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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추억]<월향>남아 있는건 나이스 운동화 한짝..(비극의 모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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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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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연쇄살인사건" 우리들의 기억속에 스치듯이 남아있다고 생각되는 이 저주스러운 사건은 1986~1991년까지 화성에서 일언난 부녀자 강간연쇄살인이다.(허나 이 사건은 스치듯이 남아있는 기억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세월"이라는 울타리로 무장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잊었다고 생각 할 때쯤 우리를 찾아온 이 불쾌했던 시절에 대한 영화<살인의 추억>은 일차적으로 관객에게 단순한 호기심(범인이 누구일까? 아니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 만큼 궁금했던 것에 대한 일말의 답을 보여주지 않을까?하는 기대심리)을 일으키면서 단순하게 재미만을 추구하는 관객들을 극장안에 가두고 시작하였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나서 영화상의 재미만을 기대했던 관객이나 나의 얼굴은 그 세월 사건속의 유일한 목격자가 된듯한 불안한 심리를 표현하고 있었다. 결국, 우린 <살인의 추억>을 봄으로써 그 시대의 목격자가 된 것이다.
먼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부분은 "추억"이라는 단어였다. "살인의 추억" 얼핏보기에는 멋들어진 이 제목은 자꾸 음미할 수록 비극이 부조화를 나타내는 역설적인 말임을 알고 나는 묘한 흥분감에 사로잡혔다. "추억"은 과거의 어느 한 시점을 아름답게 또는 그리움의 감정을 섞어서 기억한다는 의미 일 것이다. 근대 "살인"이라는 말이 붙음으로써(살인이라는 것 자체가 잊고 싶은 단어이다), 결코 그리움의 감정을 섞어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조리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관객에게 흥분제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 억지스런 제목은 분명 살인이라는 사건보다는 그 시대의 장소,시간,인물을 기억하라는 의미로 해석되어 질 것이다. 결코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영화<살인의 추억>은 어울리지 않는 시대에 일어난 사건을 통해 우리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었다.
감독 봉준호는 우리에게 <플란다스의 개>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전작과는 약간은 다르게 그러나, 기본 정신은 일맥상통하게, 정돈되어 있는 일상에서 미세한 어긋남을 잘 표현하는 감독이다. 그런 그의 스타일이 이번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크게 부각되면서 어렵지 않게 관객으로 부터 감독의 의도를 따라오게끔 만드는 효과를 보았다. 위에서도 말해듯이 영화가 끝나면 관객의 얼굴에서 그 불안한 심리를 확연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감독 봉준호가 영화속 곳곳에 설치해둔 그 부조화를 찾아내고 의미를 곱씹어 본다면 우린 그 시대의 자화상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감독이 영화속에 설치해둔 부조화를 나타내는 장치를 찾는 것이 왠지 겁이 났지만 그건 우리의 자화상이기에 나는 더이상 주저할 필요는 없었다.
영화의 도입은 한가로운 들녁에 촌스러운 형사와 무참하게 살해된 여자의 시체, 그리고 어린이들의 천연덕스러운 장난으로 시작한다. 이 인트로는 분명 살인이라는 공포의 행위를 절묘하게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시작하게 함으로써 어긋나 있는 그 시대로의 회귀를 그리고 있었다. 서울형사(김성겸ㅡ극중 서태윤) 시골형사(송강호ㅡ극중 박두만)의 어울리지 않는 콤비플레이, 세 명의 형사들의 각기 다른 학력등등, 영화의 도입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조합으로 살인의 예측할 수 없는 공포의 무게을 전하고 있었다. 억지로 용의자를 잡아서 억지로 자백 받고, 억지로 사건 검증하는 그 시장통 같은 모습들이 당연스레 이해되는 것은 내가 살았던 그 시대가 억지로 이루어진 시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80년대 중반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국내외적으로 급부상하는 시기여서, 수업을 받는 것보다 아시안 게임, 올림픽을 위해서 매스게임 연습에 더 열중하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적 풍토에서 일어난 부녀자 강간연쇄살인은 "3일내에 범인 잡아와!"식의 일방통행적인 명령의 하달만 있는 거추장스러운 일이 뿐이었다.
여기서 잠깐, 이 영화의 장르가 모호함을 나는 지적하고 싶다. 형사물인것만은 확실한데 그렇다고 스릴러적 성격이 강한 것도 아니다. 살인자와의 두뇌싸움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범인의 실체도 밝히지 못하는 실제 사건을 다룬 거여서 결론도 없다. 나는, 영화<살인의 추억>이 범인과 형사라는 인물들의 대립에 초점을 마추어서 그려진게 아니라 형사라는 인물에 제3자로 맴도는 범인이라는 인물 구도에 의문을 가졌다.. 영화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영화의 장르는 리얼형사극이 아니라 한 시대를 회고하는 사회성 짙은 인물중심 드라마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카메라의 시선은 철저히 형사에 초점을 마추고 있고 형사는 오로지 잡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여 있을 뿐이다. 이것은 제목 <살인의 추억>이 범인이 기억하는 그 시간이 아니라 남아 있는 우리들의 기억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결국 가해자보다 시대의 피해자가 기억하는 한 편의 드라마가 바로 이 영화 <살인의 추억>이다.
