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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me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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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03 오전 10:1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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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어려운 건 가슴이 아닌 머리로 사랑하려 하기 때문이며, 사랑이 어려운 건 내가 다치거나 상처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사랑을 어려워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역시 사랑이 어렵다고 느끼는 건 이론과 실제란 역시나 하늘과 땅만큼의 간극으로 벌어져 있는 탓일까요?
봄가뭄이 길어진 탓인지 바람이 불면 덧쌓인 황사들이 날라다니면서 시야를 괴롭히긴 합니다만, 어느덧 해는 눈에 띄게 길어졌고 사람들의 옷은 저마다의 화사한 색을 뽐내며 많이 짧아졌습니다. 아직도 미처 겨울옷을 정리하지도 못했는데, 옷장 속의 겨울옷들에게는 아직 여름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계절은 무심하게 새옷으로 갈아입으라고 재촉합니다.
유난히 눈이 많았던 지난 겨울이 또한 유난히 추웠지만, 이제 춥다는 말은 아무도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이런 식이지요. 누군가의 가슴이 아무리 지독하게 황량하여 따뜻한 햇살이 도저히 살갑게 다가 오지 않더라도 계절은 어김없이 바뀌어집니다.
아무리 두터운 겨울옷으로도 녹여주지 못했던 깊은 곳 얼음결정들에게 자연적인 화학반응이란 별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만, 절대로 녹지 않을 것 같이 단단하게 얼어 붙어 있던 깊은 산속 옹달샘에게도 아기 사슴이 찾아 와 목을 축입니다. 그렇게 변하지 않는 건 절대로 변하지 않고 찾아듭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건 때때로 사람을 많이 무기력하게 합니다.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 우주 한가운데로 내동댕이 쳐져 버린 듯한 고독, 태양의 화염처럼 달아오르는 분노에 휩싸여 있어도 지구는 여전히 그 낮과 밤을 번갈아 보여줄 뿐입니다.
그대의 죽음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줄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대의 죽음에 유일하게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법률상의 남편조차도 성가신 법적 절차로 인한 귀찮음의 의미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대가 보낸 편지를 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처음 그대를 만난 건 아사다 지로의 단편 소설집 <철도원>에 수록돼 있었던 <러브 레터>에서였지요. 거기에서 그대는 다카노 고로의 꿈 속에서 다카노 고로의 의식에 의해 변형된 채 잠시 등장할 뿐이고, 그대를 확인할 수 있었던 건 그리 길다고 할 수도 없는 두 장의 편지 뿐이었습니다.
어눌한 어투, 문법에도 제대로 맞지 않는 서술, 단순하고 평이한 글일 뿐이었는데 그 편지를 읽다가 나는 그만 딱 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주루륵 흘러내리는데 어쩔 수가 없더군요. 울다가 괜히 창피한 생각이 들어서 애꿎은 담배만 피워댔습니다.
'바람도 통하지 않고 햇빛도 들지 않고 일 년 내내 장마철처럼 암울한 느낌만 드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대는 사랑을... 하셨더군요. '매일 잊지 않도록 보고 있는 사이에' 사랑에 빠지시더니 '드리는 거 아무것도 없어서 미안'해 하고 '그래서 말만, 서투른 글씨로, 미안'해 하면서 '세상 누구보다 진심으로 사랑'을... 하셨더군요.
그 사랑이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고 너무나도 애절해서,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인 다카노 고로에게 질투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허한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사랑이지만,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실낱같은 희망의 등불일 수도 있는 것인가 봅니다.
만일 그대의 사랑이 없었다면 그대의 죽음은 과연 얼마나 더 쓸쓸했을까요? 만일 그대의 사랑이 없었다면 그대의 암울한 삶은 얼마나 더 절망적이었을까요? 만일 그대의 사랑이 없었다면 다카노 고로가 개같은 삶은 더이상 살지 않으리라고 다짐할 수 있었을까요? 만일 그대의 사랑이 없었다면 나는... 나의 절망의 나락은 그 끝을 보일 수 있었을까요?
