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천사!” 이언희 감독에게 김고은은 천사 같은 존재다. 우여곡절 끝에 관객을 찾은 <대도시의 사랑법>의 시작은 동명 원작 소설을 읽은 이 감독이 ‘재희’라는 캐릭터에 꽂혔기 때문. 이렇게 애정이 간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 준 김고은이니, 천사 같다는 의미도 당연히 수긍간다. 재희의 소울메이트 ‘흥수’로 분해 완벽한 케미를 보여준 노상현은 이 감독에게 또 다른 천사다. 두 배우가 선택해 준 덕분에, 재희와 흥수의 스무 살에서 서른셋까지 14년 우정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이언희 감독을 만났다. <미씽: 사라진 여자>(2016) 이후 스스로 이야기꾼보다는 ‘해석가’, 다시 말해 원작을 자기만의 시각과 시선으로 담아내는 것이 자기 몫인 거 같다고 생각한다는 감독이다. <대도시의 사랑법>을 만들어, 이 영화가 대중 앞에 선보일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박상영 작가의 동명 소설에서 ‘재희’ 파트를 원작을 한다. 어느 면에 끌렸는지, 또 영화화하면서 주안점은.
소설을 읽고 처음부터 영화화를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 독자로서 박상영 작가의 글을 재미있게 읽었었고, ‘대도시의 사랑법’은 크게 기대하지 않고 보기 시작했는데 그만 ‘재희’라는 캐릭터에 꽂혀 버렸다. 무언가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할지. 나중에 생각해 보니, 데뷔작 <…ing >(2003) 를 보면서 이 영화를 다시 찍으면 어땠을까 하는 궁금함에서 시작했던 것 같다. ‘대도시의 사랑법’이라면 새로운 뭔가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 대사나 설정 등 디테일한 포인트가 있겠지만, 재미있게 각색하고자 방향성을 잡았다. 무엇보다 소설의 ‘영’(극 중 ‘흥수’)이라는 캐릭터의 색과 박 작가의 시선을 잃지 않으면서 ‘재희’가 보였으면 했다.
박 작가의 인터뷰하는 모습이 영화 속에 등장한다. 기존 인터뷰 영상을 활용한 건가. 또 박 작가는 ‘영화가 너무 잘 나왔다’고 SNS에 칭찬 글을 올렸던데.
흥수는 소설을 쓰고 싶지만, 잘할 거라는 확신이 없어 회피하고 방어적으로 반응하는 인물이다. 마침 박 작가님의 인터뷰 영상이 흥수의 이런 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 작가님이 인터뷰한 시기도 적절했고, 극 중 사용할 사진도 작가님께서 직접 선택해 주셔서 만든 장면이다. (웃음) 사실 언론시사회 후 뒤풀이가 공식적으로 없었는데 급작스럽게 생겼고, 이때 작가님이 참석해서 너무 좋았다고 말씀해 주셨다. 자리가 파하도록 새벽 2~3시까지 남아 계시면서 진심으로 응원해 주셨다.
김나들 작가가 각본을 맡았는데, 젊은 여성이 공감할 좋은 대사가 정말 많았다. 예를 들면 ‘밤거리가 위험하다’는 말에 재희가 ‘남자들이 일찍 들어가면 되지!’ 하고 받아 치는 말 등. (웃음)
원작을 읽고 대사가 좋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평소 제일 못하는 일이 대사를 쓰는 일이지만, 김나들 작가님이 따로 계셔서 한숨 놨는데 이렇게까지 좋은 대사를 써줄 줄은 미처 몰랐다. 언급한 ‘남자들이 일찍 들어가면 되지!’라고 재희가 받아칠 때 우리끼리 ‘천잰데?’ 하면서 빵 터졌었다. 흥수의 ‘개처럼 살았다’ 라는 대사도 정말 좋았던 것 같다. 재희가 ‘내가 좀 더 개 같이 살아줄게’ 하는 장면에서는 편집하면서 울기까지 했었다. 좀처럼 울지 않는데 말이지. 또 의미 있는 가사의 음악을 많이 사용했으니, 가사를 음미하면서 들어도 좋을 것 같다.
