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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눈동자에 담아낸 진심 <우리집> 윤가은 감독
2019년 8월 23일 금요일 | 민용준 영화 저널리스트 이메일

[무비스트= 민용준 영화저널리스트]


친근하고 살갑고 정겨운 인상이다. ‘우리’라는 단어의 첫인상이란. 하지만 막상 그 단어의 영역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우리’란 결코 다정하게 여겨지는 언어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에 속하지 못하는 타인이나 이방인이 된 나는 외롭고, 쓸쓸하다. 그래서 ‘우리’는 때론 야박한 언어다. ‘우리’로부터 타자화된 이방인에게는 가혹한 현실이다. 윤가은 감독의 전작 <우리들>과 신작 <우리집>은 바로 그런 ‘우리’라는 단어로부터 발생하는 관계의 거리감을 또렷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망망한 마음으로 품는다.

<우리집>은 <우리들>에 이어 어린아이들의 세계를 연이어 바라보는 작품이지만 분명 한 뼘 더 너른 시야로 확보한 세계다. 아이들의 시선으로 관통하는 어른들의 세계가 아이들의 세계와 나란히 존재한다. 저마다 다른 사정으로 채워진 공간을 각자 다른 심정으로 비추어 각기 다른 캐릭터처럼 확장된 공간의 활용도 눈에 띈다. <우리들>이 우리라는 관계 그 자체의 심성을 살피는 작품이라면 <우리집>은 우리라는 영역 그 자체의 물성을 살피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집>은 <우리들>과 유사하듯 한 걸음 내디딘 윤가은 감독이 만난 새로운 계절 같다. 새롭게 자란 나이테가 보인다. 아이들과 함께 감독도 성장한 것만 같다는 그런 인상이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에 이어 또 한 번 제시되는 아이들의 시선이 너무 맑아서 시리고, 아이들의 성정이 너무 고와서 쓰리다. 그럼에도 끝내 투명하고 단단하게 자란 마음이 되레 보는 이에게 용기와 위안을 안긴다. <우리집>이라는 영화는. 그래서 삶이 무뎌지고 혼탁할 때 한 번씩 꺼내서 비춰보고 싶은 그런 영화가 될 것 같다. <우리집>이라는 영화는. 그리고 비가 그친 여름의 오후에 만난 윤가은 감독은 명랑한 웃음과 함께 속 깊은 고민과 티 없는 경험으로 가득했던 지난여름의 순간들을 말해주었다.



전작인 <우리들>은 정식 개봉이 불가능한 작품이라 생각하며 연출했다고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집>은 개봉을 염두에 두고 완성한 첫 작품인 셈인데 그런 인식의 차이가 영화를 완성하는 과정에도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단편을 연출할 무렵에는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것이 개봉과 비슷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들>로 개봉 과정을 경험하면서 영화를 극장에 배급하고 상영해서 관객을 만나는 건 또 다른 일이라는 걸 알았다. ‘이게 영화가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만든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고, 영화로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힘이 되고, 한편으론 부담으로도 다가왔다. 덕분에 고민도 많아졌지만 극장을 찾는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도 생겼다.

<우리들>로 많은 호평을 받았는데 그것이 예전과 특별한 야심을 품게 만든다고 느낀 적은 없었을까?
쓸데없는 생각이 늘어나긴 했다. 그래서 칭찬이 독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느꼈고. ‘이런 게 좋았다’는 말을 듣게 되면, ‘계속 이런 걸 해달라는 말일까? 나는 이런 것만 할 수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웃음) 이야기는 각각의 생이 달라서 저마다 어울리는 톤과 매너가 있고, 가야 하는 방향이 각기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받은 평가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기준이 되려 한다고 깨닫게 된 순간들이 있었다. ‘내가 왜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지?’ 싶을 때도 하고. 어렵더라. 균형을 잡는다는 게. 그래서 다른 감독님들은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지금도 계속 고민하는 지점이다.

