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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목]"늙지 않는 피노키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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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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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se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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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05 오후 10:0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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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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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베니니의 "피노키오"는 원작(여기서 실제는 우리가 그렇다고 믿는, 모든것들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아오고 기억해온 피노키오에 대한 모든것이다. 그것은 적어도 우리에겐완벽한 진실이다.)스토리에 매우 충실하지만 그 느낌은 매우 다른 작품이다.
왜냐하면, 그(피노키오)는 (이미)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인형이라고 말하면 말할수록, 매우 역설적으로 우리는 인형 피노키오에서 인간 피노키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여기서 인간이라고 정의내리는 구역의 범위는 외형에 있지 않다. 그 올바른 범위는 피노키오의 근원적 욕망이다. 자신을 만들어준 목수를 아버지라 생각하면서, 온갖 말썽을 피우는 피노키오의 근원적 욕망은 - 하고싶은 일들을 타인의 제약과 사회의 제도에 관계없이 마음껏 하고 싶다는 인간의 매우, 근원적인 욕망과 같다. 아마, 로베르토베니니의 "피노키오"를 보는 당신은 매우 당혹스러울수도 있을것이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피노키오는 분명, 로베르토베니니라는 인간이지만, 극속의 모든 인물들을 그를 일컬어 분명한 "인형"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영화는 완벽한 판타지이다. (이는, 동화속에 등장하는 비쥬얼이 분명한 , 목각인형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가리켜 피노키오라고 부른것과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것들을 완벽하게 "거짓"이라고 믿어야 이영화에 완벽하게 몰입할수 있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살아있다는것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아빠는 학교에가서 피노키오가 공부를 열심히 하길 원하겠지만, 피노키오는 그런 아빠의 바램을 들어줄수가 없다. 아빠가 주문하는 혹은, 시종일관 따라다니는 귀뚜라미아저씨의 잔소리에 맞춰서 짜여진 틀에 맞춰 사람들이 말하는 착한아이로 살아갈수가 있겠는가! 여전히 모두에게 가능한것처럼 보이는 (분명, 그것은 보이는것일뿐일런지도 모른다.) 규정된 생활안에서. 그또래 아이들이 모두 갖고 있는 습관따위들은 피노키오에겐 너무나 버겁기만 하다. 영화는 원전에서 말하고 있는 "착한아이"를,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한다.(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영화를 읽는 올바른 방법이다.) 피노키오의 첫 등장씬이 당혹스러울만치 평범했던 것처럼(피오키오의 첫등장씬은 아버지가피오키오를 만들던 책상위에서매우 자연스럽게, 그러니까 보통의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나누는 대사와 함께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그자리에서 아빠와 함께 살처럼 생활해온 아들처럼 등장한다.)영화는 피노키오를 특별한 인형으로 취급하려는 의도따위는 애초부터 갖고 있지 않다. 인형극이 보고싶어, 아빠가 재킷을 팔아 마련해준 책을 조금의 죄책감도 없이 쉽게 돈과 바꾸는 장면등은, 피노키오에게 또래 꼬마아이들의 1차원적인 욕망을 매우 자연스럽게 입혀주는 훌륭한 장치들이다.(비록 그것이 관습적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인형극단주에게 풀려나가기 위해 슬픈이야기를 꾸며대는 피노키오가 아버지의 직업을 "가난"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미)원작을 뛰어넘은 깊은 감동의 파장을 연출해내는 명장면중의 하나이다.
어찌보면, 영화의 스토리는 매우 간단하다. (동화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아빠의 품을 벗어나 세상구경을 나간 피노키오가,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깊은 반성을 한후, 집으로 돌아온다는 그야말로 매우 뻔한 모험담일 뿐이니까 말이다. 동화의 교훈에서 말하는 "착한일"이란, [부모님의 말씀을 잘듣는 아이]일뿐이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 피노키오에게 난제의 장치를 주는 일이란, 피노키오의 돈을 빼앗거나 당나귀를 만든다거나 하는 결코, 어렵지 않은 장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반복적으로 피노키오를 사랑하는 아빠의 부정에 눈물짓고, 피노키오가 하는 1차원적인 거짓말에 대해 매우 분노하게 되며, 피노키오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요정의 존재에게 매료된다. 그것은 바로 동화의 - 근본적인 도덕성을 강조하는 - 기본적 주제의식과 [거짓말]에 대한 은근한 모두의 죄의식, 그리고 "로베르토베니니"의 존재때문이다. 단순한 스토리에 숨을 불어넣는 로베르토베니니의 연기는 여전히 그 생명력이 넘친다. 불혹의 나이. 마른몸. 작은키. 주름진 이마. 피노키오의 조건에 어느것하나 해당하지 못하는 그의 늙은 육신은 우리의 우려를 단순간에 잠식시킨다. 의자위로 계곡 위로 들판위로 나무위로 뛰어다니는 로베르토베니니의 가벼운 몸체는 이야기에 또다른 이야기를 집어넣는다. 그의 육신은 늙었으나 그의 에너지는 여전히 넘친다. (놀랍게도,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을때 우리를 놀래켰던 그의 제스츄어는 극중에 비슷하게 여러번 연출된다.) 마치, 피노키오를 연기할사람은 이 지구상에 유일한 단 한사람. 로베르토베니니밖에 존재하지 않는것처럼 그는 관객을 완벽하게 장악한다. (여전히 그 맑은 눈망울로 말이다!)
[착한 마음씨를 가졌으니 칭찬과 기쁨을 누릴 자격이 있어,]
푸른요정은 피노키오에게 말한다. 작품의 근본적 주제의식을 푸른요정의 대사로 표현하는 영화 "피노키오"는 조금은 긴 러닝타임과, 느슨한 스토리가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피노키오에서 느꼈던 [반성의 계기]를 매우 재미있는 방법으로 재현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유려함이 돋보인다. (그것이, 그이상의 파장을 가져오지는 못할지라도 말이다.) 피노키오의 코가 길어지고, 당나귀의 꼬리가 생기고, 귀가 당나귀만큼 커지는것보다 피노키오가 두려워 하는것은 바로, 아버지를 잃는것이다. 아버지가 빠져버린 바닷물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어가는 피노키오의 뒷모습은. 우리에게 많은것을 시사한다.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주제의식을 직접적으로 훈계하려하지 않고, 주제를 판타지안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인것은 온전한 로베르토베니니의 공이다. 그가 존재하는 영화에서 생명력을 느낄수 없다는것은 ,진정 불가능하다. 그는 현재. 지금. 우리곁에서 피노키오처럼 살아 움직이는 존재와 같이 느껴진다. "나이는 단지 기호에 불과하다." 그것은 바로 베니니를 위한 완벽한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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