기획부터 개봉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사실 우여곡절이 없는 영화는 없다. (웃음) 그런데 이번에 특히 긴장된 건 사실이다. 고은 씨도 언론시사날 아침까지 긴장했다고 하더라. <대도시의 사랑법> 기획을 시작한 건 <탐정: 리턴즈>(2018)가 끝난 직후였다. 다행히 영화가 흥행해서 나에 대한 평가가 좋을 때라, (웃음) 시작할 수 있었다) 2019년 2월에 박상영 작가를 만나 판권계약도 하고, 출발은 좋았다. 한데, 중간에 코로나가 터지고 또 상업영화로 괜찮겠냐는 의구심을 받기도 하면서… 과연 제작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운이 좋게도 메이저 투자베급사(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가 ‘이제 이런 영화를 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먼저 나서 주었다. 그 후에도 여러 가지가 걸리다 보니 꼬박 5년이 걸렸는데 판권 만료가 5년이라 그 기간 안에 끝내야 하는 절박함이 있었다! 고은 씨도 2년이나 기다려 줬고, 정말 우리 영화는 고은 씨가 없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거다. 고은 씨 칭찬은 해도해도 끝이 없겠다. (웃음)
‘재희’ 캐릭터에 김고은 배우의 어느 면이 어울린다고 생각한 건가.
평소에 워낙 관심이 많았고, 영화 <은교>(2012) 때부터 한 번 꼭 같이 작업하고 싶었다. 원작에는 재희의 외모에 관해 직접적인 표현이 없지만, 개인적으로 예쁠 거라고 생각했고, 한창 물이 오른 고은 씨와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흥수’ 역은 오랜 시간 배우를 물색했다고.
맞다, 흥수를 찾던 중 <파친코1>이 오픈했고, 상현 씨를 보고 이 배우다 싶어서 연락드렸다. 평소 무언가를 할 때 고민이 많은 편이다. 예를 들면 뭐 하나를 사도 한 번에 사지 않고 여러 번 생각하는 스타일이다. 그럼에도 만나서 바로 ‘저희 작품 하실 거죠?’ 이랬었다. (웃음) 옆에 있던 매니저가 고려해야 한다고 잠시 머뭇거리더라.
일명 ‘그림체’ 얼굴합이 좋더라. 그런데 재희와 흥수의 우정이 메인 테마지만, 퀴어 영화적인 요소가 있다. 이를 모르고 두 남녀의 러브스토리로 오해한 관객도 있을 것 같은데…
두 분 다 무쌍이라 그런지 그림체가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라. 초반에는 두 배우의 결이 너무 비슷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러브스토리로 오해하는 점에 대해서는… 흥수가 게이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긴 건 아니다. 마케팅 방향도 마찬가지로 알고 있다. 언급했듯이 두 친구의 우정, 관계성을 보여드리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그들을 옆에서 보기만 해도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자연스럽게 접근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보면 쉽게 생각한 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도시의 사랑법>을 보고 나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느낄 거로 생각한다. 로맨스 영화가 아닌 휴먼 드라마라는 소개가 맞을 것 같다.
스무 살 대학 신입생 때 만난 두 친구가 서른세 살이 되기까지, 14년간의 세월을 차분하게 담아냈더라. 세월의 흐름을 어떻게 표현하고자 했는지, 그 포인트는.
단편을 장편화 하면서 또 긴 시간을 압축하는 데 있어, 캐릭터의 공백이 느껴져서 이입이 깨지지 않도록 신경 썼다. 그러다 보니 상업영화치고는 몽타주가 많은 편이라 고민했지만, 재희와 흥수의 지난 사연을 담아내고 싶었다. 자주 등장하는 클럽씬의 경우, 내부 분위기와 인테리어 같은 부분을 달리하여 나름의 시간 변화가 느껴지게 했다. 또 몽타주가 많아서 재희의 의상이 미친 듯이(웃음) 많이 필요했고, 200벌 이상이 동원됐었다. 의상팀의 조합 외에도 고은 씨가 ‘내가 재희라면…’하면서 입어보는데 과연 이었다. 알아서 너무 잘하더라. <대도시의 사랑법>은 어떤 굵직한 메인 사건이 있다기보다, 두 주인공의 인생을 따라가는 이야기라, 상업영화로 만들기에 쉬운 소재는 아니었다. 그 때문에 모두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없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메인 사건이 있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웃음)
노상현 배우가 불안하고 흔들리는 흥수의 아이덴티티를 잘 표현했더라. 원작에는 없는 재희의 고민이나 심리적 동요도 많이 반영했다.