어쩌면 영화를 만들어가며 끝없이 확인해보는 것만이 유일한 답일지도 모르겠다.
맞다. 만들어봐야만 아는 일이기도 하지.

<우리집>에서는 <우리들>에서 주연을 맡았던 어린 배우들이 출연한다. 심지어 선이(최수인)네 가족은 분식집에서 다 함께 등장하고. 덕분에 <우리집>과 <우리들>이 하나의 세계 속에 자리한 영화처럼 보였다.
일종의 확장 이전?(웃음) 사심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내가 아이들을 다시 만나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우리들>을 본 관객들에게 덤이라고 할 수 있는, 부록 같은 재미를 주고 싶기도 했고. 대단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다.

덕분에 <우리들>과 겹치는 촬영지가 없는지 엔드 크레딧을 유심히 봤다. 실제로 정릉을 비롯해서 <우리들>과 중복된 촬영지가 있는 거 같더라. <우리집>에 등장하는 육교가 <우리들>에 나온 육교와 구조적으로 비슷해 보이기도 했고.
지역적으로 겹치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우리집>이라는 제목을 정한 이후에 <우리들>의 아이들이 <우리집>에서 불렸던 이름 그대로 조금씩 등장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우리집>의 동네가 <우리들>과 같은 동네여도 괜찮지 않을까? <우리들>의 친구들이 다니던 학교에 하나(김나연)가 다니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이 단계적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우리집>에 나오는 공간이 직간접적으로 <우리들>과 겹쳐도 되겠더라. 대표적으로 아까 말한 육교가 그렇고. 세검정에 세 방향으로 길게 나뉘는 육교가 있는데 우리는 편의상 삼거리 육교라 불렀다. 그 길이 재미있어서 또 나와도 좋을 거 같았다.

<우리들>을 편집하면서 <우리집>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두 영화가 중첩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완성된 영화는 처음 구상했던 이야기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들었다. 처음 구상한 이야기와 지금의 영화와의 차이가, 지금의 결과물로 변화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다.
최근 제작 일기를 쓰면서 초고 파일을 다시 열어봤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싶을 정도로 다른 얘기더라. 원래는 오래전부터 염두에 뒀던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하고 발전된 이야기였다. 그걸 1년 정도 붙잡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가정 내 폭력 즉 아동학대를 소재로 한 이야기였다. 사회적 문제로 다뤄질 만큼 강도가 세다고 느껴지는 폭력은 아니지만 엄연히 폭력적이라 할 수 있는 상황에 노출돼 있는 한 가정의 아이를 옆집 소녀가 자신만의 힘으로 구해내는 이야기였다. 그 소녀의 이름을 따서 <소라>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했고.

의외로 장르물에 가깝게 느껴진다. 어린이 버전의 <레옹> 같기도 하고.
어쩌면 바르고 센 얘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들> 편집이 끝나갈 때쯤 아이들이 싸우는 건 그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다음 작품에도 아이들이 나온다면 함께 힘을 합해서 뭔가를 해결하고 서로 위로해주는 영화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무엇보다도 심각한 상황을 그린다 하여 꼭 무거운 톤으로 보여줄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이야기를 개발할수록 너무 무거워지고 세져서 그걸 계속 들여다보는 입장에서 너무 고통스러웠다. 너무 장르물처럼 변해가는 것 같고. 그래서 이게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인지 고민하게 됐다. 그렇게 이 이야기를 붙들고 온 지 1년이 됐을 때쯤 당시 후반 작업 중이었던 영화 <미쓰백>과 국내 리메이크가 예정된 일본 드라마 <마더>에 관해 듣게 됐는데 내가 구상 중인 이야기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반복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건 아닐지, 그렇다면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지 적극적으로 고민하다 보니 결국 가족 얘기만 남더라. 그리고 내 문제든, 남의 문제든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는 캐릭터를 통해 좀 더 평범하고 보편적이라 다들 잘 말하지 않는 감정이나 경험들을 이야기하는 게 지금의 내게 필요한 이야기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 방향으로 이야기를 다시 발전시켰다.

