다는 그저 다른 아이들처럼 항상 천진난만(?)했던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 지금부터 이야기할 영화 <아홉살 인생>을 보고 난 후, 문득 난 '저 시절에 난 무얼 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천진난만하다기엔 너무나 많은 걸 깨달은 듯한 아이들의 인생 이야기를 보면서 저 아이들과 똑같은 아홉살 무렵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즐겁게' 지냈던 내 모습이 새삼 부끄럽게 느껴진 까닭이다. 손바닥만한 방안에서 너댓 식구와 서로 부대끼며 잠을 청하고, 낮고 초라한 나무 책상과 의자에 앉아 도란도란 추억을 만들어 가면서, 세상을 배워가고 사랑을 배워가고 친구를 배워가던 아이들에 비해, 난 너무 편하게 살았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1970년대 경상도의 한 시골 마을.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앞엔 고물을 수집하는 대신에 강냉이를 주는 아저씨가 있고, 집집마다 쌓인 똥을 푸는 아저씨가 있고, 손수 물을 길어다 집집마다 나르는 아저씨가 있다. 그 마을에 부지런한 아버지와 인자한 어머니, 천진한 여동생과 함께 백여민(김석)이라는 아이가 있다. 학교에서 5학년들도 무서워한다는 이른바 '싸움대장'이고, 5학년인 '제비'와 일종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친구들로는 순진한 남장아이 신기종(김명재)과 까탈스러운 여자아이 오금복(나아현)이 있다. 이들이 똑같이 일기를 베껴와(그것도 틀린 날씨로) 선생님한테 야단을 맞고 복도에서 벌을 서고 있던 중, 서울에서 전학 온 새침한 여자아이 장우림(이세영)이 그들 옆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걸 목격하면서 본격적인 사건은 시작된다. 자신의 모든 소지품을 미제라고 자랑하는 깍쟁이 스타일의 우림이와 그녀에 대한 연정의 마음을 키워가는 여민이와 그런 우림이의 모습 하나하나가 마음에 안드는 질투쟁이 금복이의 사랑싸움이 영화의 하나의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이번 영화를 보면서, 최근 나온 한국영화 중에 아역배우들의 연기가 이렇게 빛을 발한 영화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에서 아역배우들의 이런 '연기같지 않은 연기'가 없었더라면 이 영화의 탄생은 100%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만큼 이 영화에서 아역배우들의 연기는 영화의 심장과 같은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솔직히 이 영화에 나온 아역배우들 중에 그래도 낯익은 배우는 장우림 역의 이세영 양(<대장금>에서 어린 금영이로 나왔었던) 밖에 없었는데, 영화를 보고 난뒤 나오는 아역배우 한명 한명이 그야말로 '발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백여민 역의 김석 군. <선생 김봉두>에도 나왔었다는데 기억이 안난다.^^;; 이 배우는 외모부터가 참 귀여울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품어나오는 영화속 '싸움대장' 이미지에 걸맞는 카리스마가 만만치 않다. 우림이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고 있으면서도 막상 함께 있을 때에는 무뚝뚝한 태도를 일관하는 그의 모습은 여느 성인 연기자의 사랑 연기와 크게 다를 게 없을 만큼 리얼했다. 그와 더불어 어머니의 썬글라스를 사다드리기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모습과 '폭력'교사로부터 진짜 '한바탕' 얻어맞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저것은 아역배우가 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연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우림 역의 이세영 양 또한 이 영화에서 상당한 연기를 선보여주었다. 그저 서울에서 전학 온 잘난척 하는 여자 아이 수준이 아닌, 남자의 마음을 적당히 끌어당겼다가 놓을 줄 아는, '사랑을 좀 아는듯한' 아이의 연기를 선보여 한편으로는 얄미우면서도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그리고 오금복 역의 나아현 양. 이 배우의 연기는 그야말로 '발군'이다. 아역배우들 중에서 이렇게 질투에 눈이 멀고, 혼자 하는 사랑에 서럽게 눈물 흘리는 캐릭터를 훌륭히 만들어낸 배우는 일찍이 없었던 듯하다. 여민이를 남몰래 좋아하는 마음을 숨긴 채 우림이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싸우다가 결국엔 서럽게 통곡하는 모습에선 '저것이 진짜 사랑에 중독된 여자의 모습이구나(?)'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항상 우림이한테 밀리고, 여민이를 뒤에서만 바라봐야 하는 금복이의 모습을 함께 생각하니 그녀의 불타오르는 질투심이 얄밉다기보다는 오히려 동정심이 더 많이 가기도 했다. 