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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노래는 나의 노래” <아치의 노래, 정태춘> 고영재 감독
2022년 5월 18일 수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정태춘에게도 또 저에게도 어떤 ‘단락’이 될 것 같아요.” 지난 20여 년 동안 독립영화계의 주춧돌이자 든든한 지킴이로 역할해온 고영재 감독이 영화의 의미를 짚는다. 프로듀싱부터 투자, 배급, 마케팅까지 업계 전반을 꿰뚫고 있지만, 첫 연출작을 들고 이제 막 스타트에 선 고 감독. 정태춘의 음악인생과 콘서트를 드라마처럼 느끼도록 만들어 보았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아치의 노래

“때때론 ‘양아치’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그는 하루 종일을 동그란 플라스틱 막대기 위에 앉아 비록 낮은 방바닥 한구석 좁다란 나의 새장 안에서 울창한 산림과 장엄한 폭포수, 푸르른 창공을 꿈꾼다…”(정태춘 작사 작곡 노래 ‘아치의 노래’ 중, 2001)

데뷔곡 ‘시인의 마을’(1977)과 연이은 히트곡 ‘촛불’(1978)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정태춘, 비단 가수만이 아니라 음악으로 사회에 변혁을 촉구한 사회·문화운동가이기도 하다. 가요 사전심의 철폐운동을 주도해 심의 폐지를(1996년) 이끌어 냈고, 노동운동 지원 공연 등 그가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늘 앞자리에 서 왔다.

영화는 ‘아치의 노래’부터 부부의 딸 정새난슬이 부른 ‘들 가운데서’까지 총 28곡을 수록했고, 28곳의 전국 투어 콘서트 실황을 4K로 촬영해 음악적 밀도와 완성도를 높였다. 곡의 핵심 구절이나 귀에 익숙한 멜로디만을 짧게 담은 것이 아닌, 풀 버전을 수록한 곳도 여럿이라 콘서트에 온 듯한 인상을 준다. 데뷔 당시의 주요 방송 보도와 소극장 공연 투어 ‘얘기노래마당’ 등 그간 공개되지 않은 아카이브 영상을 활용하여 시대의 공기와 질감을 오롯이 전한다.

영화의 타이틀을 ‘아치의 노래’로 한 까닭은.
1997년 IMF라는 커다란 파고가 우리 사회를 덮친 후, 그때 연대했던 사람들은 지금 이 사회의 주류가 됐지만, 사회는 급격하게 자본주의가 심화됐다. 철저하게 시장 논리로 돌아가는 사회 구조 속에서 예술가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여러 부분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치의 노래’의 가사를 정말 좋아하는데 딱 봐도 자신(정태춘)을 빗대 표현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를 가장 잘 표현한 노래라고 생각해서 제목으로 삼았다.

연출 시 중점을 둔 부분은.
정태춘은 음악뿐만 아니라 삶의 궤적 자체가 매우 드라마틱해서 타임라인을 잡는 게 쉽지 않았다. 특정 시기만을 다룰지 아니면 음악 전반을 다룰지, 음악 전반을 다룬다면 사회·문화운동가로서의 면을 어떻게 조화할지, 또 그의 현실성을 드러낼 수 있는 관객 인터뷰를 어떻게 배치할지를 고려해야 했다. 고민 끝에 그의 노래는 나의 노래라는 생각을 가지고 음악으로 스토리텔링 하면서, 40주년 콘서트의 현장성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다보니 음악을 하지 않고 은둔한 시간의 정태춘은 어떻게 시각화할지 고민되더라. 당시 형님이 작업한 붓글을 활용했다. 형님이 쓴 글을 (은옥) 누님이 사진으로 찍었는데 이걸 극 중에 삽입했다. 영화의 제목 ‘아치의 노래, 정태춘’, 이 글씨도 형님이 직접 쓰셨다.

곡을 선택하고 배치하는 데 있어 가이드로 삼은 것은.
정태춘의 노래를 대하는 대중의 반응은 초기와 중기 그리고 후기로 나눠지는데 내가 보기에 초기의 서정과 서사는 변함없이 이어오고 있다. 한 마디로 본질적으로 변한 게 없다는 건데 이를 어떻게 전할지 고민했다. 그래서 인터뷰나 영상 혹은 사진 등 어떤 형태로든 당시의 공기를 전할 (자료가 있는) 곡을 골랐다. 또 정태춘만이 아니라 보컬로서 박은옥의 캐릭터를 살리려 했다. 28개 지역의 모든 콘서트를 따라다니며, 한 곡 한 곡마다 테마를 만들어 촬영했다. 그중 두 분이 함께해온 세월과 시대의 공기를 담은 곡을 뽑아 촘촘하게 배치하고자 했다.