결국 폭력에 노출된 아이를 구하는 소녀의 이야기가 <우리집>에서 가족의 행복과 친구의 집을 지키고자 애쓰는 하나(김나연)의 이야기로 변한 셈인데, 하나는 정말 바쁘고 부지런한 아이다.
생각해보면 하나는 내 영화에 등장한 인물 중에서 가장 바쁘고 고군분투하는 캐릭터였다. 소라에 관해 쓸 때에는 위험에 처한 아이를 구하는 마음 자체에 집중했는데 점점 남을 구하기 전에 자기 자신부터 구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 의문이 생겼다. 소라는 왜 저 아이를 구하려 하는지, 소라에게는 무슨 문제가 없는 건지, 점점 주인공의 문제에 집중하게 됐다. 결국 처음 구상한 이야기에서는 벗어났지만 서로를 구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우리집>에 반영됐다. 덕분에 애들이 너무 바빠졌다.(웃음)

초등학생인 하나는 직접 장도 보고, 요리하고, 밥을 짓고, 가족의 끼니를 계속 챙긴다. 그런데 가족 누구도 밥상에 앉지 않는다. 그게 참 안쓰럽더라.
우리가 한참 하나 집에서 촬영할 때 점심을 먹는데 하나 아버지 역할을 한 이주원 선배가 농담처럼 이런 말을 했다. “감독님, 가족들이 진짜 하나 밥을 안 먹네. 이쯤 되면 하나가 요리를 못하는 거 아냐? 밥이 정말 맛없는 거 아냐?”(웃음) 그러니까 하나 역을 맡은 김나연 배우가 “아니에요. 저 요리 잘해요”라며 농담을 주고받았는데 그런 농담이 나올 정도로 영화상에서는 가족들이 하나가 해준 밥을 먹질 않더라. 찍을 때는 잘 몰랐는데, 편집하면서 알았다. 정작 촬영장에서는 다들 가족처럼 모여서 밥을 먹었는데. 뒤늦게 좀 짠했다.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 때 하나가 지어준 밥을 비로소 가족들이 먹게 됐다는 걸 ASMR로 알려줘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웃음) 그런데 하나가 가족을 위해 밥을 챙긴다는 설정이 어떻게 시작된 건지 궁금했다.
원래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다. 요리를 해서 먹는 장면을 넣었던 게 주요한 설정으로 발전했다. 특별히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나 역시 어릴 때부터 느꼈지만 가족들끼리 함께 밥을 먹지 않기 시작하는 데서 가족이 해체될 조짐이 가장 먼저 드러나는 거 같다. 같이 식사한다는 건 서로 얼굴을 보고 앉아서 대화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족끼리 함께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이 어린 나이에는 유일하게 온 가족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시간이 없어진다고 느껴졌다. 하나가 자꾸 밥을 먹자고 권하는 건 진짜 밥을 먹고 싶은 게 아니다. 서로 얼굴 좀 보고 얘기하자고, 우리 다시 같이 잘해보자고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은 건데 그걸 직접적으로 말하기엔 민망하니까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뭔가를 하면 될 거라는 희망의 일환으로 요리를 선택한 거고, 요리를 좋아하는 취향까지 맞물려 더욱 적극적으로 하게 된 거라 생각했다.

