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검색
검색
5회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레퀴엠 - 길 잃은 양을 구원할 자 그 누구인가. | 2001년 7월 13일 금요일 | 모니터 2기 기자 - 박우진 이메일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 양. 푸른 풀밭 맑은 시냇물가로 나를 늘 인도하여주신다..."

기독교에 몸담았던 어린 시절의 저는 이런 찬송가를 즐겨 불렀었더랍니다. 그리고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죠. 왜, 그 땐 길 잃은 어린 양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요. 인도자를 따라 줄이어 정해진 길을 가는 어린 양떼가 아닌, 한 눈 팔다 그 행렬을 잃어버린, 혹은 단조로움과 지루함을 못 견뎌 행렬을 뛰쳐나간 '불량'한 양은 떠올릴 수는 없었을까요. 어린 저의 눈에 비친 좁은 세상은 밝은 햇살만이 쏟아져 내리고 길은 반듯하며 공기는 마냥 맑기만 했던 것입니다. 아니, 그 이외의 것들에 눈을 돌리기엔 너무 겁이 많았던 거죠. 아직은 두려웠던 겁니다.

저는 이제야 길 잃은 양들을 발견합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그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보호를 받는 '건전하고 말쑥한' 양들보다 기실 더 많습니다. 아니, '훨씬' 많습니다. 제멋대로 헝클어진 털을 한 채, 부르터서 진물이 흐르는 앞발을 내밀며 처절하게 매애 매애 울어대는 더러운 양들. 그 울음이 너무 섬뜩해서 차마 눈을 감고, 귀를 막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에요. 하지만 애처로운 제 심장은 어느덧 그들의 눈가처럼 축축하게 젖어있습니다.

<레퀴엠>에서 저는 늪에 빠진 양들을 봅니다. 악마와의 약속처럼 매력적이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검고 진득한 흙에 발을 디딘 그들. 여름에서 가을로, 그리고 겨울에 이르는 계절의 흐름처럼 거스르지 못하는 늪의 끈적한 손길에 이끌려 어둑한 바닥으로 침전해 가는 그들에게, 만물이 소생한다는 따뜻한 봄날은 결국 없습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어디쯤일까요. 그 둘 사이에 어떤 공간이 있다면 <레퀴엠>의 인물들은 바로 그 곳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 등돌리고 환상을 향해있겠죠. 그들의 현실은 해리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처럼 페인트도 칠하지 못하고 고물 TV만 덩그라니 놓여있는 남루하고 칙칙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난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입니다. 군데군데 이가 빠지고 텅텅 빈 마음이 못 견디게 허전해서 사라는 초콜렛을 우적우적 집어 삼키며 재잘대는 TV를 켜고, 해리와 마리온은 마약으로 얻은 '인스턴트 환상'으로 가슴의 공간을 꾸역꾸역 채웁니다. 하지만 연기처럼, 새벽녘 안개처럼 금새 걷히고 마는 짧은 위안은 오히려 마음을 더욱 갉아내기만 하죠.

사라가 집착했던 빨간 드레스는 과거의 기억입니다. 그 옷을 입은 그녀와 남편, 그리고 외아들 해리가 다정하게 어깨를 기댄 채 웃고 있는 사진 한 장은 아련한 행복의 순간이죠. 그녀는 TV에 나가서 남편과 아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하면 과거가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품 안에 들어올 것이라고, 가차없이 바스라질 것이 분명한 위태로운 믿음을 아둥바둥 부여잡은 채로 말이죠. 강렬한 빨간 색은 무미건조한 그녀의 일상과 대비되어 눈이 시리도록 아프게 빛납니다. 드레스를 입기 위해 사라는 살을 빼려하고, 그녀가 초콜렛 대신 삼키는 알약들 또한 '과거'처럼 오색찬란한 빛깔을 지니고 있죠. 하지만 그 화려함은 거짓이었습니다. 약을 먹은 그녀는 아름다워지기는커녕 바람빠진 풍선처럼 그나마 남아 있던 '속'을 잃은 채 점점 쭈그러들죠. 가련한 사라, 그녀의 죄는 '외로움'이었습니다. 과거를 망각하지 못한 벌은 너무나 가혹했습니다.

이렇듯 환상에 중독된 어린 양들이 파국으로 치달아 가는 <레퀴엠>의 마지막 부분은 너무나 처절합니다. 긴박하게 오가는 영상들, 논리적인 체계는 무너지고, 현실과 환상은 뒤죽박죽 엉키죠. 저는 불안합니다. 그렇게 꺅꺅 비명지르다 스크린이 폭발해 버릴까봐, 그래서 쨍그랑 부서진 영화의 파편이 곧장 날아와 제 심장에 예리하게 꽂힐까봐서요. 어느새 의자를 꼭 잡은 제 조마조마한 손에는 한 줄기 땀이 배어 듭니다.

이 감독, 관객 기운 빠지게 하는데 일가견이 있습니다. 다양하고 새로운 영화 기법을 장면 장면에 딱딱 들어맞게 참 잘 썼군요. 경찰에게 쫓겨 도망가는 타이론의 불안한 표정을 생생하게 잡아내는 카메라 기법이며, 혼란스럽고 반복적인 이미지의 교차 편집. 특히 해리와 마리온 사이를 갈라놓는 화면 분할은, 함께 있어도 사랑한다 해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타인의 본질, 뛰어넘을 수 없는 사람 사이의 경계와 그로 인해 파편화된 인간의 고독, 현실과 환상은 융화될 수 없음에서 비롯된 절망을 드러내는 데 한 몫 합니다. 잔뜩 긴장한 채 감독의 수법에 이리 저리 끌려다니다 푹 지친 탓에 집으로 가는 길을 터벅이는 제 발걸음은 한참이나 무거웠죠.

씁쓸합니다. 늪에 빠진 양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일 수도 있는데. 그들에게 가해진 처벌은 냉정하죠. 우리는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길을 헤매서는 안 됩니다. 잘못된 길을 가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겁니다. 사는 것은 외줄을 타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군요. <레퀴엠>은 죽은 자에게 바치는 위로의 노래가 아닙니다, 죽어가는 자들에 대한 혹독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0 )
1

 

1

 

1일동안 이 창을 열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