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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손가락 찾아 얼음물에 넣고…’ 이주노동자의 삶 기록하다 <안녕, 미누> 지혜원 감독
2020년 5월 25일 월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한국은 외국인 노동자가 필요하다. 농어촌과 공장 지대의 사업주는 특히 그렇다. 정부는 인력을 구하지 못한 한국인 사업주를 위해 경력 없는 이주노동자를 합법적으로 받아들인다. 대표적인 게 필리핀, 몽골, 스리랑카 등 15개국을 대상으로 하는 ‘고용허가제’다. 정부는 2020년에만 고용허가제로 56,000명의 이주노동자에게 E-9 비자(비전문취업)를 발급했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E-9 비자로 체류하는 이들은 2019년 기준 26만 명이다.

내국의 수요와 외국으로부터의 공급을 정부가 합법적으로 용인하는 이 체계만 정상적으로만 가동된다면, 모든 이주노동자의 지위는 안전할 것이다. ‘불법체류자’라는 단어가 난무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간편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한국은 고용허가제라는 제도가 자리 잡기 한참 전부터 값싼 외국인 노동자를 국내로 불러들였고, 한국인 사업주는 그들의 비자가 이내 만료될 줄 알면서도 일감을 줬다. 1987년의 노동자대투쟁 이후 한국인 인건비가 오른 까닭이다.

<안녕, 미누>의 주인공 네팔 출신 미누 씨도 그렇게 한국으로 왔다. 21살이던 1992년 “15일짜리 비자”로 입국한 그는 2주만 지나면 비자가 만료돼 ‘미등록’ 상태가 될 걸 각오하고 입국했다. 네팔에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식당, 공장을 운영하는 한국인 사업주는 미누 씨의 그런 입장을 잘 알면서도 십 수년간 일자리를 줬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양쪽의 필요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수많은 미누 씨들이 그렇게 한국의 일터에 자리 잡았다.

미누 씨는 2009년 한국에서 추방당했다. 2003년, 노무현 정부는 외국인 노동자 임금 착취 문제를 낳은 산업연수생제(1993~2007)를 폐지하기로 하고 그들을 합법적으로 고용할 수 있는 고용허가제를 병행 추진한다. 이 과정에서 미누 씨처럼 한국말과 물정에 어느정도 적응하고 일터 돌아가는 이치를 아는 ‘장기 체류자’들이 추방 대상에 올랐다.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이란주 대표는 이 문제가 영주자격(F-5) 신청 요건과 연관돼 있다고 지적한다. 외국인이 5년 이상 한국에 거주하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요건에 해당하게 된다. 한국 정부는 이점을 부담스럽게 여겼다.

미누 씨는 2003년부터 한국에서 ‘스탑크랙다운’(Stop Crack Down, 단속을 멈춰라)이라는 밴드를 결성해 노래를 불렀다.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추방 반대 농성이 시작되고, 단속을 피해 도망 다니던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던 때다. “기계 사이에 끼어 팔딱이는 손을 / 비닐봉지에 싸서 품에 넣고서 / 화사한 봄빛이 흐르는 행복한 거리를 / 나는 미친놈처럼 한없이 헤매다녔지” 박노해 시인의 ‘손무덤’을 가사로 쓴 록 비트의 곡은 평범한 직장 생활을 이어가는 이들의 가슴에도 날카롭게 꽂힌다. 이 노래를 부르던 미누 씨는 2018년 본국 네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본명 ‘미노드 목탄’(Minod Moktan). 지혜원 감독이 한국의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증인이었던 그의 삶을 기록으로 남겼다. 다큐멘터리 <안녕, 미누>다.





<안녕, 미누>를 보고 가장 크게 와 닿은 건 ‘불법체류자’와 ‘미등록 이주노동자’(unregistered migrant workers)라는 표현이 시사하는 강력한 차이다.
<안녕, 미누>를 다룬 기사에서 ‘불체자’라는 단어를 사용한 악플을 읽었다. 이태원 클럽을 통해 (성 소수자를 향한) 혐오가 마구 확산하는 시국과 미누 씨가 일해왔던 시대부터 계속돼온 외국인 노동자를 향한 차별을 섞어서 언급한 기사였다. 거기에 댓글로 ‘무슨 미등록 이주노동자냐, 인권팔이 하지 마라’고 쓰여 있더라. 좀 더 정확하고 자세한 근거로 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정확한 근거로 싸워야겠다는 건, 어떤 말인가.
미등록 이주노동자라는 표현은 UN ILO(국제노동기구)가 권고한 것이다. ‘불체자’라는 단어가 마치 반사회적, 반도덕적인 형사범이라는 뉘앙스를 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굳이 명명하자면 법질서를 어긴 행정범 정도다. 우리나라 운동가들이 ‘불체자’라는 단어의 뉘앙스가 안 좋으니 (임의로) 바꾼 게 아니다. 그걸 모르고 마치 누군가를 미화시키는 용어처럼 사용한다는 비난이 너무 많다. 그런 걸 보면 분노가 쌓인다.

