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로우며 기분 나쁜 영화를 두 번째 본다는 것... ★★★☆
스토리는 지극히 단순하다. 여름휴가를 맞아 별장을 찾은 앤(나오미 왓츠)과 조지(팀 로스)는 깔끔한 차림의 청년 피터(브래디 콜벳)의 방문을 받는다. 계란을 빌리러 왔다는 피터의 행동과 말은 묘하게 앤의 신경을 자극하고, 곧 이어 등장한 동일한 복장의 폴(마이클 피트)은 앤과 조지의 심기를 건드리고는 골프채로 조지의 다리를 부러뜨려 놓는다. 그리고는 12시간 안에 일가족 전부를 죽이는 게임을 벌이겠다는 선언을 한다.
<퍼니 게임>은 클래식 음악을 맞추는 부부의 게임에서 느닷없이 귀청을 때리는 고강도의 헤비메탈 음악으로 넘어가며 시작한다. 영화의 앞뒤에 배치되어 있는 청각을 극도로 자극하는 헤비메탈 사운드는 어떻게 보면 바로 이 영화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 같다. 소리가 시끄럽다고 볼륨을 줄일 수도 없는 무력감, 음악을 듣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이란 그저 극장을 떠날 수 있는 자유뿐.
<퍼니 게임>의 원작 <퍼니 게임>은 누군가 나에게 지금까지 본 영화 중 가장 기분 나쁜 영화를 꼽으라고 하면 최소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영화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은 왜 10년 전 영화를 리메이크, 그것도 자신이 직접 했냐는 질문에, ‘원작이 독일어로 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감독의 대답대로 이번에 개봉한 <퍼니 게임>은 원작과 비교해볼 때, 워낙 오래 전에 본 영화라 모든 세부 사항이 다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부엌의 위치와 형태, 집 내부의 모양, 폴과 피터의 옷차림, 자세, 말투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영어 번역판에 불과할 정도로 동일하다.
원작과 리메이크의 차이라고 한다면 앤이 옷을 벗는 장면과 남편과 아들의 죽음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는 정도. 그런데 거의 베끼다시피 리메이크한 영화라고 해도 두 번째 본 관람자의 입장에선 심오할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그건 관람자의 태도에 대한 문제다. 10년 전(정확하게는 12년 전) 이 영화를 봤을 때의 무력감과 혐오감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날 정도로 뚜렷하게 남아 있다. 객석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고, 그것이 쌓이고 쌓인 나머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벌어지는 단 한 번의 반격에 객석에선 작은 박수 소리와 환호성이 울려 퍼졌었다.
그런데 두 번째, <퍼니 게임>을 본 지금, 그러한 감정은 별로 느껴지질 않았다. 물론 여전히 어느 정도의 무력감과 혐오감을 느끼긴 했지만, 처음 봤을 때에 느꼈던 치를 떨 정도의 감정은 아니었다. 이게 내가 이미 이 영화의 결론을 알고 봤기 때문인지 아니면 10년이 지나면서 그 정도의 폭력엔 무감각해진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니 게임>은 여전히 매우 경이로운 영화인 것도 사실이다.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묘한 폭력의 세계는 부정할 수 없는 매력이 담겨져 있고, 피가 거의 보이지 않음에도 그 어느 영화보다 강렬하고 파괴적이다.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게임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과 주인공이 관객을 향해 대화를 하고, 현실 세계마저도 뒤로 리와인드할 수 있다는 미디어(10여 년 전엔 비디오 문화의 특징)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특히 기존 스릴러 영화의 공식을 교묘히 피해가고 뒤트는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연출력은 지금 봐도 대단하다.
※ 기존 스릴러 영화의 문법을 뒤트는 장면을 대표적으로 하나 꼽자면 다음과 같다. 영화 초반 조지가 요트에서 내리면서 칼 하나가 요트 바닥으로 떨어진다. 관객은 그 칼이 어떠한 역할을 하리라 기대를 갖는다. 보통의 스릴러 영화들이 그러 하니깐. 영화의 마지막에 와서 묶인 앤이 요트 바닥에 던져지는 순간, 드디어 그 칼이 자신의 역할을 할 때가 되었다라고 관객은 믿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영화엔 그 어떠한 구원도, 그 어떠한 희망도 없다.
※ 이 영화를 끌고 가는 힘은 감독의 연출력과 함께 배우들의 연기력이다. 특히 나오미 왓츠와 마이클 피트의 연기는 매우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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