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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하거나 사랑스럽거나 <그해 여름>수애
2006년 11월 29일 수요일 | 이희승 기자 이메일

가깝지만 멀다는 느낌은 배우 수애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멀리 있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애달픔은 비단 남녀 사이에만 통용되는 말이 아니었다. 수애에게 공인으로서의 삶, 그 이상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흔한 스캔들 기사나, ‘~카더라’식 뒷얘기가 없어서 더 다른 ‘부류’로 치부됐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광고시장에서 그녀는 여배우로서 남성복과 커피 광고를 동시에 아우르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포근히 안아 주고픈 진한 원두 향을 지닌 연인의 모습이다가도 진한 스모키 메이크업으로 남자의 뒷모습을 묘하게 쳐다보던 시선은 단아하고 고운 눈매로 수려함을 내보이는 화장품 선전으로 이어졌다. 그 묘함이 TV를 통해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나는 그녀를 친근하지만 새로운 존재로 다가오게 만드는, 광고주들이 평가하는 값진 매력이었다. 소비적인 광고시장의 어필에도 불구하고 대중이 느끼는 수애를 향한 감정은 여전히 신비로웠고, 아련하기만 했다. 그건 흡사 고백 못한 사랑의 수줍은 기억처럼 언제나 소중하게 지켜내야 할 의무감이었다. 자신의 세 번째 영화 <그 해 여름>은 바로 그 첫사랑의 이야기다.

피곤에 지친 배우를 한 두 번 본 게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대면한 그녀의 인상은 상당히 안쓰러웠다. 가녀린 허리와 좁은 어깨가 주는 ‘마른’ 느낌은 단지 외형에 불과했고 그건 분명 처절한 지침이었다. “상대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냐, 지방 촬영을 하면서 힘들었던 점이 무엇인지, 이 영화를 택하게 된 이유, 그런 질문을 가장 많이 받은 것 같아요.” 기자 시사가 열리기 전 진행 된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은 그녀에게 역으로 물어본 ‘이번 영화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질문’에 돌아온 익숙한 대답이었다. 그런 질문을 하기 전에 어떤 질문을 받았는지를 묻는 이 탐색전은 물론 배우들 사이에서도 너무 많이 알려진 수법(?)이라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었다. 진부한 질문에 실망한 표정은 오늘 인터뷰한 매체 중 유일하게 대본을 읽은 분이라 영화적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을 거란 영화사 관계자의 추임새로 단박에 바뀌었다. 그 기대감 어린 눈을 직접 대면하고 나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수애는 너무 멀리 있었던 게 아니고 단지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 전혀 다른 ‘사랑’을 연기해 내다.

청순가련형의 수애가 전과 4범의 소매치기로 분한 영화 <가족>은 전국 250만 명의 눈에서 피보다 진한 눈물을 뽑아냈다. 3년 만에 교도소를 출소한 딸 ‘정은’과 전직 경찰인 아버지의 갈등은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소원해진 이 시대 모든 부녀지간의 모습이었다. 정은이 찢긴 입술 사이로 거칠게 내뱉는 말투 하나하나는 순한 눈매의 수애가 연기함으로써 더욱 처절한 슬픔으로 각인됐다. ‘가족의 사랑’이란 진부한 코드는 상반된 두 개의 이미지가 만나면서 진한 감동으로 이어졌고 자신의 첫 영화로 단숨에 흥행배우로 자리매김한 대가는 각종 영화제의 신인상으로 달콤하게 치러졌다. 이미 주말 드라마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어떤 것인가를 온 몸으로 보여주던 그녀였기에 스크린에서 이어진 눈물의 행렬은 수애에게 ‘눈물의 여왕’이란 별명을 아로새겼다.

한때 너무나 싫었던 그 호칭은 <그 해 여름>을 찍으면서 눈물에도 여러 느낌이 있다는 여유로움으로 다가왔다. “저는요, 데뷔 초에 ‘자, 이 장면은 막 슬프게 울어야 돼, 자 울어봐.’라는 식의 주문이 너무 싫었어요. 슬프지도 않은데, 그 감정이 왜 되는 건지도 모르고 우는 게 이상했는데 그걸 물어보는 내가 더 이상해 보였거든요. 물론 정말 슬퍼서 울게 되는 연기도 있었지만요. 결국엔 그때의 감정연기들이 쌓여서 그런 호칭이 붙으니까 부담스러웠던 것 같아요. 하지만 영화작업을 한편 한 편 끝내면서 눈물의 감정이 명확해 지는 거예요. 이 영화의 눈물은 뭐랄까….진하고, 따듯한 느낌이에요.” 이런 변화는 <그 해 여름>의 포스터 촬영 현장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슬프지만 행복한 눈물은 아름다운 결과물로 표현됐고, 감정의 울림을 그대로 내보인 그녀의 모습은 영화를 보게 만드는 유혹의 한 컷으로 선택됐다.