신기종 역의 김명재 군 또한 이에 못지 않게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항상 여민이 옆에서 순박한 모습을 따라주는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또 싸우는 모습을 보고는 갑작스럽게 욕을 내뱉으며 신경질을 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외에도 제비, 고릴라, 칠순이를 비롯한 많은 아역배우들의 연기는 시종일관 웃음을 자아내는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이 영화는 한마디로 전적으로 '아이들에 기댄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아이들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시종일관 '순수하고 따뜻했던 지난날'만을 부각시키는 '착한 영화'도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어떤 영화보다는 아홉살 그 시절의 모습을 아무런 가감없이 보여주었기에 착한 영화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천진난만하고 순박한 시골 아이들의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게, 싸움 좀 하는 아이들은 수시로 욕을 내뱉고, 반장이라고 하는 아이는 사랑을 위해 라이벌을 궁지에 몰아넣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질투에 쉽게 눈이 멀기도 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끌기 위해 일부러 내숭으로 한발짝 물러서기도 한다. 누구는 이런 모습을 '아이들같지 않다'라고 할 지 모르지만, 이것이 진짜 아이들의 모습이다. 아이들이 언제까지나 순수하고 깜찍한 모습만을 간직하길 바랐던가. 더구나 급속한 경제 발달로 겉모습은 발전의 연속이었지만 서민들은 죽어났던 1970년대 즈음은 어떤가. 거친 시간의 풍파 속에서 천진난만하던 아이들도 세상의 많은 이치를 깨달아가며 '반 어른'으로 자라나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이 영화는 순수함만을 부각시키지는 않은, 그야말로 아홉살들의 인생 그자체를 차분하면서도 애정을 갖고 보여주었다.
또 하나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점은, 아이들의 성장기 너머로 그들의 힘들었던 현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한창 경제계획으로 나라가 바쁠 무렵 이 어린 아이들도 마냥 명랑하게 자라날 처지는 아니었다. 가난이 더해가는 형편을 놓고 고민도 많이 해야 했고, 현실에 염증을 느끼는 이웃들과 부대끼면서 현실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갔다. 이러한 현실이 이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 공장에서 일을 하다 화학약품이 눈에 튀어 백태가 생겼고, 옆집에 사는 일명 '골방 철학자'라는 청년은 골방에만 틀어박혀 사색에 잠기면서도 피아노집 여인을 향한 마음을 한시도 꺾지 못한다. 여민이 주위에 있는 이러한 모습이 결국은 여민이의 삶과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흉한 눈때문에 친구들로부터 놀림받는 어머니를 위해 썬글라스를 사주려고 똥 푸는 걸 세고, 아이스케키를 팔고, 골방 철학자 아저씨의 편지를 전해주는 우체부 역할을 대신하면서 사랑과 이별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게 실제 이 시절 아홉살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어린 아이의 삶이지만 세상과 부딪치며 점차 성숙해 가는 이러한 모습이.
솔직히 말해, 난 여러모로 유명한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었다. 그래서 감히 원작소설과 이 영화가 뭐가 다른지, 소설이 어떻게 영상으로 구현되었는지 비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설사 내가 원작을 봤다고 해도, 이 영화는 그저 원작과 비교해서 '이게 잘 됐고 이게 떨어진다'고 평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영화이다. 이 영화는 그저 원작을 영화화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 시절 고달펐지만 아름다웠던 유년시절을 훌륭하게 그려내었기 때문이다. 그 점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다. 골방 철학자가 죽기 전에 남긴 말, '이별이 슬픈 이유는 무언가 해 주고 싶어도, 더 이상 해 줄 수가 없기 때문이란다.' 어린 아이가 듣기엔 너무 조숙한 말이 아닌가 싶지만, 이런 말을 들으면서 여민이는 세상을 배워가고 내일의 삶으로 한발짝 씩 다가간다. 이 아이가 가는 길이 그저 나비가 날고 향기 그윽한 꽃들만 가득한 길이었다면 진정 삶의 가치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향기로운 꽃길 만이 있는 건 아니었기에, 더욱 더 훌쩍 자란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의 유년 시절은 이렇지 못했다는 게 지금 와서 새삼 후회될 뿐이다. 이제 두번째로 맞는 아홉수. 그래도 10년전보단 생각이 많아졌다. 그래도 여민이처럼 많은 걸 깨닫진 못한 거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