콘서트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음악이 들러리가 아닌 주인공인, ‘음악’ 다큐에 걸맞은 접근인데 한편으론 모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연출하면서 관객 입장에서 음악 영화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더라. 평소 좋아하는 음악 영화를 다시 살펴보니 대체로 음악이 아니라 인물의 비하인드를 주축으로 한 작품이 많았다. <서칭 포 슈가맨>(2011)이나 <브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1999) 마저 테마곡은 길게 수록했어도 그 외의 곡은 짧게 나오고 만다. 음악은 배경처럼 깔렸는데 ‘더 듣고 싶다’는 느낌과 함께 ‘왜 길게 안 넣었는지’ 의문이 들어서 가능한 한 길게 삽입했다.

공연을 촬영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우선 생동감 있는 콘서트 실황을 담으려 했으나 막상 보니 형님이 대체로 앉아서 노래를 하더라. 서서 부르는 건 ‘92년 장마, 종로에서’,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정동진 3’ 정도였다. (웃음) 엎친데 덮친 격으로 공연장의 안전 규칙이 강화되어 카메라를 무대에 올릴 수 없었다. 또 공연장마다 촬영 허가 조건이 다른 데다 객석에서 촬영할 시 주변 30여 개 좌석을 비워야 한다는 조건을 단 곳이 많았다. 당연히 찍을 수 있는 사이즈와 앵글, 높이의 제약이 많았고 공연장에서 지정해준 위치가 스피커와 너무 가까워서 결과적으로 미세한 화면의 떨림 때문에 사용하지 못한 장면도 꽤 있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정태춘에게 고향 평택의 들판은 창작의 원천 같은 곳이다. 형과 공연하러 광양에 가던 어느 날 불현듯 평택에 들러 촬영한 적이 있다. 그때 촬영한 들판, 그가 살던 옛집 등을 어떻게 넣을지 고민하다 플래시백 방식으로 삽입했다. 시간순으로 진행되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플래시백 되는 순간이다.

고영재

1995년 친구들과 영화를 하겠다고 무대뽀 정신으로 뭉쳤다는 고영재 감독.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고 제대로 영화를 공부해보고자 대학원에 진학했다. 주변 사람들이 프로듀서를 하면 잘하겠다는 소리를 하길래, ‘그런가’ 하며 해 봤다. 영화를 한다면 독립영화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 안에서 기존의 한계를 바꿔 보고 싶었다.

영화를 잘 만들기 위해서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고 감독은 자기의 경험 부족을 자각, (직접 연출하기까지는)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한 편의 독립영화가 영화관에 걸리기까지 그 전 과정을 체득하고자 했다. 당시 막 설립된 ‘미디액트’(기자 주: 한국영상미디어교육협회가 운영하는 국내 최초 비영리 공공 미디어 센터다)에서 보낸 시간은 독립 영화와 가까워진 값진 시간이었다.

우연하게 인연이 닿은 다큐멘터리 <우리학교>(2007)를 통해 제작 프로듀서의 길에 들어섰다. 고 감독에 따르면 “유니크하고 인간 냄새 풍기는 작품”이다. 결과물을 얻기까지 5년여의 세월을 들일 수 있었던 건 ‘아이들의 순수한 눈망울’이었다. 너무나 순수한 아이들의 모습을 한국사회에 알리고 싶다는 마음 하나가 동력이 됐다. ‘공동체상영’이라는 배급 방식의 접목을 시도한 결과 입소문을 타면서 상영관이 늘었다. 극장 관객수 3만 8천 명, 공동체 상영은 그보다 더 많은 관객이 찾아봐 약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독립영화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2008년 영화진흥위원회가 주도한 중국 연변의 영상 아카데미에서 메인 강사로 활동했다. 그때 프로듀싱한 김광호 감독의 <궤도>는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을 수상했다. 이충렬 감독의 <워낭소리>(2008)를 만난 것 또한 인연이 인연을 낳은 결과다. 293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흥행 역사를 새롭게 썼고, 그렇게 제작자이자 프로듀서로 이름을 알렸다. <똥파리>(2008)의 마케팅 투자, <혜화, 동>(2010)의 투자를 거치며 투자자로서의 탁월한 면모 또한 입증했다. 최근작 <보드랍게>까지 독립예술영화의 제작, 투자, 배급의 일선에서 뛰며 한국독립영화협회를 이끌고 있는 고영재 감독이다.