수애의 두 번째 영화 <나의 결혼 원정기>는 저 멀리 우즈베키스탄까지 날아가 찍었어야 했지만 행복했다. 평소 같이 연기 하고 싶었던 선배 배우와의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신부감을 찾기 위한 두 노총각을 ‘결혼’으로 골인하게 만들어야 ‘돈’을 버는 연변 처녀 ‘라라’는 되려 그 중 한 명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키스 한번 없는 멜로 드라마를 애틋하게 다가오게 만든 원동력은 우울한 억척스러움을 발랄하게 표현해 낸 여주인공 수애의 힘이었다. 예쁘기만 한 헤로인들과 차별되는 그녀의 매력은 <그 해 여름>속 석영(이병헌)이 40년이 지나도 못 잊을 첫사랑의 그녀, 정인으로 재 탄생됐다.

이 영화에서는 두 개의 사랑이 시간의 흐름을 넘어서 교차되는데 완성된 영화에서는 많은 부분 덜어냈지만 시나리오 속의 사랑은 정적인 사랑(정인&석영)과 추억의 메신저 역할을 하는 프로그램 김 PD(유해진)와 이 작가(이세은)의 티격태격한 연애 담이 담겨 있다. “영화를 끝내고 나니까 고작 3편, 이란 생각보다는 벌써 3편이나! 란 생각이 들더라구요. 사실 저는 그 둘의 사랑을 모두 가진 것 같아요.(웃음)영화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정적인 느낌에 머물지 않아요. 사랑이란 감정이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듯이.”

★ 수애가 박수애가 아닌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인터뷰 초반에도 밝혔지만 그녀는 범접할 수 없는 뭔가에 둘러 쌓여 있었다. 브라운관을 넘어 스크린으로의 첫 도약 후에도 당연시 되는 신인 배우의 인터뷰 릴레이는 볼 수 없었고, (욕을 좀 먹더라도) 영화에 대한 홍보보다는 자신이 선택한 작품에 대한 결과를 조용히 지켜보는 길을 택했다. 매체는 제한됐고, 그나마 나오는 기사에서 ‘수애’는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수애로서 연기한 ‘라라’와 ‘정은’만이 존재했다. 이번에 만나면 수애 이전에 ‘박수애’로 산 인생도 물어봐야지. 라는 결심은 ‘정인’의 모습을 버리지 못한 그녀를 발견하곤 어느 순간 슬그머니 사라졌다. “4인조 가수를 준비하다 연기자로 돌아섰다는 사실은 약간의 오해가 있어요. 그 당시에 친한 언니들과 뭉쳐서 ‘한번 해볼까?’한 게 가수 보다는 연예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길거리 캐스팅으로 우연히 들어온 그녀의 과거는 여전히 수줍고 내성적인 현재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런 그녀에게도 꼭 찾고 싶은 상대는 있을 터. ‘사람 찾기’라는 프로그램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 해 여름>처럼 수애에게도 찾아야 할, 혹은 찾고 싶은 상대가 분명 존재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사를 가도 한집 건너 그 다음 집, 다음 번 이사 때도 한 동네를 벗어나지 않는 심플한 동선은 학창시절 친구들을 그대로 묶어주었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더욱 돈독해 지는 우정으로 발전했다. “걔네 들이 저를 예전과 다름없이 대해주는 것도 있고,(웃음) 물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출구를 등지게 앉게 해주긴 해요. 그래도 여전히 똑같이 그대로인 친구들이죠. 연락이 끊기거나 두절된 학창 시절의 친구들이 없어서인지 전 찾고 싶은 사람이 없어요.”

분명 ‘수애’란 예명으로 산 지난 7년간의 삶이 또래의 생활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박수애로 돌아갈 수 없지만 내가 스타라고 생각한적도 없고 수애나 박수애나 똑같은 사람이잖아요. 물론 내 나이 대보다 많은 수입을 올리고 공인으로 살고 있지만 제 자신을 잃은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게 좋아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인터뷰 중에도 장녀 특유의 책임감이 살짝 살짝 읽히는 행동과 여자의 매력이야 말로 “애교”라고 귀엽게 대꾸하는 수애의 소소한 모습이 한결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어, “당신의 인생에서 사랑이 없었던 적은 없었을 테니, 이 영화의 카피처럼 ‘힘들 때 힘이 되어준 추억’이 있나요? 그 주인공이 연인이건 가족이건 간에”란 질문에 수애의 눈이 다시금 반짝, 빛난다. “저는 추위를 많이 타지만 항상 겨울이 좋았어요. 지금도 겨울이 좋지만. 8살 때인가. 뒷동산에서 아빠와 뛰어 놀다가 집에 오는 길에 들어오는 골목입구부터 김치찌개 냄새가 나는 거예요. 그렇게 집으로 뛰어 들어와 아랫목에 깔아놓은 이불 밑에 손을 넣고 몸을 녹이는 푸근한 기억이 있어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때를 추억하면 정말 많이, 행복해 져요.”

