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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se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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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4-08 오전 3:2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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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이 영화가 뿜어내는 유머의 의도가 지나치게 순수한 의도에 있다는 사실이 점점 정확하게 시야에 맞물려 들어온다. 결과론적으로, 극적 공포의 순간에 관객을 웃겨버리는 감독 장준환의 유머가 효과적으로 쓰일수 있었던 사유는 액션(Action)의 출발선자체가 너무나 아무것도 아닌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오프닝을 다시 들여다보자. 강사장이 자가용에서 내리기전 혼자서 웅얼거리는 용어들은 분명 강사장의 정체를 의심하거나 혹은 믿거나 둘중의 하나를 지금부터 선택하라고 관객에게 보내는 감독의 최초의 메시지이다. (이부분에서 웅얼거리는 대사는 백윤식씨가 자체 제작한것이라고 전해짐.) 그러니까, 영화의 시작에서 강사장의 얼굴이 카메라에 잡히기 전 우리가 듣게 될 이 이상한 불확실한 소리의 정체를 관객이 의심하던 의심하지 않던 감독은 힌트를 던져놓고 50%의 확률게임에 이미 돌입한것이다. 중요한 매씬에서 이런식의 이상한 전파를 관객에게 흘려보내는 감독의 확률게임은 , 강사장이 외계인일 확률과 그렇지 않을 확률이 정확하게 50%라고 시종일관 말하고 있다.
추형사의 동전이 풍기는 중요한뉘앙스(지나쳐서는 안되는)를 다시 살펴보자. 병구가 범인이거나 혹은 범인이 아니거나의 결과론적인 확률이 50%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복권에 당첨될 천문학적인 숫자들의 나열로 이어지는 불가능성의 확률을 언급한후에 과시되는 50%의 확률은 상대적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높은 수치다. 이 50%의 확률은 지구를지켜라의 근원적 의도와 일치한다. 당신이 병구를 과대망상환자로 믿던지 혹은 믿지 않던지, 강사장을 외계인으로 믿던지 믿지 않던지, 병구가 범인이던지 아니던지 결국 의외로 답은 간단한 50%의 높은 확률이라는 사실.
이것은 감독의 수치계산이 불러낸 의외의 단순한 해답일 것이다. 이 단순한 결과수치는 영화를 연결하는 중요한 수맥이다. 감독은 애초부터 경찰과 복선 암호해독등과 싸울 의도 없이 추형사가로 하여금 너무도 쉽게 병구를 찾아가게 하고 또 아무렇지도 않게 병구의 집에서 나오게 만들어 버린다. 결국, 이영화를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조금도 복잡하지 않게 가장 순수한 방법으로 전달하고 싶다고 시종일관 되뇌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 단순하고 순수한 이야기를 포장하는 영화속의 뛰어난 장치들을 벗겨낸 자리에 남아있는 영화의 단초는 너무나 보잘것없기 때문에 "과대망상"이라는 중요한 코드가 반드시 필요하다.
병구와 병구를 괴롭히는 동창이 만나서 벌이는 액션씬이 회상장면인지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주변 관객들의 반응을 지켜보며 나는, 어쩌면 우리가 너무나 이영화를 심각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자문을 해보았다. 이영화를 재차 들여보는데 사용되는 돋보기가 더할나위없는 방훼공작을 벌이고 당신의 머릿속을 지나치게(이것은 분명, 지나치다.)복잡하게 만들어 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강사장의 계좌에서 400만원을 인출하는 병구의 웃음을 자아내는 복장과 또 쉽게 숫법을 알아채버리는 형사들의 태도는 지구를 지켜라가 얼마나 단순한 단초들을 가지고 관객들에게 덤비려고 하고 있는지를 철저히 드러낸다. 검붉은색의 충격적인 비쥬얼은 이 단초들을 무마시키기 위한 감독의 TRICK에 불과하다.