사실 이 영화는 배우가 선택해줘서 만들 수 있던 영화다. 아주 유명한 몇몇 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감독이 선택하는 입장은 아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좋은 배우들 덕분에 작품이 잘 나왔다고 생각한다. 김나들 작가를 필두로 나까지 다섯 여성이 모여 각본을 썼는데 그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다. 한 분은 이야기를 쓰면서 연애하겠다고 했는데 정말 연애해서 결혼까지 했다. 원작을 보면 ‘영’의 시선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재희’가 잘 보이지 않는 면이 있다. 재희가 아무리 강심장이고 자기 하고 싶은 건 다 해야 하는 자유로운 영혼이라지만, 일방적으로 매도 당하는 상황에서, 과연 멀쩡할 수 있을까. 당연히 동요하지 않을까. 처음에는 센 언니나 굳건한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 어떻게 매번 그렇게 강하기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재희가 회사 내에서 겪는 성차별적인 발언이나 행동 또 게이를 향한 사회적인 시선, 데이트 폭력 등은 상당히 전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섯 명이 이야기하면서 무언가 보편적인 이야기를 찾으려 했던 것 같다. 남성을 매도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모두가 한 번쯤 겪을 수 있는 에피소드를 찾다 보니 극 중 같은 사례가 떠올랐다.
재희의 결혼으로 시작과 마무리를 하는데, 결혼이라는 결말에 고민은 없었나.
솔직히 너무 고민했다. 그런데 원작에서 결혼으로) 시작하는 부분을 꼭 살리고 싶었다. 결혼 장려 영화는 아니지만, (웃음) 재희는 다 경험해 보고 싶은 인물 아닌가. 갔다가 돌아올 수도 있는 일이니까. 흥수의 마지막 대사인 ‘잘 다녀와’는 언제든 열려 있는 선택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결혼식에서 흥수의 축하공연인 ‘배드걸 굿걸’의 춤과 노래는 이 영화에 유쾌함을 한껏 끌어올리는 장면이 아닌가 한다. 빵빵 터지더라.
원작에서는 아마 그룹 핑클의 ‘영원한 사랑’인가를 부른다. 그래서 시기적으로 맞는 노래를 찾다가 ‘배드걸 굿걸’을 생각해 냈는데 가사가 너무 완벽한 거다. 마치 흥수가 재희에게 보내는 편지 같다고 할지. 상현 씨는 댄스가 부담된다고 했지만, 재희에게 ‘너를 통해 나를 찾게 됐다는 걸 알리는 퍼포먼스 혹은 마음’이라고 하니 열심히 연습하더라.
재희의 남자이자 신랑으로 이상이 배우가 특별 출연했다. 특출이지만, 캐릭터가 좋아도 너무 좋던데…(웃음)
남들은 이상하다고, 튄다고 쳐다보는 재희를 멋지다고 하는 남자라 재희가 결혼까지 간 것 아닐까 한다. 고은 씨와의 친분으로 함께했는데 둘이 너무 잘 맞고 촬영할 때마다 그렇게 웃어서 왜 웃냐고 물을 정도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결혼식 장면을 촬영했다.
지난해 인기를 모은 디즈니+ <킬러들의 쇼핑몰>을 연출한 이권 감독과는 부부 관계인데, 서로 작품에 대해 조언하고 하는지.
이번에는 어떤 공유도 못 했다. 작품을 처음 보는 쌩눈이 필요한 순간에는 <킬러들의 쇼핑몰> 작업하느라 너무 바빴고, 짬이 나서 보여줄 타이밍에는 지금의 버전이 아니었던 터라… 이번 버전은 토론토영화제에서 처음 봤는데 ‘좋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하더라. (기자 주: <대도시의 사랑법>은 지난 9월 5일 개막한 토론토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호평받은 바 있다.)
<대도시의 사랑법>을 통해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너무 좋은 영화가 많은데 ‘내가 굳이’ 하며 스스로 의심이 있던 터라 ‘이 영화가 나와서 다행이다’라는 말을 들으면 좋겠다. 우리 영화가 일부러 웃긴 장면을 의도한 건 없는데, 토론토영화제에서도 코미디라고 표현하는 분이 계시더라. 인생이란 것이 그런 것 같다. 많은 분이 웃음이 터진 복분자 에피소드는 사실 김나들 작가 친구의 아버님 사연이 반영된 거였다. 정말 저런 경우가 있을까 싶은데 정말 있는 거지.
영화 한 편이 끝날 때마다 관객에게 어떤 감정을 전달하고 싶은지 정리해보곤 한다. <탐정: 리턴즈> 같은 경우는 ‘재미’였다. <미씽: 사라진 여자>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피드백, 스탭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영화에 자기 이야기를 결부해 이야기해주어서 기억에 남는다. 영화를 통해 내가 모르는 세상, 내가 모르는 사람을 알아가고 싶은 바람이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는 이러이러 했어’ 하는 이야기를 들었으면 한다.
사진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2024년 10월 16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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