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이 영화는,
1.失'me'島였다. '국가 권력' 및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라는 [개념]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며 또한 그 영향력이 물리적으로 발현되는 실체이다.
한편, 숙명이나 운명처럼 초자연적인 환경앞에서 발가벗고 서있는 개인(individual)앞에 그러한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고 있는 세력이, 절대적 명령(order)이나 혹은 반드시 달성해야 할 임무(mission)의 모습으로 어느 날 불쑥 방문하여 거래를 하자고 제의한다.
정상적인 거래라면, 쌍방이 거래조건을 충분히 검토하고 이해한 뒤 지극히 자발적으로 그 거래를 동의하고 수락함으로써 효력이 발휘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이나 숙명이 너무나 가혹하게 자신에게 등을 돌려버린 개인이 있다면, 불공평한 거래에 덥썩 손을 내밀어 버린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그 거래는 지푸라기와도 같은 구원으로 보이겠지만, 기실은 그것은 저쪽 거래 대상자의 미끼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고 말이다.
그것은 마치 등뒤에 큰 사과를 감추고, 손 앞으로 내민 작은 사과를 공평하게 나눠 먹자고 하는 것과 다름없이 불공평한 일이다. 더구나, 공평하게 나눴다고 생각하여 받아먹은 사과에 독이 발려있다면, 그것은 극악무도한 일이 되는 것이다.
왜 독이 발린 사과조각을 선택했을까하는 후회도 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손 앞으로 내민 작은 사과는 어차피 독사과였으며, 개인이 먼저 먹어야 하는 것이 거래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거래를 제안한 보이지 않는 실체가 거래의 조건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고, 그 세력의 관심은 등뒤에 숨겨놓은 큰 사과였기 때문이다.
거래의 내용은 간단하다. 개인이 자기자신(我,me)을 버리고 명령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개인이 처해 있는 가혹한 상황에서 구원하겠다는 것이다.
[失me하겠느냐? 그럼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
계약이 불공평했고 기만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구원의 약속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거래에 응했던 개인들은 그래서 그렇게 기를 쓰고 피를 흘려가며, 자신의 이름(존재)를 버스 여기저기에 쓰게 된 것이다.
거래를 무효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구원은, 자신들의 이름이 국립묘지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실은 잃었던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었고, 뒤늦게 그걸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본 이 영화는, 2.失'美'島였다.
그렇다면, 국가 권력이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항상 그런 거래를 개인에게 강요하는 악한 것이란 말일까?
이 영화가 반국가적인가 아닌가에 대한 찬반이 엇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서 말했듯이, 초자연적인 환경(운명,숙명 혹은 그러한 어떤 것)을 온몸으로 받아내기에 한 개인은 너무나 무력하고 힘이 없다. 다시 말하지만, 발가벗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개인이 의지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것이 '이데올로기' 혹은 '국가'와 같은 방어막이다.
그것은 마치 갓 태어난 어린아이에게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이다. 우리가 위험에 처하고 곤경에 처하여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우리를 보호해주고 우리에게 갈 길을 밝히 보여주는 존재로서의 국가, 혹은 이데올로기는 원론적으로 매우 '아름다운'(美)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국가를 가리켜 "내 어머니의 나라(조국,祖國)"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국이 나를 버린 것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내팽개친 것이다.
본래 아름다와야 할 두 대상의 관계가,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더러워졌고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면서 그 아름다움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찢어진 어머니의 사진을 누덕누덕 붙여 전해주는 장면은 이러한 배경을 전제로 이해해야 한다.
잃어버린 아름다움에 대한 회복이라는 주제를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표현하려 했다.
그럼에도 내가 본 이 영화는, 3.아쉬움이 많이 남는 영화다.
관객 1,000만명을 넘어설 지도 모르는 대 기록을 앞두고 있는 이 영화는, 강우석이라고 하는 흥행사의 관록있는 흥행감각과, 설경구,안성기를 비롯한 출연배우들의 혼신의 연기, 음악이나 소품 등의 디테일을 신경써서 살려낸 스태프들의 솜씨, 플래너스(주)씨네마서비스의 엄청난 배급,유통력이 결합되어 [휴머니즘]이라는 보편성 있는 주제를(그래서 남녀노소에게 공감될 수 있는 테마를) 정해진 예산을 엉뚱한 곳이 아닌 제작과 마케팅 등 영화 그 자체에만 집중시킨 결과물이라고 보여진다.
하지만, 영화비는 아깝지 않은 대신, 비디오로 본 것보다는 극장에 나온 것이 잘했다라고 생각되는 대신, 주차비는 아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감독의 자리가 아쉬웠던 것 같다.
휴머니즘에 감동하여 흘러 넘치는 눈물은 뜨겁게 주루룩 볼을 타고 흐른다. 내 자신의 이야기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는, 그저 눈물이 좀 그렁그렁 했을 뿐, 마치 미원 많이 들어간 싸구려 음식은 아니지만, 감칠맛이 떨어지는 잘 차려진 패밀리 레스토랑 음식맛처럼 느껴졌다.
조금만 더 깊이가 있었다면...하는 아쉬움은... 어쩌면 그저 개인적인 취향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어쩌면... 남들도 다 보는 영화인데, 나만 빠질 수 없는 것 아니냐는 내 스스로의 강박에 대한 뒷끝이 영 개운치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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