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을 보러 가기 전에 인터넷으로 작품에 대해 알아보고 조금 지루하고 난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나의 기우였다.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에 푹빠져 2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몰입해서 보았다. 매너 없는 관객의 핸드폰 소리에도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을 만큼 배우들의 연기에 흡입력이 있었다.
동작, 표정 만으로도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섬세한 연기력과 맛깔스런 강원도 사투리, 그리고 극에 활기를 불어 넣어주는 배꼽빠지게 웃긴 장면들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인물의 감정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도록 여유를 준 점도 인상깊었다. 인물의 얼굴에서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적절하게 주어서 극의 흐름을 급박하게 쫓아가거나 놓쳐버리는 일은 없었다. 대사도 어렵지 않지만 가볍지 않았다.
아내의 첫사랑의 등장으로 삼류 불륜극으로 흐르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이것 역시 나의 기우였고, 그들의 만남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았지만 상황을 통해 관객이 유추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이 점이 상상력과 궁금증을 유발하여 지금도 나를 연극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들고 있다.
그들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피아노를 배우러 간다던 아내는 그를 만나러 갔던 것일까? 그런데 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까? 그들이 만났던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왜 아내는 첫사랑과 헤어지고 다시 초라한 일상으로 돌아왔을까? 첫사랑은 이혼남에, 능력 있고, 잘생겼다. 여러모로 보나 임공우보다는 훨씬 낫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아무렇지 않은 듯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전보다 더 남편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듯 보였다. 그녀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내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은 임공우는 끝까지 이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아내의 첫사랑을 위해 하얀 양복을 정성스레 만든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체...그에게 있어 아내의 첫사랑은 5년 만에 초크를 들게 해준 위대한 손님일 뿐이다. 그를 위해 헐레벌떡 나가서 비타500 한박스를 사다 바치고, 그를 위해 옷을 만들다 손가락을 다친다. 그리고 다친 손가락 때문에 고집스레 지켜왔던 소신을 굽힐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라사를 버리고 쉬운길을 택하고, 친구들과 아내가 누가 요즘에 양복을 맞춰 입냐고 라사를 그만 두고 다른 일을 하라고 종용해도, 5년간 손님이 없었어도 꿋꿋이 소신을 굽히지 않던 그였다. 그러나 이제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아내에게 "우리 라사 정리하고 세탁소 할까?"라는 말을 하는 임공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너무 아팠다. 소신을 굽히지 않던 그가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결국 현실 앞에 무릎을 꿇고 마는 모습을 보며, 신념을 지키며 살아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느꼈고, 임공우의 힘빠진 어깨를 보며 나도 힘이 빠져버렸다. 그런데 아내의 대답이 의외였다. 아내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당신은 옷 만드는 사람이잖아요" 라고 말한다. 아내의 이 말에 그는 절망 앞에서 다시 희망을 꿈꾸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위해 옷을 만든다. 아내와 함께 자신의 신체 치수를 재는 장면은 아이러니 하게도 너무 슬프고, 너무 행복해 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