<우리들>과 <우리집>은 ‘우리’라는 단어에 대한 고찰을 이어가는 과정처럼 보인다. 우리라는 단어는 살갑고 정답게 느껴지지만 두 영화를 보고 나면 그 단어가 규정한 집단이나 무리에 소속되지 못한 이에게 정말 가혹하게 여겨질 수 있는 단어라고 여기게 됐다. 친구와 가족이라는, ‘우리’라는 소속감을 느낄 수 없는 이에게 주어지는 박탈감과 고독함을 실감하게 됐다고 할까. 그만큼 감독 스스로가 그런 외로움과 소외감에 민감한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닌지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라는 말에는 생각보다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이 담겨있다고 느꼈다. 우리 집이라고 하면 흔히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을 상상한다. 그런데 저마다 실제로 기억하는 우리 집은 각기 다르고 복잡하다. 겉으로 연상하는 이미지와 달리 그 안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그에 따른 반응도 제각기 다르고. 그렇지만 우리 집에 관한 이야기가 아주 특별한 경험담이 될 필요는 없을 거 같았다. 다들 보편적으로 ‘우리 집은 왜 이러지?’라고 느낀 경험들이 동일하게 존재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도 풍파가 많은 유년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생각하는데, 그 안에서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열심히 노력했던 기억도 난다. 다만 그 당시엔 친구나 가족 문제가 너무 큰 문제였던 시절이라 함부로 말도 못 하고 혼자 해결하려 애썼던 것뿐이다. 그래서 뒤늦게 알게 됐다. 그 당시의 나는 외로움을 느낀다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뒤늦게 그게 외로움이었다고 깨닫게 된 경우들이 있었던 거 같다.

그래서 <우리집>을 보고 어린 시절에는 이별이 참 힘든 일이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이사 가도 우리 언니 해줄 거지?”라는 유미(김시아)의 대사는 어린 시절에 가졌던 그런 마음을 돌아보게 만들더라.
아이들은 대부분 학교와 집을 오가며 생활하니까 동네를 벗어난 생활 반경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사란 삶의 모든 조건이 바뀌는 경험이다. 오랫동안 우정을 쌓은 친구들과 헤어져 다른 동네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야 하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해야 하니까 여러모로 충격과 공포를 느끼는데 정작 부모님들은 그걸 잘 몰라준다. 어른들 입장에서도 적응이 필요할 테니까 그만큼 아이에게 소홀해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아이들에게 이사는 정말 민감한 문제다. 그러니까 그런 시기에 옆에 있어주는 누군가가 생긴다면, 가족보다 더 진한 애정을 느낄 수 있고, 어쩌면 또 하나의 가족을 만드는 경험이라 여길 수도 있다. 그래서 유미에게는 하나와의 이별이 더 힘들 수밖에 없을 거라 ‘우리 언니 해줄 거지?’라고 질문하는 거고. 이사를 자주 다니면서 늘 동생을 챙겨야 하고, 친구를 사귀기도 어려운 조건 속에서 살고 있는 자신이 어디에 있어도 늘 내 언니라 말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결국 공간적인 거리감의 한계를 뛰어넘는 관계가 진정한 가족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유미의 질문은 하나에게도 큰 의미로 다가올 거라 생각했다. 자신의 가족을 지키고자 안간힘을 쓰는 하나에게 지금의 가족이 해체돼도 여전히 누군가의 가족일 수 있다는 답을 스스로 깨닫게 된 순간일 수도 있을 거 같아서. 그래서 그런 마음들이 관객에게도 전해지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어른이 된다는 건 만남과 이별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들에게는 헤어지는 게 너무너무 슬픈 일 같다. 촬영 막판에 스태프보다 어린 배우들이 훨씬 더 아쉬워했다. “이제 마지막이에요? 그럼 이제 못 만나요?”라고 말하는 아이들에게서 굉장히 절절한 마음이 느껴지더라. 어른보다 단순해 보이지만 보다 온전한 마음이 있는 것 같다. 그런 감각이 점점 무뎌지는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좀 더 절절하게 아팠을 그 시절에 내 감각들이 더 깨어 있었을 거 같고.