지난 11일(월) 언론시사회 당시 ‘무지에서 비롯된 혐오’라는 말을 했다.
농어촌에 가보면 안다. 신천지를 통해 코로나19가 확산할 때 이주노동자는 다 (자기 나라로) 갔다. 그래서 일손이 없다. 그들이 일했던 곳으로 한국 사람은 전혀 가지 않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무슨 (한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건가. 말도 안 된다. 구체적인 통계도 있다. 인터넷 검색창에 ‘이주노동자’와 ‘경제연구소’ 두 개의 키워드를 넣어보라. 그럼 그들이 한국 경제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역시 2050년까지 이주노동자를 굉장히 많이 받아들여야 한국 경제가 지탱된다고 말했다. (기자 주: 2010년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금융위기와 외국인 고용환경의 변화’ 보고서에 따르면 노동력 부족 문제 해소를 위해 2050년까지 1,159만 명의 이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분석했다.)

동의한다. 도시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세계가 전부는 아니다.
우리에게 그들이 필요하다면, 그들이 떳떳하게 일할 수 있도록 환경을 개선하면 된다. 왜 그들이 불안한 미등록 신분을 유지하면서 욕까지 먹고 일해야 하나. 미누 씨는 그런 점에서 자신이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라고 했다. 불안한 자기 신분을 생각하면 숨어서 돈만 버는 게 맞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상징적인 존재로 비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한국인 운동가가 이주노동자를 차별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보다 본인이 말하는 게 더 강한 목소리가 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미누 씨는 강제추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2003년 말 ‘스탑크랙다운’(Stop Crack Down)이라는 밴드에 소속돼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알려주는 노래를 부른다. 박노해 시인의 시 ‘손무덤’을 가사로 활용한 동명의 곡은 특히나 마음에 ‘콕’ 박힌다.
나와 처음 인터뷰할 때 미누 씨는 사랑 노래, 이별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했다. 술자리에서 젓가락 두들기며 우수에 찬, 간드러진 노래를 부르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이다. 사실, 미누 씨는 한 번도 임금체불을 당한 적이 없다. 한국에 와서 좋은 사장을 만났고 그들과 ‘형 동생’하며 지냈다. (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던 IMF 때 미누 씨가 일하던 공장 사장님은 월급을 반만 주는 대신 같이 견뎌보자고 했다. 인복이 많았던 거다. 버젓이 문화부 장관의 감사패를 받았다. 언론에도 엄청나게 보도됐다. (기자주: 미누 씨는 1999년 외국인예능대회 참여로 당시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에게 감사패를 받았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신분이었지만 (나름대로)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2009년 강제추방 됐다.
당시의 시대상이 중요하다. 2003년 고용허가제가 (병행) 도입되면서 이주노동자가 추방되기 시작했다. 미누 씨는 그 과정에서 자신과 똑같이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람이 무언가를 새롭게 알게 되고 그것이 가슴에 ‘팍’ 박히면 그다음에는 다른 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네팔로 돌아가는 것보다 한국에서 운동을 하는 게 더 값지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안녕, 미누>를 보면 최근까지도 네팔은 노동이 가능한 인력을 해외로 내보내는 것 같더라. 미누 씨도 오래 전 그런 상황에서 한국에 오게 됐을 것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기점으로 한국인 노동자의 임금이 확 올랐다. 사업주는 저임금 노동자를 찾았고 그렇게 해외 노동자가 유입됐다. 미누 씨가 말한 “15일짜리 비자 하나 들고 왔다”던 바로 그때다. 보통 이들을 이주노동자 1세대로 분류한다. 미누 씨가 살던 네팔에서는 한국보다 일본으로 더 많이 갔다고 하는데, 미누 씨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그냥 끌렸다”고 했다. 아는 게 남산타워와 88올림픽뿐이었는데도 말이다. 우리도 그냥 좋은 나라가 있지 않나.

아주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여행지를 고를 때에도 무작정 끌리는 나라가 있으니 독자 역시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다. 미누 씨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2월 22일, 굉장히 추운 날이었다고 한다. 인력을 모집하는 사람을 따라 허름한 여인숙에 묵게 됐는데 방바닥이 (너무) 뜨겁게 느껴질 정도로 보일러가 잘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미누 씨는 그게 자기를 천대하는 거라고 느꼈다고 한다. 네팔에서는 전부 침대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혹시 자기를 데워 죽이려고 하는 건 아닌가 무섭기도 했다고.(웃음) 그 뒤에 ‘공장 갈 사람’, ‘식당 갈 사람’ 하는 식으로 손을 들어 갈 곳을 정했고 미누 씨는 의정부의 한정식 식당에서 일하게 된다.