★ 정인이로 살 수 있어서 행복했다.

단지 ‘기품 있고 단아한 모습을 지닌 천상 여자’라고 표현 하기에 수애는 대화를 나눠볼수록 말랑말랑한 감정을 지닌 묘한 배우였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녀의 얼굴에 자주 비춰지는 현실적인 미소와 솔직한 속내들은 제한된 시간에 파악해 글로 뱉어내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터뷰가 끝나기 훨씬 전부터 느낄 수 있었다. 도도하거나 말없을 거란 선입견은 ‘여름 이여기’로 다가온 영화가 <그 해 여름>으로 완성된 느낌이 어떤지 묻는 질문의 답으로 확실히 바뀌었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는 소나기를 맞은듯한 시원함이었는데 <그해 여름>으로 완성된 걸 보니 무척 밝고 정감 있는 느낌이 나더라구요. 어제 기술 시사로 봤는데 역시 이 영화는 해피 엔딩이에요. 행복하게 끝나는 게 마음에 들어요.”

배우란 삶을 애정 넘어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스물 일곱 살 수애는 언론 시사 전에 영화를 챙겨보는 부지런함 까지 지니고 있었다. 충무로 시스템상 시간에 쫓겨 시사 스케줄에 맞추는 경우를 제외하고 자신의 영화를 챙겨보는 배우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드물다는 걸 너무나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마음은 앞서도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현실은 이 바닥도 예외가 아님을 그녀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편집으로 인해 시나리오가 지닌 매력이 여과되는 경우도 흔하고 거기에 상처 받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은 배우가 지닌 태생적 숙명일지도 모른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헤어질 수 밖에 없는 현실, 1969년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의 시대적 우울함을 소화해 내야 했던 직업적 소명은 서울에서 봉사 활동 온 석영을 사랑하는 정인으로 완전히 동화됨으로써 그 본분을 다했다. “매 신을 촬영 할 때마다 ‘정인이가 이러지 않았을까요?’란 질문을 했던 것 같아요. 실제로 정인이가 되어 산 그 시간들이 아직도 안 잊혀져요.”

영화 속 연인들이 서로에 대한 호감이 풋풋한 사랑으로 여물어 가는 과정은 그 시대를 살지 않았어도 충분히 공감 가는 일상들로 채워진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의 한 장면처럼 여름 비 속을 냅다 달리기도 하고, 설레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건네기도 한다. 그녀가 담아낸 연애의 감정은 스치듯 지나가도 잔향이 오랫동안 기억되는 편백나무의 향, 그 자체였다. 이 나무는 <그 해 여름>에서 석영과 정인을 이어주는 매개체기도 하다. 수애가 서정인으로 산 지난 3개월이 너무나 소중했기에 그녀를 떠나 보내기가 쉽지 않았던 걸까. “배우 수애가 영화 속 정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뭘까요?”라는 질문을 마지막으로 건네자 순간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다. “아….그 질문은, 정말이지, 여태껏 쭉 정인이랑 같이 있었거든요. 여기. 항상 곁에 있었는데 막상 그 말을 들으니 이제는 정인이를 보내야 될까 봐요. 우와. 그건 마치, 제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아요. 하지만 어느 누구보다 행복한 여자라고, 그 말은 꼭 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정인이로 살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어쩌면 수애가 선택한 정인이도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어서 분명 행복했을 거라고 말해 주지 못했다. 언제나 배우를 추구해 왔고 스타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는 이 솔직한 배우가 더 찬란하게 빛나기 전에 전해줘야 될 텐데.

2006년 11월 29일 수요일 | 글_이희승 기자
2006년 11월 29일 수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

27 )
subinice
심심한 멜로 였지만 수애의 연기 만큼은 만족스러웠습니다. 기사의 마지막 부분이 마음에 와닿네요! 다음 영화는 어떤 선택을 하실지 궁금해 지는 배우죠.   
2006-11-29 14:10
yjmnbvc
수애의 말
"저는 스타가 되고 싶지 않아요."...
수애 정도면 스타 아닌가...??   
2006-11-29 13:20
sayonala83
다른 배우들은 이미지가 정해져있는데.. 수애씨는 감이 안잡혀요~~
그게 매력이긴 하지만 ㅎ   
2006-11-29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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