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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어서 다행, 지금이 인생 최고의 순간” <모어> 배우 모지민
2022년 6월 29일 수요일 | 이금용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이금용 기자]
음지에 있던 드래그 문화를 세상에 알린 한국인 드래그 아티스트가 있다. 뮤지컬, TV 광고, 연극 등 무대를 가리지 않고 대중에게 드래그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으며 뉴욕 스톤월 항쟁 50주년 기념으로 열린 ‘13 FRUITCAKES’와 2019 헤드윅 ‘THE ORIGIN OF LOVE’ 투어 공연을 통해 해외에까지 이름을 알렸다. 20여년의 험난한 투쟁을 거쳐 국내 최정상 드래그 아티스트로 자리 잡은 ‘모어’가 자신의 일생을 담은 다큐멘터리 <모어>로 관객을 찾았다.

드래그 공연이 과거엔 상당히 폐쇄적이었지만 요즘엔 하나의 ‘힙’한 문화가 되어 일반인도 보러 갈 만큼 상당히 인지도가 높아졌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태원 지하 클럽에 가지 않으면 볼 수 없던 드래그 공연을 이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2020년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솔로 퍼포먼스를 펼쳤고 다양한 가수들과 콜라보 공연을 열기도 했다. CF도 찍었다. 지하에 있던 드래그 문화가 지상으로 나왔다는 게 체감된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클래식 발레를 전공했는데 어떻게 드랙퀸이 될 생각을 했을까.
20년 전 처음 드래그 무대를 보고 신세계라고 생각했다. 정통 클래식 발레를 전공했던 내가 귀신에 홀린 것처럼 드래그의 길을 선택했다. 솔직히 외롭고 험난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최근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먼저 찾는다. 나와 함께 공연을 하길 바라고, 내가 대중 매체에 나와주길 원한다. 돌고 돌아 제자리를 찾은 거 같다. 지금껏 나 스스로 의심했던 삶이 옳은 선택이었다고 느껴진다.

스스로 ‘모어’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어떤 의미일까.
모어(毛漁)는 털 난 물고기라는 뜻이다. 털 난 물고기처럼 나 또한 세상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라는 의미에서 지었다. 내 예술도 마찬가지다. 한 가지 장르로 규정 지을 수 없다.

지금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졌는데 여전히 이질감을 느끼나.
이질감은 어쩔 수 없더라. (웃음) 내가 달리 특별한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어차피 모든 인간은 유일한 개체이지 않나. 물론 지금은 예전보다 사람들과 더 잘 지내고 그들도 나를 이해하려 한다. 동네 주민들이 내 책을 사서 읽고 사인을 받아갈 때도 있다. 그런데 결국은 그들도 내 성향을 얘기하고 싶어하고 내 이질적인 면모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더라.

이일하 감독과는 어떻게 일하게 됐나.
2017년 도쿄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다. 현지 작가가 내 사진을 찍었는데, 이일하 감독과 지인이었다더라. 처음엔 내가 외국인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한국인이었고 잔뜩 흥분한 상태로 내게 연락이 왔다. (웃음) 그 다음해 첫 미팅을 가졌다.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5년에 걸쳐 영화를 찍을 거라고 했고 나는 감당하기 어려울 거 같아 제안을 거절했다. 그 얘기를 들은 지인이 “이런 기회가 아무에게나 오는 건 아니다. 감독님이 너를 보고 특별한 기운을 느꼈을 것”이라면서 출연하는 걸 권했다. 감독님도 1년 이상 나를 설득했고 결국 출연을 수락하게 됐다.

여러 무대를 서봤지만 영화는 처음이지 않나.
매 순간이 곤란함의 연속이었다. (웃음) 다큐는 지극히 개인적인 삶을 보여주는 장르이지 않나. 부모님과 남편 등 개인사를 공개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영화가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고 특히 부모님이 욕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불안하더라. 그런데 완성된 결과물이 너무 아름다웠고, 영화를 계기로 남편을 부모님께 소개할 수 있어 좋았다.

오랜 기간 동안 이일하 감독과 작업했는데 갈등의 순간은 없었을까.
촬영은 감독님과의 전쟁 같았다. (웃음) 내가 말하는 방식이 평범하자 않아서 감독님과 소통 문제가 컸던 거 같다. 촬영 중 “어떤 감정으로 무대에 서냐”는 질문을 감독님께 받았는데 “감정이 어딨냐, 돈 벌려고 하는 거지”라고 대답했다가 촬영이 중단된 적이 있다. (웃음) 감독님과 내가 서로 다른 사람이니 이런 갈등은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늘 사이 좋게 지내고 아름다운 것만 찍겠나. 그러면서 성장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극중 해변, 논밭, 사찰, 시장 골목길, 심지어 도로 한복판 등 여러 장소에서 무대를 펼쳤는데.
영화에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영등포 시장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장면이 있다. 화려한 차림새로 지나가다 보니 주변의 시선이 모였는데 어떤 아저씨가 나더러 각설이 타령이라고 하더라.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이태원 지하에서 특훈을 받았기 때문에 별 타격은 없었다. (웃음) 사람들의 반응은 중요하지 않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나는 나고, 행위하는 사람이다.

