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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한 구호보다 곁을 지키는 연대의 마음으로 <아너: 그녀들의 법정> 이나영 배우
2026년 3월 27일 금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배우 이나영이 다시 한번 존재감을 증명했다.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며 막을 내린 ENA 드라마 <아너: 그녀들의 법정>(이하 <아너>)의 중심에는 이나영이 있었다. <아너>는 거대한 스캔들이 되어 돌아온 과거에 정면 돌파로 맞서는 세 여성 변호사의 뜨거운 미스터리 추적극. 이나영은 성범죄 피해자 변호 전문 로펌 L&J(Listen&Join)의 대외적 메신저 ‘윤라영’ 역을 맡아 뛰어난 언변과 날카로운 공격력, 빼어난 외모의 셀럽 변호사로서 새로운 면모를 선보였다. “아프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감정을 누르며 연기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그 지점이 오히려 매력적이었다”는 이나영. <아너>를 통해 ‘정의’라는 거창한 구호보다 ‘상처 입은 이들의 든든한 연대’를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는 그의 말을 들어본다.

자체 최고 시청률로 종영했다. 주변 반응이나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감사하다. 본방송을 이렇게 많이들 보시나 싶어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내가) 인맥이 넓지 않은데도(웃음), 계속 연락이 와서 스포일러 좀 해달라고 부탁하더라. 심리 스릴러 요소가 있어 궁금증이 계속 이어져야 했는데, 그게 시청자들에게 통했다는 생각에 다행이라 느꼈다. 한편으로는 무거운 주제라 진입 장벽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많은 분이 공감해 주셔서 감사하다.

시나리오를 처음 보았을 때 어떤 점에 가장 끌렸나. 동명의 스웨덴 원작도 참고했는지 궁금하다.
처음에는 독자의 마음으로 소설책을 읽듯이 읽었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읽으니 ‘내가 이 작품 속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지더라. 그동안 전문직 캐릭터나 장르 드라마에 대한 경험이 없어서 새롭기도 했다. 사실 긴 대사만 잘 외우면 되겠다고, 상대적으로 수월하지 않을까 하며 들어갔는데(웃음)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 신이었다. 대놓고 감정 신이 아닌 장면에서도 계속 연결된 느낌에 혼자 감정이 많이 올라왔던 것 같다. 원작은 스웨덴과 우리나라의 정서가 많이 다르고, 또 캐릭터 수도 줄어든 터라 굳이 찾아볼 필요는 없겠더라. 감독님도 안 봐도 된다고 하시고.

미모에 능력까지 모두 갖춘 ‘윤라영’이다. 뉴스 방송을 통해 상대방을 저격하거나 공개적으로 싸움을 거는 등 맹렬하고 저돌적인 면도 있는데 캐릭터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무얼까.
윤라영은 정의감에 불타는 잔다르크라기보다, 상처를 감추고 버티며 나아가야 하는 인물이다. 트라우마가 있지만 외부 활동을 할 때는 자기 성향을 완전히 바꾸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런 면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초반 피해자인 ‘조유정’(박세현)에게 버럭 화를 내며 살아남으라고 하는 조언도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역시 못하고 있지만 ‘유정’은 그랬으면 하는 거다. 위로에 서툴고 문자 하나 보낼 때도 고민하는 모습은 나와 좀 닮은 것 같다.(웃음)

윤라영은 깊은 트라우마와 함께 엄청난 반전을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모성애에 대해 생각해 봤을 것 같다.
연기하는 나조차 철저하게 모르고 있어야 하는 부분이었다. 알면서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건 다르니 말이다. 라영의 대사 중 이런 말이 있다. ‘내 과거로부터 너를 지키고 싶었다’고. 이는 아픔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또 다른 유형의 모성애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된 후, 라영의 마음이 어땠을지 그 고통이 정말 크게 다가오더라.

