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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의 마음으로 <남매의 여름밤> 윤단비 감독
2020년 8월 21일 금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어느 여름, 중학생 ‘옥주’와 초등학생 ‘동주’ 남매는 아버지 ‘병기’를 따라 할아버지 집으로 간다. 오래된 2층 주택에서 방학을 보내게 된 아이들 곁에 소리소문없이 고모 ‘미정’까지 합류한다. 이들은 함께 모여 과일을 까먹고 생일을 축하하는 소소한 날을 보내지만, 서로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는 저마다의 감정을 품고 있다.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는 어린 ‘옥주’ ‘동주’ 남매 사이에 끈끈한 애정과 짙은 짜증이 공존하는 동안, 자기 무게를 짊어진 어른 ‘병기’ ‘미정’ 남매 사이에도 연민과 서운함이 함께 머무른다. 이 뜨겁고 서늘한 두 남매의 여름밤이 끝나면, 가족은 흩어질 것이고 누군가는 이별할 것이다. 윤단비 감독은 그 헤어짐을 이미 아는 사람의 시선으로 <남매의 여름밤>을 만들었다. 곧 들이닥칠 이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무고한 천진함을 조용히 애도하듯이.

지난 12일 영화를 언론에 처음 선보이는 자리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로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전형적인 지방의 소시민 가정에서 자랐다. 단편 작업에서 줄곧 아이들이 갑자기 할머니 집에 남겨진다거나 하는 가족의 부재를 다뤘는데, 장편을 찍기 위해 지난 작품을 돌아봤을 때 내가 그 주제에 천착하고 있다는 걸 알겠더라. <남매의 여름밤>에서는 ‘가족이 할아버지를 만나고 헤어진다’는 문장을 가장 먼저 썼다. 영화의 기본적인 정서는 애도의 마음이었고, 빈자리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카타르시스를 주거나 대리 만족할 수 있는 영화도 좋지만 보편적인 감정 안에서 내가 봐오던 소시민의 일상을 그려보고 싶었다. 내 가족이나 옆집의 모습처럼. 그런데 영화 작업 초반에는 이런 점을 지적받았다.

지적을 받았다는 건, 아마도 영화로서 이야기가 너무 평평하고 소소하다는 의미인가.
너무 일상적이고 잔잔해서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의견이 있었다. 좀 더 장르적으로 만들어봐야 하나 싶은 생각에 아버지 ‘병기’가 할아버지의 집을 탐내고 주인공 ‘옥주’가 할아버지의 수석을 가져다 파는 상상도 했는데, 그랬으면 정말 <기생충>의 ‘짝퉁 나이키’같은 작품이 될 뻔했다.(웃음) 돌고 돌아 다시 원래 방향으로 돌아와, 나를 믿고 가보자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잊히지 않는 영화, 쉽게 휘발되지 않는 영화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영화에 함께한 스태프와 배우가 내 방향이 맞다는 확신을 줬다.


영화는 할아버지의 집에 모인 아빠 ‘병기’, 고모 ‘미정’, 주인공 ‘옥주’와 남동생 ‘동주’의 여름날을 다룬다. 가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이 소소하고 즐겁게 느껴지는 한편 불쑥 쓸쓸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따뜻한 영화’라는 평가를 들을 때, 이 영화가 그렇게도 받아들여지는구나 생각했다. 나도 영화를 보면서 쓸쓸하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여름방학이라는 찰나의 시기를 다룬다. 가족은 분명 서로 위안을 얻고 힘이 된다. 화기애애한 장면도 많이 나온다. 그런데 왁자지껄한 다음, 외로운 순간이 온다.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옥주’와 ‘동주’도 나이 터울이 있기 때문에 그 시기를 지나면 그렇게 (가깝게) 지내지는 못할 것 같다. 그 시간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하루라는 시간은 아주 길고, 내가 할 일은 터무니없이 적었던 어린 시절의 감각이 종종 떠오르기도 했다. 외롭다는 감정을 잘 알지 못할 때라 그저 무료하다는 생각만 많았던 것 같다.
나는 심지어 유치원 때부터 고독함을 느꼈다.(웃음) 아직도 기억난다. 집과 옥상이 연결된 계단 중간에 걸터앉아서 나는 언제 어른이 되지? 왜 이렇게 외롭지? 하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어느 곳에도 소속된 느낌이 없었고, 자라나야 하는 시간은 길고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그 뒤로 사춘기를 좀 유난하게 겪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도 (내가 경험했던) 시간이 느껴지길 바랐다. 보통은 후반 작업 편집과정에서 러닝타임을 줄이려고 하는데 나는 여백을 얼마나 줘야 할까, 그 여백을 통해 관객이 영화에 들어올 여지가 얼마나 될까, 같은 지점을 고민했던 것 같다.