자칭 "무당눈깔" 박두만형사의 상징성은 우리를 대변한다. 박두만은 무지하고 속되었지만 그래도 순수한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그 시대의 일반적인 보편인을 대변한다. 미치도록 잡고 싶었지만(능력도 없으면서) 자신의 추억속으로 범인을 가두는 그는 강간범조차 제대로 선별 할 수 없는 즉, 진실을 눈 앞에 두고도 못보는 우리의 아픈 과거이다. 수사반장의 주제곡을 용의자와 같이 흥얼거리는 장면에서 수사극 처럼 범인을 통쾌하게 잡아내지 못하는 자학을 느꼈고 그 시대를 기억하는 자가 결코 범인이 아님을 알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에 반해 서태윤은 관객에게 사건의 실마리 내지는 의문의 해소라도 해줄 것 같았지만 결국 그도 기억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시대의 피조물임을 보면서 이 두형사가 처음부터 부조화 였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그들을 만드는 시대 탓임을 감독은 묵묵히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울리지 않는 존재들의 만남이 아니라 범인을 잡기 위해서 골목을 죽어라 같이 뛰는 그 시대를 그렇게 살아온 우리의 과거일 뿐이다.
내가 가장 흥분하면서 본 장면은 세 형사들이 동시에 골목을 뛰는 장면이다. 이 화면구성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장면 일 수도 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숨 돌릴 틈도 없는 긴장감을 맛보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 뚝 떨어지는 근육의 이완도 느낄 것이다. 조였다 풀었다를 반복하면서 좁은 골목을 뛰는 세 형사의 모습에서 감독 봉준호는 어두운 골목이라는 상징성을 통해 그 시대의 그 답답했던 시간으로의 회귀와 어긋난 것들의 재배열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당신은 80년대를 어떻게 기억하는가?를 되묻는다. 오브제(objet)와 이미지(image)의 차이를 감독 봉준호는 이 영화에서 이용하고 있다. 살인(화성연쇄살인사건)이라는 행위를 하나의 물체로 본다면 우리는 이 영화를 봄으로써 그것의 기존의 의미를 완전 탈피해서 새로운 관념적 의미(가치)를 매긴다. 이런 오브제는 거기서 또다른 이미지를 파생해서 관객이 이 세형사의 골목 추격씬 장면에서 살인을 기억하는것이 아니라 지난 시절의 어긋남과 그것이 현재에 미치는 새로운 느낌을 받는 것이다.. 분명 살인이라는 행위는 추억할 수 없는데 우린 그들 세 형사의 집념을 보면서 추억할 수 밖에 없는 피해자가 되버린 것이다. 시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연쇄살인과 그것에 대응하는 무지의 이해로써 말이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달리는가? ... 이것에 대한 나의 생각은 범인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는 용의자들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었다. 살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들을 앉혀다가 자백과 폭력을 일쌈는 형사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단절되어 버린 의사소통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모습들은 박두만이 거짓으로 백광호의 신발로 증거를 만드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그 시대는 이렇게 진실은 덮어두고 거짓으로 새 진실을 만드는 즉, 마주함으로써 이루어지는 합의는 없고 명령의 하달만 있는 시대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시대에 일어난 연쇄살인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비극의 모순이라는 또 다른 말과 의미를 부여 받는 것이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될 수 있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수 있는 시대에서 그들은 억눌린 것의 폭발을 이 골목 추격씬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비극의 모순" .. 이 말이 영화 <살인의 추억>의 주제를 나타내는 말 일 것이다. 미안한 마음에 두만(송강호)는 백광호에게 나이키 운동화라면서 가짜 나이키 운동화 나이스를 선물한다. 가짜를 보고 좋아하는 백광호나 그것을 선물함으로써 자신의 일말의 양심적 가책을 없에려는 박두만의 모습은 사뭇 대조적이다. 그러나 백광호가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고 남겨진 나이스 운동화 한짝은 화해와 이해를 구하지 못하고 결국 비극을 초래한다는 시대적 각인의 작업으로 남아버린다. 결국 살인이라는 비극이 해소되지는 않고 또 다른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조용구(김뢰하 ㅡ개인적으로 참 매력적인 인물이었음^^)형사가 발을 절단하는 것에서 우리는 최고치의 비극을 맛본다. 살해된 여자들에 대한 동정과 살인자에 대한 분노심은 결국 또 다른 인간 군상에게 잊을 수 없는 각인을 남김으로써 우리는 시간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그 사건을 추억할 수 밖에 없는 피해자가 되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 시대를 같이 살아온 우리가 가해자 일 수도 있고 피해자 일 수도 있다는 이 논리는 즉, "비극의 모순"인 것이다.
용의자 박현규(박해일)는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범인으로 나온다. 감독 봉준호도 그런 의도적인 연출로 극 중간중간 그의 모습을 흐릿하게 표현했다. 그가 진실로 범인이 아니라도 관객은 불안한 심리에 그를 범인으로 믿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시대가 그런 불안심리에 취해서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야지만 진실을 알 수 있는 사회적 풍토를 대변하는 듯하다. 아니어도 믿고 싶은것.. 근거가 없더라도 믿고 싶은 마음.. 우린 그렇게 뚜렷한 주체적 대상 없이 판단할 수 밖에 없는 시대를 통과해서 지금에 도다른 것임을 알아버렸다.
다 망가져가는 똥차를 끌고 가는 형사들의 모습에서 뒤로 물러설 수는 없고 어떻게든 앞으로 전진할 수 밖에 80년대의 상황을 상징화했다면 마지막 장면에서 박두만이 박현규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질문은 살인도, 수사도 인간적인 존중성은 배제한체 행해지고 있다는 그 시대의 단편을 표현한 것일 것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은 이렇게 한 미해결사건을 재조명함으로써 살인자보다 형사들의 감정변화와 주변의 환경에 더 치중함으로써 우리가 기억하는 그때를 추억한다는 반어적 표현으로 그리고 있었다. 결국 영화는 관객에게 잊을 수 없는 각인을 시켜주는 장치였을 뿐 모든 것은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추억하지만 범인은 기억한다는 것을 당신은 아는가?.. 영화는 그렇게 그 날의 비극의 모순을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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