법무법인 사명이 L&J(Listen&Join)다. ‘연대’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악의 카르텔에 맞선 여성 연대’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접근했나. <아너>는 성폭력을 다루고는 있지만, 그보다 더 전반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특정 성별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이 가진 다양한 ‘악’에 대한 이야기라고 느꼈다. 단순히 남성의 거대한 악이나 혹은 여성의 어떤 집단적인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성별을 떠나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여러 문제들이 존재하고, 그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욕망을 스스로 통제하는 동시에 다양한 형태의 ‘악’과 계속 싸워야 하는 존재인 것 같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단면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 부당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 대한 연대감에 더 집중하려고 했다.

연대의 본질은 뭘까.
우리가 막 주먹을 쥐고 "이건 정의야, 무조건 이겨야 해"라고 외치는 식의 연대는 아니지 않나.(웃음) 세 친구가 서로 계속 무너지면서도 꾸역꾸역 나아가는 모습, 상대역을 보기만 해도 눈물이 터져서 제대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슬펐던 그 마음들이 결국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연대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상처를 본인의 방식으로 딛고 살아남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주고 기다려 주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한 진정한 연대였다. 더불어 거대 로펌 해일의 ‘성태임’ 대표(김미숙)나 ‘백태주’(연우진) 같은 인물들처럼, 악을 악으로 풀면 안 된다는 점이 <아너>의 메시지 중 하나가 아닌가 한다.

여성 연대가 뻔하게 흐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아 좋더라. 세 친구 간의 관계성이 묵직함 가운데 경쾌함을 더한 것 같다. 이청아, 정은채와의 호흡은 어땠나.
20년 지기 친구 설정이라 리딩 때 연극처럼 리허설을 제안할 만큼 ‘척하지 않는 연기’를 하려 했다. 감독님이 배려해 주셔서 각자 장면을 찍다가 한 달 뒤쯤 세트에서 만났는데, 이미 다들 자기 캐릭터가 되어 있었다. 둘 다 성격들이 무던하기도 하고, 나중엔 쳐다만 봐도 든든한 가족 같더라. 사실 보기만 해도 감정이 터져서 제대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슬픈 순간이 많았다.

세 분 모두 낯을 가리는 성향이라고 들었는데(웃음)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
평소에는 단체 메시지도 자주 하고 서로 장난도 많이 치는 편이라 분위기가 굉장히 화기애애하다. 다만 실제로 오랜만에 만나면 아직은 조금 어색한 순간도 있다. 함께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다 보니 갑자기 팔짱을 끼거나 스킨십을 하는 것도 조심스럽더라. 촬영이 2주 정도 비는 동안 다른 작품을 찍고 다시 돌아왔을 때는 나도 모르게 낯가림이 생긴 적도 있었다. 그때는 서로 ‘우리 왜 못 쳐다보냐’고 장난을 치면서 자연스럽게 풀어갔다.

캐릭터의 입체성을 살린 스타일링 컨셉에 대해서도 궁금하다.
여성 캐릭터가 세 명이다 보니 각자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도 시청자분들이 좋아하실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캐릭터가 모두 달라서 따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준비 과정에서부터 스타일링이나 취향이 자연스럽게 구분됐다. 라영의 경우는 초반에 색감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다. 전체적으로 드라마의 톤이 너무 무채색으로 흐르지 않도록, 4화에서 ‘박지열’(서현우)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 색을 살리는 방향으로 스타일링을 잡았다. 대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인 만큼 시각적으로도 그런 역할을 해주길 바랐다. 이후에는 극의 흐름에 맞춰 점차 톤을 낮춰갔다.