촬영 장소로 활용한 주택이 아주 자연스러우면서도 특색 있는 편이다. 시간적 여백이 느껴지는 순간마다 그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하루를 바라보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인천영상위를 통해 동네를 추천받아 두 달 정도 촬영할 만한 집을 찾았다. 내가 어릴 때 살던 주택의 느낌이기를 바랐다. 대부분 평범한 구옥이었는데, 그 집만큼은 정말 별의별 게 다 있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도르래 같은 것이 있어서 촬영 기자재를 싣고 2층으로 끌어 올릴 수도 있었다.(웃음) 그만큼 주인의 애정이 담긴 집이었고,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집이었다. 대문 위의 포도나무, 방울토마토와 고추, 계단의 중문, 재봉틀, 담금주… 집 자체의 캐릭터가 너무 좋고 독특했다. 생활감 있는 물건들을 최대한 영화에 많이 반영하려고 했고, 시나리오도 집에 맞춰서 수정했다. 집이 영화를 상상 이상으로 풍성하게 만들어준 것 같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마치 장롱처럼 달린 여닫이문이 특히 각별하다고 생각했다.
다들 그 이야기를 하더라.(웃음) 주인이 직접 다신 거라 흔한 건 아닌 것 같다. 냉난방비 절약 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 같은데 영화에서는 공간을 분리하는 역할로 썼다. 할아버지가 포도를 드시게 하고 가족회의를 할 때는 문을 닫는다든가, ‘동주’가 엄마의 선물을 받았을 때 기쁘게 문을 열고 들어간다든가 하는 식으로 공간의 진입과 단절을 표현할 수 있는 좋은 오브제였다.

음악도 영화의 정서를 강화하는데 큰 몫을 했다고 본다. 신중현의 ‘미련’, 장현과 김추자 두 가수가 부른 버전이 모두 삽입됐다.
원래는 배경음악을 삽입하지 않으려고도 해봤다. 음악이 들어오는 순간 연출자의 의도가 너무 보일 것 같았다. 그러다가 ‘미련’이라는 곡을 알게 됐는데 할아버지의 존재를 상기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편이다. 고등학생 때 친구가 먼저 떠났고 학교 선생님이 돌아가시는 일도 있었다. 이 영화를 ‘애도의 과정’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맞지 않는 구석도 있지만, 나에게는 어느 정도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음악이 영화를 관통하는 것 같았다.

완성품이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 초대받고, 상도 받았다. 현장에서 만난 해외 관객의 감상평이 자못 궁금해진다.
수상 소식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영화제 관계자보다는 지역 주민이 주로 영화를 보러 왔다. 자기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서 공감대를 형성해줬다. 가족 이야기는 결국 비슷하게 받아들여지는구나 싶었다. 한국인은 영화 속 집처럼 생긴 곳에서 사느냐, 그렇게 대가족이 함께 사는 경우가 흔하냐, (영화 속 장례식 장면에서) 관은 어디에 있냐(웃음) 같은 궁금증도 많았다. 영화를 찍는 동안에는 변방에 있다는 느낌이 컸다.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는 느낌이었다고 해야 하나. 만약 개봉하지 못하면, 그대로 사라질 수도 있겠다 싶더라.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공감해주고 지지해주니 (여건이 쉽지 않아도) 영화는 자기 길을 가는구나, 싶은 마음이다.


영화를 만드는 동안 당신에게 위로와 영감을 준 작품들이 있나.
너무 많다. 요즘 자주 생각하는 건 소마이 진지 감독의 <태풍클럽>(1984). 나루세 미키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들도 좋다. 한번도 만나본 적 없고 그들도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그들과 친구다.(웃음) 에드워드 양의 영화도 좋아하는데 누군가 내 영화에서 그의 느낌을 떠올렸다고 했을 때 정말 신기했다. 레퍼런스 삼아 찍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영화에 녹아들었구나, 그게 전부 감지가 되는구나, 부끄러우면서도 좋았다.

지난 해 등장한 <벌새> <매기> <우리집> <아워 바디> 등에 이어, 올해도 여성 감독의 빛나는 작품이 연이어 개봉하는 느낌이다. <남매의 여름밤>으로 당신도 그 대열에 함께 서 있는데.
내 앞에 그 감독님들이 계시기 때문에 용기가 더 났다. 처음 영화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아빠는 박찬욱, 봉준호 같은 사람이 영화를 하는 거라고 하셨거든.(웃음) 그때는 신진 여성 감독도 많지 않았고 거대 자본, 엘리트 출신, 혹은 천재들이 만나서 하는 게 영화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다. 아빠는 <남매의 여름밤>을 보고 난 뒤에 만족감이 크셨는지 더는 그런 말은 하지 않으신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받은 걸 알고 나서는 내가 멀리서도 잘 보일 수 있게 덩치를 좀 키우라고 하시더라.(웃음)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음… 휴일에 방 청소를 하고 디퓨저를 뿌렸다. 정돈된 상태로 책을 읽었는데 그때 마음이 조금 놓였다고 해야 할까. 여유 있다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올해 정동진독립영화제도 생각난다. 야외 상영 당시 폭우가 내렸다. 많은 분이 자리를 비우셨는데 그런 중에 끝까지 자리를 지켜준 분들도 꽤 계셨다. 내가 어떤 영화를 보기 위해 저렇게까지 애정을 쏟았던 적이 있었나? 나라면 끝까지 저 자리에서 우비를 입고 영화를 볼 수 있을까? 그때 내가 받고 있는 애정이 너무 과분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미안하고 뭉클했다.

사진_이종훈(스튜디오 레일라)




2020년 8월 21일 금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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