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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카드가 없으면 어때요-’와일드 카드’를 보고
이해경의 무비레터 | 2003년 5월 30일 금요일 | 이해경 이메일

'퍽치기'는 정말 나쁜 범죄라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에서 장형사는 강간보다 나쁘다고 했는데, 그런 식으로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구요. 그렇게 말할 정도로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적어도 몇 가지의 '치기' 범죄들 중에서는 가장 악질입니다. 가령 '아리랑치기'라고 하는 것은 이 영화의 대사에도 나오는 대로, 취객이 잠들 때까지 기다려준다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고전적인 '소매치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들키지 않고 감쪽같이 해치우기 위해 마네킹을 상대로 피나는 기술 연마를 거듭한다잖아요. 털린 걸 알아도 겁 없이 쫓아가지만 않으면, 안면에 면도날로 오선지를 그리는 불상사는 당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와일드 카드>에서는 지하철 소매치기 일당이 칼을 꺼내 들고 위협을 가하지만, 상대가 형사이니 만큼 정상 참작을 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이거 이러다가 범죄를 옹호한다는 비난을 받아도 싸겠습니다. 요컨대 인명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지는 않는다는 얘기지요. 그런데 '퍽치기'는 정말 무섭네요. 다짜고짜 사람부터 죽이고 본다… 특히 영화에 나오는 그 큼지막한 쇠구슬은 정말 골 때리는 흉기였어요.

행여라도 돈 좀 있는 것으로 오해 받을 행동은 말아야지, 아예 앞뒤로 써 붙이고 다닐까? 나 죽여 봤자 헛수고예요, 차비도 못 건져요… 그런 실없는 생각도 해가면서 영화관을 나서다가 아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영화를 어떻게 봤냐고 물었더니, 재미있게 봤다고 했습니다. 목소리나 표정이 아주 재미있게 봤다는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좀 아쉬워요. 다른 쪽도 좀 다뤘으면 좋았을 텐데… 사회나 문화와 연관시켜서 말이예요. 퍽치기는 너무 단순 무식해요." 저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가 아쉽다고 지적한 그 점이 바로 <와일드 카드>의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좀 숨겨 놓은 게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안달하지 않는 담백함 같은 것 말입니다. 물론 틀에 박힌 선악의 구분을 뛰어넘어 범죄의 사회 문화적인 배경과 의미를 훌륭하게 짚어낸 영화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범죄를 다루는 영화가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요. 제가 보기에 아직껏 한국 영화에서 그런 시도가 성공한 예는 없습니다. 시도 자체가 억압당했던 암흑기를 불과 10년 전까지 겪어야 했으니까요. 시간이 걸리겠지요. <살인의 추억>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가 그 영화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정치적 시대 상황에 주목하는 글을 쓰기는 했지만, 그것이 곧 그 영화가 그런 측면을 아주 잘 담아냈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뭐랄까, 착 달라붙는 느낌… 그런 게 모자랐어요. 거듭 말씀드리건대, <와일드 카드>는 그런 생각일랑 붙들어매고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제 사회적인 문제 의식에 눈감도록 강요당하지 않게 된 환경에서, 그런 데 눈돌리지 않는 것은, 외면이나 회피라기보다는 감독의 자유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잠깐요, '퍽치기'는 그 자체로 사회 문제 아닌가요?

영화를 깊이 있게 보기 원하는 관객에게는 <와일드 카드>가 좀 심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아마 영화의 소재를 문제 삼아, '퍽치기'가 너무 단순무식하지 않냐는 반응도 보이게 되는 거겠지요. 그렇습니다. 단순하고 무식하기 이를 데 없지요. 제가 아까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사실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의 말에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그래도… 사람이 죽는데…" 그랬더니 그는, 요새 사람 죽는 게 뭐 큰일이냐는 취지의 반박을 해오더군요. 물론 ‘퍽치기’가 영화의 소재로는 약하다는 맥락에서 한 얘기였습니다. 딴에는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전쟁, 테러, 사스… 그런 세계적인 난리법석이 아니더라도, 별의별 희한한 이유로들 죽어나가지 않습니까. "광 팔고 죽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농담으로 마무리하기에 저도 그냥 웃고 말았습니다만, 속에서는 그래도 그렇지가 않은데… 하는 생각이 수그러들지 않더라구요. 한꺼번에 수백 명이 몰살당하는 소식에 익숙해졌다고 해서, 한 번에 하나씩 그야말로 단순무식하게 퍽! 하고 사라지는 목숨을 가벼이 볼 수야 없지 않나…

영화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와일드 카드>는 무식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매우 단순하거든요. 인간성을 상실한 범인들과 인간미 넘치는 형사들. 뭐 현실에서는 안 그런 경우도 많겠지만 그런 경우도 그만큼은 있겠지요. 그리고 양념으로 섞이는 코미디와 액션과 프로포즈와… 고생 끝에 범인은 잡히고, 영화의 시작처럼 또 범인을 쫓아 달리는 양동근의 되풀이되는 내레이션, 뛰어봤자 벼룩이다…. 절대로 복잡한 영화가 아닙니다. 복잡해야 깊이가 생기는 것은 아니겠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도 한참 동안 빠져 있게 만드는 깊이가 느껴지는 것도 물론 아니구요.

다시 영화의 깊이에 대한 얘기로 돌아오게 되는데요. 그런데 그 깊이라는 게 말입니다, 깊이 있는 소재를 택한다거나 깊이 있는 시선을 뽐낸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닐 거예요. 왜 그런 영화들 많잖아요. 감당 못할 소재를 감독이 저 혼자만의 깊이로 재단해 버리는 영화. 그런 영화들은 어려운 게 아니라 답이 없지요. 그런 면에서 볼 때, <와일드 카드>는 깊이는 없을지 몰라도 미덕이 있다니까요. 이 정도 얘기는 이 정도로 끌고 가는 게 적절하다는 느낌. 웃어주기 바랄 때 기분 좋게 웃을 수 있고, 코끝이 좀 찡해지기를 원할 때 진짜 코를 한 번 만져보게 되는… 좋은 연출은 그런 게 아닐까요.

그 힘은 주제나 소재 같은 딱딱한 것에서가 아니라, 말랑말랑한 디테일에서 나오는 거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늘 아이의 잠든 모습밖에 보지 못하는 오형사가 아이의 자란 키를 표시할 때 팔을 위아래가 아니라 옆으로 벌린다든지, 안마시술소 사장 도상춘이 범인 몽타주가 그려진 종이들을 보고 국민의 삼분의 일은 닮았을 거라고 못마땅해하며 종업원들 얼굴에 대 보인다든지… 그렇게 <와일드 카드>가 들고 있는 새롭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패들이 하나 둘씩 내려져 쌓이는 곳에 감독이 만들어놓은 무늬는 잔잔합니다. ‘깊이’가 아닌 ‘두께’로…

4 )
apfl529
좋은 글 감사~   
2009-09-21 18:36
kpop20
와일드카드 퍽치기가 생각나네요...   
2007-05-24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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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이영화 함께 봤는데 정말 끔찍했어요. 하지만 양동근이나 한채영..다른 분들도 모두 자연스러운 연기,웃음..감동.. 전 아주 좋았답니다.
딱히 이점이 좋다!!고 말 하긴 좀 어렵지만 전체적으로 지루하지 않았고 식상한..감,,은 쫌 있지만 .. 제가 너무 기대를 안하고 본 탓일까요?   
2005-02-11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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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치지 장면,,,정말 소름끼치더군요. 특히 지하철 지하보도에서 지나가는 아주머니를 인정사정없이..-_-ㅋ   
2005-02-02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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