또 하나 고민했던 부분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여성 변호사’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싶다는 것이었다. 요즘은 실제 여성 변호사들도 유튜브 등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훨씬 친근하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보니, 기존 이미지에 갇히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캐릭터를 만들 때도 최대한 열어두고 접근했다.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둔 뒤 공감되지 않는 부분이나 맞지 않는 요소들을 하나씩 덜어내면서 점점 구체화해 나갔다. 그런 과정에서 스타일링 역시 쉽지 않았지만 캐릭터를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박지열 캐릭터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라영의 지열 심폐소생술 장면이 화제더라. (웃음) 비하인드가 있다면.
서현우 씨와는 벌써 세번째 작품이라 제일 반갑고 편했다. 역할 관계상 웃으면 안 되는데 워낙 재미있는 배우라 외면하느라 힘들었다.(웃음) 심폐소생술 신에서 내가 힘 조절을 못 해 미안해하니 본인이 알아서 하겠다는 거다. 내가 누를 때 숨을 '흑흑흑' 내뱉어서, 울어야 하는 장면임에도 그 모습이 너무 웃겨 감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카메라에 보이지 않게 최대한 얼굴을 가리면서 버텼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연기적으로는 굉장히 든든한 파트너였다. 워낙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 어떤 톤으로 가더라도 자연스럽게 호흡이 맞았고, 함께하는 장면들은 개인적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법정 신이나 뉴스, 기자회견, 또 친구들과 있을 때 등 상황에 따라 톤 조절을 어떻게 했나.
뉴스나 기자회견 장면은 테크닉이 필요한 신이었다. 단순히 감정을 터뜨리거나 아나운서 톤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 피해를 감추면서도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성 트레이닝을 통해 감정의 강약과 결을 조절하는 데 집중했다. 일상적인 대화 장면은 자연스럽게 풀어낼 수 있었지만, 피해자나 의심되는 인물을 만나는 장면에서는 그 중간 톤을 잡는 게 쉽지 않았다. 때로는 너무 방송 톤으로 기울기도 하고, 반대로 감정이 약해 보일 때도 있어서 현장에서 감독님과 계속 조율해가며 만들어갔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법정 신이었다.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감정에 묶여 살고 싶지는 않다”는 대사를 통해 인물의 복합적인 내면을 표현하려 했다. 분명 분노는 존재하지만 그것에 잠식되지 않으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촬영 중 윤가은 감독의 영화 <세계의 주인>을 보고 큰 위로를 받았다고.
평소 윤가은 감독님 작품을 늘 기다려왔었다. <세계의 주인>을 보면서 너무 눈물이 나서 이상할 정도로 울었다. 좋은 영화를 만나면 몇 달간 행복하다. 당시 라영의 아픔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던 차였는데, 영화를 보며 ‘아, 내가 마음껏 아파해도 되는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감독님과 문자 하면서 서로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며 위로를 나누기도 했다.

<아너>에 대해 남편(원빈)은 뭐라고 하던가. 또 원빈 씨의 연기 복귀에 대해 궁금해하는 팬들이 많다.
시나리오 초반을 보고 ‘너 정말 힘들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해도 이상하고 안 해도 이상한, 연기하기 까다로운 장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작품을 전부 같이 보지는 않았고 일부만 같이 보았는데, 내 목소리를 스스로 듣는 게 왠지 창피해서 따로 보라고 말하기도 했다.(웃음) 자꾸 반응을 떠보듯 물어보길래 이렇게 궁금해하는 것 자체가 다행이라고 느꼈다. 그분(원빈) 역시 (작품을) 보고는 있다. 내가 이렇게 계속 대신 말해줘서 그렇지(웃음), 연기에 대한 갈망은 여전하다. 좋은 영화를 같이 볼 때는 우리끼리 ‘좋겠다’며 부러워하기도 한다.

<로맨스는 별책부록>에서는 경단녀의 현실을, <박하경 여행기>에서는 지친 현대인의 작은 힐링을, 그리고 이번 <아너>에서는 연대의 힘을 보여줬다. 작품 선택 기준과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작품을 선택할 때 거창한 화두를 던져야 한다거나 하는 테두리는 따로 두지 않는다. 기준은 언제나 시나리오이며, 내일이라도 마음에 드는 글이 있다면 바로 다음 작품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열려 있다. 전작 <박하경 여행기>가 일상의 휴식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인물이 가진 상처와 부서짐에 마음이 움직여 선택하게 되었다. 결핍이 있는 캐릭터에 본능적으로 이입하는 편인데, 이러한 취향이 시대의 고민과 맞닿으며 내재화된 걸 수도 있다. 나 자체가 좋은 작품을 보는 걸 워낙 좋아해서 이런 행복을 시청자분들께도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지금은 어떤 한계를 짓기보다 주어진 길을 한 발 한 발 집중해서 나아가고 있다.



사진제공. 이든나인



2026년 3월 27일 금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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