그렇게 18년을 일하고 2009년 강제추방 당했다. 네팔로 돌아간 미누 씨는 학원에서 한국으로 이주 노동을 가려 하는 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
당시 촬영이 나는 너무 낯설고 불편했다. 굉장히 복잡다단한 심정이었다. 그들이 배우는 어휘나 문장은 유학이나 비즈니스로 외국을 가는 이들이 배우는 것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예문이 이렇다. “반장님, 손가락이 잘렸어요”, “그래, 손가락 찾았어?”, “네, 얼음물에 넣어 뒀어요”. 작업장 산재에 관한 말을 배우는 건데, 그런 환경에 처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각오를 하고 한국에 오는 거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인이 일하고 싶어 하는 자리를 빼앗기 위해서 오는 게 아니다.

미누 씨는 한국으로 갈 예비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 음식을 사주기도 한다. 그때 “맛없어요”라고 표현하지 말고 “입에 맞지 않아요”라고 말하라고 조언해주는 장면은 꽤 인상적이다. 생활의 지혜에 가까운 조언이지만, 사업주와 이주노동자 사이의 권력 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표현법이기도 하다.
촬영 당시 네팔 노동자가 돼지 축사 분뇨 정화조를 청소하다가 질식해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 (기자 주: 2017년 경상북도 군위군의 돼지 축사에서 벌어진 일이다.) 한국에서 일하는 네팔 사람이 계속해서 죽어가는 걸 아는 상황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갈 기회를 잡게 됐다는 생각에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네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안녕, 미누>가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돼 (예외적으로 입국할 수 있었던) 미누 씨가 관객과의 대화에서 눈물을 보인 지점이기도 하다. “아직 네팔은 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굉장히 아프게 느껴지는 아킬레스건이었을 것이다.

2018년 그가 심장마비로 죽고 작품의 편집 방향도 완전히 바뀌었다고 들었다.
처음에는 우여곡절 끝에 스탑크랙다운의 옛 멤버가 네팔에 모여 공연을 하는 과정을 다뤘다. 관객은 한국에 이미 다녀온 이주노동자와 앞으로 한국에 갈 사람이었다. 그래서 공연 장면도 굉장히 길게 넣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 이후 <안녕, 미누>를 그를 위한 헌정 영화로 바꿨다. 그가 한국에서 보낸 역사를 너무 간단하게 처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 부분을 확대, 강조했다.

처음 마음먹었던 기획 방향을 바꾸면서 새로운 이야기에 필요한 영상이 부족하지는 않던가.
다큐멘터리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걸 염두에 두고 찍는 장르다. 초점을 잃고 이것저것 다 찍는 건 아니지만 일단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으면 카메라를 켜둔다. 네팔에서는 동시통역사가 없었기 때문에 (미누 씨와 주변 사람들이) 무슨 말을 나누는지 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녹화 버튼을 누른 상태였다. 내가 필요한 것 이상의 그림이 많았기 때문에 재편집이 가능할 정도의 촬영 분량은 확보돼 있었다.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긴 시간의 ‘편집 노동’이 예상된다...(웃음)
(웃음) 그런 이유로 이제는 협업을 하고 싶다. 이 어려운 다큐멘터리 산업에 뛰어 들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서다. 미누 씨를 촬영하면서 이주민 세계를 알게 됐고, 귀화 문제에 관심이 생겼다. 우리나라는 하루에 30명이 귀화를 한다. 그리고 20명은 새로운 성씨의 시조가 된다. 방글라데시 방 씨, 네팔 정 씨처럼 말이다. 본래 이름으로 살 수도 있지 않냐고 묻지만, 아버지 이름이 이상하면 자식이 놀림 받아서 바꿀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농촌에 김태희, 전지현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많은지.(웃음) 우리나라에 ‘다문화’라는 게 이렇게 널리 퍼져있는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기획을 돕고 새로운 분들이 잘 연출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그동안 방송국에 수많은 고품질 다큐멘터리를 납품했고, <바나나 쏭의 기적> <안녕, 미누>로 두 장편영화를 연출했다.
<바나나 쏭의 기적>이 내 첫 장편 영화였다. 처음부터 영화로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내가 워낙음악을 통한 성장 이야기를 좋아했고, 우연히 해외 마켓 피칭 기회를 얻으면서 외국 에디터와 작업할 수 있었다. 새롭게 눈뜬 것도, 배운 것도 많다. <안녕, 미누> 연출도 내가 좋아하는 일로 시작한 것이다. 두 편의 영화를 만들어보니, 오히려 방송 다큐멘터리를 더 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들더라. 돈 없고, 여유 없는 사람들은 TV를 본다. 그러니 거기에 나오는 게 더 고품질이어야 하지 않겠나. 지식, 돈, 학식, 교양 있는 사람이 감수성을 채우기 위해 극장을 찾는 것도 좋지만, 진짜 없는 사람은 TV밖에는 볼 게 없다. TV에서 좋은 다큐멘터리를 만나면 굉장히 뿌듯하다.


마지막 질문이다. 요즘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내가 ‘집사’다. 두 마리 고양이의 집사.(웃음)


사진_이종훈 (스튜디오 레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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