첫 연출작 <아치의 노래, 정태춘>을 내놓기까지 숙성의 시간이 길었다. 왜 이 작품인가.
2018년, 정태춘 데뷔 4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고 하더라. 그전에도 여러 번 얘기가 오갔지만, 형님(정태춘)이 다큐 제작에 동의하지 않았었다. 내게 (제작) 의뢰가 들어왔고 연출할 적임자를 찾았지만, 쉽지 않았다. 하고는 싶지만, 소위 ‘잘해야 본전’인 작품이 될 가능성이 큰 탓이었다. 정태춘이라는 거물을 담는 게 부담됐던 거지. 게다가 음악 다큐멘터리를 만든 경험이 있는 감독이 흔치 않으니 더욱 그랬을 거다. 그러던 차에 형님이 다른 사람을 찾으려 하지 말고 ‘네가 해보라’고 해서, 그 말에 힘을 받았다. 정태춘, 박은옥 모두 관계맺음이 중요한 분이라 생경한 사람이 연출을 맡으면 프로젝트 자체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직접 연출하니 어떻든가. 프로듀싱과 어떤 차이가 있나.
연출도, 콘서트 공연을 촬영하는 것도 처음이라 당연히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걸 할 수 있을지, 퀄리티 있는 작품이 나올지 초반에는 (솔직히) 잠도 못 잤었다. (웃음) 프로듀서는 전반적인 작업 스케줄을 조율하고 관리하는 것이 큰 역할이라면, 연출자는 모든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촬영과 편집에 있어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거지. 게다가 이번엔 제작, 연출 그리고 투자까지 모두 담당한 상황 아닌가! 다행히 프로듀싱한 경험이 여러 지점에서 힘을 발휘했다. 특히 카메라를 구입할 때 그랬다. 공연을 촬영하기 위해 9대의 카메라가 필요했는데 임대하려하니 만만치가 않더라. 그래서 구입해 촬영하고 신속하게 처리했다.

정태춘과 박은옥의 데뷔 30주년 프로젝트 ‘문화예술인 100인 위원회’에도 참여했다.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2006년 ‘한미 FTA 스크린쿼터’ 운동 당시 문화예술인 뒤풀이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 나는 형님을 알지만,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형님은 나를 모르니 쭈뼛하고 있는데 한 친구가 소개해줬다. 이후 <우리학교>, <워낭소리>, <똥파리> 등의 영화 시사에 형님을 초대했고, 부부가 함께 참석해주면서 인연을 이어왔다. 처음에는 ‘선배님’이라고 불렀는데 먼저 편하게 ‘형’으로 부르라고 해서 그렇게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됐다.

정태춘과 박은옥을 밀접해서 지켜보며 느낀 점이 있다면.
아티스트의 특징 중 하나가 꽂히면 뒤도 안 돌아보고 직진하는 경향인데 정태춘도 그런 사람이다. 그 옆에서 주변을 챙기는 건 박은옥이고. (웃음) 형은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음악화 해왔다면 누나는 평생을 보컬로, 음악만을 바라보며 살았다. 박은옥이 정태춘보다 더 음악을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두 분 모두 인정했다. 누나는 꼼꼼하고 여리고 늘 뒤를 챙기고(스케줄, 연주자 컨디션, 기타 사운드 등등) 특히 보컬 관련해서는 어떤 경외심마저 든다. 정태춘의 서늘한 서정을 한방에 무장해제 시키는 보이스라 두 분은 운명 같은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아치의 노래, 정태춘>에 대한 개인적인 만족도는 어느 정도인가. (웃음) 또 첫 작품을 낸 소회는.
만족도는… 형님이 얘기한 ‘잘 담아져서 고맙다’라는 말로 대신하겠다. 형님은 지난해 12월부터 마음을 바꿔 곡 작업을 천천히 하고 있다. 이제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싶다고, 자신에게 씌워진 여러 수식에 얽매이지 않고 좋은 음악을 하고 싶다고 하는데 정말 너무 기쁘다. 편하게, 아무도 아무것도, 시장의 반응도 의식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걸 하라고 응원했다. 형님에게 이번 영화는 어떤 일단락을 맺은 게 아닌가 한다. 마찬가지로 내게도 일단락의 의미가 있다.

어떤 일단락인가.
영화를 처음 맡은 2018년 당시, 극영화를 준비하여 시나리오 작업 중이었다. OTT를 중심으로 콘텐츠 환경이 급변하고, 일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에너지가 고갈된 것도 있고 여러모로 방향을 잃어버린 시점이었다. 이번에 개봉을 준비하면서 형과의 작업을 통해 힐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오늘 강수연 선배의 장례식장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여러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여전히 독립영화와 그 메이드를 하는 일을 사랑하지만, 이제는 한국독립영화협회와 관련한 여러 직을 내려놓고 원래 계획했던 대로 극영화를 만드는 데 집중하려 한다. 결혼 15년 차에 남편에게 반년간의 휴가를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떠나는 중년 여성의 이야기가 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영화인으로서 또 한 개인으로서 고영재는 어떤 사람인가.
영화인으로서… 정태춘과 박은옥처럼 천재과는 아니고 좋은 사람과 협업을 잘 하는 사람, 이건 연출자로서도 비슷하다. 개인으로서는 재미없는 사람(웃음), 나르시즘도 좀 있고 예민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함께 일하는 사람이나 집단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사람이다. 어쩔 수 없이 사람은 모순된 존재라 그 특징이 어떤 하나로만 발현되지 않지 않나. 나르시즘과 공동체에서의 배려는 동전의 양면 같다고 생각한다.


사진제공_NEW

2022년 5월 18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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