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보하고, 또 양보해서 <양들의 침묵>에 대한 기억을 싹 지우고 <한니발>을 본다고 해도 참 지루한 영화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자신의 <에일리언>이 개성있는 감독들에 의해 결코 쳐지지 않는 -최소한 재미는 있는- 속편 들로 뻗어나갔다는 점을 모를리가 없을텐데, 이 백전노장에게도 첫 속편 작업이 란 무리한 임무였을까?
조디 포스터가 출연을 마다한 건 당연한 당연한 선택이었다. <양들의 침묵> 은 분명 '한니발'만을 위한 영화는 아니었다. 렉터 박사와 스탈링요원이 이 야기의 중심부에 공평하게 위치해 있었고 렉터 박사의 강렬한 카리스마 만 큼이나 스탈링 요원이라는 캐릭터도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한니발>은 제목 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렉터 박사에 관한 영화다. 스탈링 요원은 렉터 박사 의 도움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전편에 비해 얼핏 보다 활동적으로 보이지만 영화 전체로 놓고 보면 조연에 불과하다. 능동적인 여성상의 대표주자인 조 디 포스터가 이렇게 영화 속에서 보조역할 정도로 등장하는걸 원치 않았을 것이다.
줄리안 무어로서는 좋은 선택이었다. 인디 영화 진영에서 이미 꽤 인정을 받은 그녀가 <잃어버린 세계>에 이어 이런 큰 규모의 영화에 이만한 역할로 출연해 호연했다는건 차기작을 선택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스탈링 요원만 매력을 잃은게 아니다. <양들의 침묵>에서 렉터 박사의 특징 은 영화 내내 '갇혀 있다'는 점이다. 폐소공포증이라도 느낄 법한 꽉 막힌 작은 공간속에서 섬뜩한 공포를 뿜어내던 그가 이번엔 영화시작부터 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 렉터 박사의 이런 자유로운 활동은 아무리 그가 연쇄살인 마라는걸 관객모두가 알고 있다고 해도 흥미를 저하시킨다. 나중에 복수의 칼을 갈던 메이슨(게리 올드먼)에게 잡히기는 하지만 여기서 또 한번 감점 요소가 보인다. 희대의 살인마 한니발이 사지가 묶인 채 돼지밥이 될 처지 에 놓인 모습에 동정심이 느껴진다는 거다. 여기서부터 그는 더이상 악당이 아니다. 구출되어야 할 '우리편'으로 변한 것이다. 영화에서 그가 죽이는 대상 또한 타락한 경찰, 명문가의 재산가, 부패한 정치인 등 '죽어도 싼'인 물들이어서 살인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어떻게' 죽이느냐에 대한 자세한 묘사로 악마적 매력을 극대화 시키기는 했지만 전 작에서 감옥밖의 스탈링을 응시하던 그런 섬뜩함은 찾을 수 없었다.
이렇듯 메인 캐릭터가 힘을 잃다 보니 게리 올드먼, 레이 리요타 등의 조연 들이 아무리 분발한다해도 영화는 꽤 심심하게 진행되어 간다. 특히 파찌반 장이 렉터 박사의 정체를 눈치채고 추적하다가 결국 죽기까지의 부분에 너 무 많은 시간을 들인 것 같다.
결과적으로 전작보다 못한 건 물론이거니와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스릴러 영화로서 <카피 캣>이나 <키스 더 걸> 정도 만도 못한 영화가 되버렸다. 마 자막 '식사 장면' 때문에 하드 고어 로서의 값어치 정도는 있다고 해야 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