<헤드윅> 원작자인 존 카메론 미첼과 만나 감격에 겨워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솔직하게 기뻐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지 않는 장면이다. (웃음) 그 장면의 내가 너무 날 것의 상태라서 민망하다. 영어도 그보단 잘하는데 앞에서 카메라가 돌아가니 잘 안 되더라. (웃음)

그럼 어떤 장면을 제일 좋아하나.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경운기 장면이다. 개인적으로 전 세계 영화사상 전무후무한 장면이라고 부르고 있다. (웃음) 부모님이 일평생을 보낸 곳이자 내가 성장한 동네, 나와 부모님, 남편이 한 장면에 담겼다. 그래서 너무 소중하고 의미 있는 장면이다.

가족들이 당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바로 받아들이던가? 부모님이 상당히 개방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부모님은 나를 딸처럼 키우셨다. 드래그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셨다. 굉장히 드물고 특별한 케이스라는 걸 나도 안다. 시골 분들인 데다 연배도 있으시니 드래그를 낯설게 여기실 수 있는데 우리 부모님은 달랐다. 운이 좋았다. 그런 부모님을 만나 지금의 내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아버님에 대한 내용을 비롯해 극중 당신의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내레이션들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사실 제대로 된 내레이션은 아니다. 몇 년 전 아티스트 이랑의 ‘앨리바바의 30인의 친구친구’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당시 녹음했던 걸 감독님이 영화제에 지원하기 위해 영화에 급하게 삽입했다. (웃음) 그래서인지 말들이 가끔 맥락과 맞지 않고 굉장히 생뚱맞다. 다시 녹음하려고 했는데 관계자들이 원본이 더 자연스럽다고 막더라. 그런데 내가 듣기엔 좀 끔찍한 거 같다. (웃음)

어쩐지 기존의 내레이션과는 달리 자연스럽더라. (웃음)
영화에 나오는 모든 내레이션은 따로 후시 녹음한 게 아니다. 감독님이 굉장히 똑똑하다고 생각한 게 녹음을 하게 되면 연기하는 느낌이 나니까 인터뷰 영상을 찍어서 음성만 추출해냈더라. 그래서 어설플 때도 있고 하루 종일 촬영하다 보니 피곤해서 성의 없이 말하는 것까지 그대로 담겼다. (웃음)

영화를 어떤 사람들이 봐주었으면 하나.
마음 같아선 어른, 아이, 노인, 퀴어, 비퀴어 구분 없이 전 국민이 다 봐줬으면 한다. 내가 나오는 영화라서가 아니라 성소수자 중에서도 소수자인 나 같은 사람을 다룬 다큐가 잘 없지 않나. 이 시대, 이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다만 퀴어 영화로 국한하지 말고 인간 모지민이 얼마나 애를 쓰며 예술을 향해 끊임없이 질주를 하는지에 포커스를 뒀으면 좋겠다. 내 예술이 대중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둡고 무겁고 독특하다. 그래서 늘 세상과 투쟁하며 나만의 예술을 펼쳐나가고 있고 사람들이 그 모습을 지켜봐줬으면 한다.

드랙퀸 외에도 모델, 뮤지컬 배우, 안무가 등 다방면으로 활약하고 있는데 당신을 끊임 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은 뭘까.
내 원동력은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다. 지하철에선 글을 쓰고, 일정이 없을 땐 그림을 그린다. 쉬는 날에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고 한다. 난 스스로가 약하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내가 강하다더라. 아무래도 부모님의 영향이 큰 거 같다. 부모님이 농사일을 하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주말, 방학 할 거 없이 부모님 일을 도왔다. 그런 성실함이 자연스럽게 체화된 거 같다.

최근에는 에세이 ‘털 난 물고기 모어’를 출간했는데.
처음 책이 나왔을 땐 역작이라면서 도취했다. (웃음) 스스로 작가라고 하긴 부끄럽지만 뿌듯하고 자긍심도 생긴다.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예술들은 무형의 퍼포먼스이지 않나. 그런데 글은 다르다. 내 감정을 정리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게 특별하다.

과거엔 외로웠다고 말했는데 지금은 어떤가.
요즘 나한테 하는 말이 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애썼다”고. 힘들다고 중간에 포기하거나 앉아만 있었다면 이런 일은 안 일어났을 거다. 끊임없이 나를 갈고 닦고 늘 낮은 자세로 있으려 한다. 이 영화도 새로운 도전에 겁 먹고 감독님의 요청을 거절했다면 못 나왔을 거다. 세상에 자신의 영화를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은데 나는 그걸 가진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지난 3월에는 개인 전시를 열었고 책이 발간됐다. 내 글들이 보수적인 매체에도 실렸다. 하루하루가 너무 신기하고 행복하다. 예전엔 행복하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는데,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 참 행복하다. 인생에서 이보다 더 찬란한 순간이 다시 오진 않을 거 같다.

마지막 질문이다.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면?
구체적인 목표를 가진 적은 없지만 인생에서 마주하게 되는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그저 하루하루 꾸준히 나를 갈고 닦으면서 계속해서 창작을 하고 싶다. 책이든 춤이든 어떤 형태라도 아름다운 창작물을 선보이는 게 지금의 꿈이다.

사진제공_(주)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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