병구가 강사장을 가두고 위협하려고 다가가는 총기소지 사건을 예로 든다. 진정, 어이없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변해버리는 이 총기의 역할은 진정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영화가 꾸며내는 이 장난과 위협에 잔뜩 긴장해버리고 만다. 순간적으로 터지는 참을수 없는 폭소의 원천은 그야말로 이 황당한 상황에 속아넘어가버리는 자신에게 쏟아버리고 싶은 어이없는 한탄과 허무함이다. 아무것도 아닌 총기를 들고, 움직이고, 그 총기로 강사장을 위협하는, 병구의 의도가 너무나 어처구니 없음을 깨닫는 순간 일순간 터진 폭소는 더 이상 주체할수 없을만큼 길어지고 만다. 이러한50%의 확률에 도전하는 장준환의 유머 때문에, 나는 이 영화를 스플래터무비라고 언급하기조차 망설여진다. B급 무비에 오히려 가까운 지구를 지켜라의 기막히게 단순한 유머를 정리정돈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의도가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포장은 거대해지고 비쥬얼은 강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사건의 해결의 순간에서 조차 병구대신 병구의 동네친구를 끌어들이고 엔딩의 10분간 정신을 잃게 만드는 황당한 결말을 들이대면서 장르의 전환을 위한 시도를 끝내 포기하지 않는 도발적인 자세를 취한다.
이러한 도발적인 자세에도 그럴만한 충분한 사유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를 끝내 울게 만들어 버리는, 못가진자들의 비극을 위로하는 아리아를 발견하게 되는 부분에서 입증된다. 이 복잡한 쟝르의 왜곡을 시도하는 황당한 영화가 가진 기본적인 정서가 "슬픔"이라는 점과 그것이 외롭고 못가진 자의 버려진 영혼을 위로하고자 하는 아리아라는 점은 관객의 심정을 울린다. 병구는 사회와 직장을 뛰어넘어 외계에 가족과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외로운 사투를 벌인다(그것은 진정외로워 보인다. 그래서 너무나 슬프다.). 50%의 확률이 무의미해지는 순간, 병구는 더이상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니며, 강사장은 이미 한 개인이 아닌 전체를 대변하고, 사회를 일축하며, 병구가 아닌 모든것(이영화는 마치 병구와 병구가 아닌 모든것 이 두가지로 이루어지는 판타지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의 망각일수도 있고 우리눈에 비치는 환각일수도 있다.)을 상징하는 거대한 존재로 탈바꿈하게 된다. 지구를 지켜라의 이러한 깊은 심중은 충격적인 비쥬얼과 뛰어난 상상력을 단단하게 뒷받침해주는 가치있는 사연이다.
분명, 지구를 지켜라는 돌연변이임에 틀림없다. 그간 한국영화가 보존해왔던 DNA구조질서를 비웃고 거대한 포장지안에 자그마한 몸체를 웅크리고 숨어있는 이 깜찍한 새로운 유전자형태를 결코 만만히 보아서는 안되는 사유는 50%의 확률 때문이다. 병구가 과대망상환자이던 그렇지 않던, 강사장이 외계인이던 그렇지 않던 우리는 그 어느쪽이던 이 황당하고 단순한 유머에 경악할것이고, 미친 듯이 웃어댈것이고,새로운 유전자구조를 분석하고 싶어질 것이다. 즉, 50%의 확률은 100%와 일치한다. 둘중 어느경우에서건 장준환감독의 치밀한 50%의 확률에 관객이 환호하는 경우의 수는 만장일치. 100%의 확률과 같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새로운 유전자코드의 새로운 배열이 비록 대다수의 관객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해도(이러한 새로운 배열에 호기심을 갖지 않는 대다수의 관객들의 유전자 구조가 나는 더욱 궁금하다. 어떻게 궁금하지 않을수가 있는지?)감독과 배우 제작진이여 슬퍼하지 말지어다. 비록, 폭발적인 상업적 결과는 얻지 못했다 할지어도 당신들의 놀라운 작업결과는 이미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우리가 알았다. 어쨌거나 확률은 50%이다. 이영화를 본 당신이 이영화에 열광하게 될 확률50%, 감독에게 열광하게 될 확률50%.
<지구를지켜라>는 단명하지 않을것이다. 폐질환을 앓다가 여섯살에 생을 마감한 복제양 돌리와 다르게 이영화는, 복제된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폐질환을 앓지 않기 위해 지금 지구를 지켜라는 이상한 형태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한국의 영화시장안에서 외로운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이 사투가 질병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우리는 어서 빨리 다시한번 이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영화가 만들어놓은 DNA구조질서를 재배열 할 만한 우리의 새로운 영화가 탄생될때까지, 우리는 아주 오랜시간을 기다려야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도는 늘 관객에게 인정받고 숙지되어야 마땅하다.
그것이 간혹, 조금 당황스럽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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