그대가 사회적인 병균들에게 윤간당한 채 살해되고, 그 살인이 허울뿐인 제도와 법에 의해 파묻혀져 버렸지만 그대는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대의 사랑은 다른 어떠한 이념이나 이상이나 개뼈다귀같은 진리보다도 더 위대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대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지난 겨울 어느날 자주가던 극장 1층 로비에서 그대의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처음엔 그저 무심결에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러브 레터>라는 원제가 이미 동명의 다른 영화에 사용된 탓인지 그대의 이름인 파이란을 제명으로 하여 그대의 이야기가 영화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곧 알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의 배경을 우리나라로 바꾸어서 최민식이 이강재로 이름을 바꾼 다카노 고로의 역을 맡고, 장백지라는 홍콩 배우가 그대의 역을 맡게 되었더군요. 캐스팅을 누가 담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이처럼 딱 들어맞는 배역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포스터가 바뀌었습니다만, 예고편으로 걸려 있던 포스터에서 장백지가 분한 그대는 깊고 섬세한 눈을 지그시 뜨고 가늘고 상냥한 미소를 지은 채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쥐어 하늘거리는 몸을 지탱하면서 전면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되면, 그것에 대해서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하고 그러다 보면 알량하게 축적된 지적인 허영이 정작 본질은 외면한 채 껍데기만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면서 분석한답시고 메스를 들이댑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영화를 가슴으로 보지 않고 표본실의 청개구리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영화를 바라보는 눈의 차원이 달라진 만큼 예전에는 걸핏하면 가슴을 두드렸던 감동의 횟수 역시 눈에 띄게 소원해져 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영화를 보고 포만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거의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엉터리로 포장된 영화가 용서될 수는 없습니다. 예전에 누군가가 좋은 영화와 아닌 영화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며, 왜 영화를 좀 더 깊이 알아갈수록 감동의 수는 줄어들어 가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된장찌개론을 예로 드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려서 핏자나 햄버거를 좋아했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쌀밥에 된장찌개가 더 좋아져 가는 이유는 핏자나 햄버거와 같은 인스턴트 식품보다는 된장찌개와 같은 갖은 양념에 오랜 시간과 정성이 깃들여진 요리에서 우러나오는 그 깊은 맛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알아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영화를 보는 감동의 수는 줄어들지라도 그 영화의 깊은 곳에 감춰져 있는 감동의 공명은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에게 더욱 크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화를 무작정 분석하려 하는 것이 좋지 않은 습관이듯이 그렇다고 영화의 깊이를 재지 않는 것 역시 관객의 의무를 게을리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관객이 끊임없이 영화의 깊이를 재 줌으로써 영화는, 영화를 창조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성숙해져야만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너무 많이 돌아갔네요. 그대에 대한 사랑이 깊은 만큼 나는 그대의 이야기가 영화라는 것으로 변형되었을 때, 원작의 슬프지만 아름다운 향기가 손상되지 않기를 바랬으며 그렇게 손상된 향기탓에 내가 영화를 보면서 걸핏하면 드러내는 나의 못된 습관인 분석으로 내 시선이 기울어지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나는 영화 <파이란>에 대한 다른 누구의 글도 읽으려 하지 않았고, <파이란>의 시사회란 시사회에는 몽땅 응모하였으나 결국 시사회로 그대를 만나지는 못하고 극장에 개봉하는 첫 날에서야 겨우 그대의 이야기가 영상으로 수놓아 진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또 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눈물을 줄줄줄 흘리다가 영화가 다 끝나고 극장이 환해졌지만, 붉어진 눈자위를 숨기지도 않고 엔딩크레딧이 끝까지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정말이지 너무나도 오랜만에 아무런 사심도 없이 아무런 의심도 없이 아무런 분석도 없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영화 속으로 깊숙히 빠져드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작과는 다르게 현실의 희망이란 결국 없다라는 냉소로 마무리짓고, 그대의 상황을 원작보다는 좀 덜 고통스럽게 설정해 놓았으며, 다카노 고로에서 이강재로 이름이 바뀐 캐릭터는 훨씬 더 사실적이며 훨씬 더 찐따같고 훨씬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영화 <파이란>은 어디까지나 그대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대의 그 눈물겨운 사랑, 그대의 그 가슴아픈 사랑, 그대의 그 사랑하는 것 외엔 달리 어찌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찬 사랑, 그러나 세상의 그 누구보다 진실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영화를 본지 오늘로 5일째가 되어 갑니다. 그동안 이와이 슌지의 <러브 레터>를 비디오로 빌려다 다시 봤고, 원작인 아사다 지로의 소설 <러브 레터>를 다시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길고도 깊숙하게 울려 오는 감정의 메아리를 조용히 음미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번주 내내는 이 행복한 기분이 계속될 것만 같습니다. 계절이 바뀌듯이 이 행복도 결국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을테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는 행복합니다.
인생은 부침의 연속입니다. 슬픔이 있으면 기쁨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면 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치열한 자기 반성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대의 죽음으로 세상이 뒤바뀌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대의 사랑은 계절이 왜 바뀌어야만 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계절이 바뀌듯이 우리의 삶도 조금씩 바뀌어 가겠지요. 그렇게 바뀌어 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대와 같은 사랑이란 그저 흔한, 아주 흔하디 흔해서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그런 날이 올 수도 있겠지요.
아무것도 아닌 자존심이나 내세울 것 없는 신분, 혹은 종교적 인종적 사상적 편견에 서로를 가두어 둔 채 결국은 후회할 짓을 스스로에게 하고 마는 그런 사랑이란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이라서 아무도 그런 사랑은 하지 않는 그런 날이 올 수도 있겠지요.
나른하게 감겨오는 봄바람이 너무도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그대가 계신 그곳은 어떤가요?
더이상 슬퍼하지 않고 더이상 외로워하지 않고 더이상 미안해 하지 않고 사랑하면서 살고 계시겠지요?
부디 내내 평안하십시요.
이천일년 오월 그대를 사모하는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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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란(2001, Failan)
제작사 : 튜브픽쳐스(주) / 배급사 : (주)영화사 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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