한편으로 아이들의 그런 마음을 어떻게 이리 잘 이해하고 반영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평소에 아이들을 관찰할 기회가 많았던 걸까 궁금하기도 하고.
어린 시절에는 자기감정을 정확히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고, 표현할 기회도 좀처럼 없었던 거 같다. 대부분 아이한테 발언권을 주지 않으니까. 아이 스스로 얘기할 수 있다는 생각을 잘 못하고. 그렇게 뱉지 못해서 쌓인 어린 마음이 내 안에 많이 남아있는 건 아닌지 생각한 적은 있다. 실제로 계속 그런 자극을 쫓아다녔던 것 같기도 한데, 한때 아이들을 상대하는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고, 성장문학이나 성장소설을 좋아하는 편이다. 지금은 촬영할 때가 아니면 아이들을 만날 기회가 좀처럼 없지만 아이들을 만나면 자꾸 어린 시절을 다시 경험하는 기분이 든다. 덕분에 시기를 좀 늦게 만났을 뿐이지, 마음속에 쌓아둔 이야기를 할 기회가 이제야 생긴 것 같기도 하다. 두 영화도 모래 속에 묻힌 무언가를 찾아내는 작업이 아니라 마음속에 갇혀 있던 이야기를 꺼내는 것에 가까웠다. 어쩌면 내가 좀 더 기억을 잘하고 있거나, 한 맺힌 게 많은 걸지도 모르겠다.(웃음)
<우리들>이나 <우리집>은 아이들의 세계도 어른들만큼 치열하고 지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로 해맑게 어울리지만 서로에게 날을 세우는 존재가 되기도 하고, 그러면서 극적인 긴장감을 높일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가장 어린 동생들의 귀여움이 객석의 심각함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우리들>의 윤이(강민준)와 <우리집>의 유진이(주예림) 같은 아이들. 어쩌면 두 배우가 현장에서도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 친구들 없었으면 현장 분위기도 달랐을 거다. 사실 유진이에게는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너는 이런 역할이야’까진 아니었지만 그런 역할이 돼 주길 원했다. 하나와 유미가 초등학생 5학년, 3학년에 해당하는 어린아이들임에도 집안의 무게를 온전히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게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라 질문이 생기더라. ‘이 아이들의 마음은 누가 위로해주지? 이 아이들이 어떻게 친해질 수 있지?’ 그래서 언니들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팔딱팔딱 숨 쉬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결과적으로 예림이를 만나게 돼서 다행이었다. 주예림 배우는 대기할 때에 한쪽 구석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기다리면서도 크게 힘들어하지 않았다. 언니들도 잘 따르고, 에너지가 넘쳐서 촬영도 재미있었다. 놀라운 친구였지. 그만큼 같이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고.

현장에서 어린 배우들의 컨디션을 조율하는 것도 관건이었을 거 같다. 아무래도 아이들의 체력이나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어른들과 다른 배려가 필요했을 것 같고.
매일마다 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였다. 어른 체력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생기는데, 아이들은 그런 순간에 더 빨리 직면한다. 한 시간 전에는 반짝거렸는데, 한 시간이 지나가니까 방전된 경우가 많아서 항상 예의 주시해야 한다. 게다가 작년 여름은 너무 더웠기 때문에 갑자기 체력이 확 꺾일 때도 있었고. 그런데 아이들이 힘들다는 걸 참고 말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게 다 눈에 보인다. 그래서 여유가 있으면 그런 마음을 미리 읽고 쉬자고 할 때가 있는데, 가끔씩 일정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지면 감독 입장에서도 힘들어진다. 그런데 아역 배우들이 생각보다 정말 잘 참고 견뎌준다. 배우로서의 책임감을 크게 느끼고 임하는 친구들이라 웬만하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한다. 심지어 연기에 몰입해서 본인들 스스로도 아픈지 모르고 연기할 때도 있고. 내 입장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을 때 결정하기 어렵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

어린아이들이라 배려가 필요하지만 배우로서 프로답게 임하는 걸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맞다. 아이들이니까 무조건 보호해줘야 한다는 관점으로 대할 수만은 없는 게 아이이기 전에 동료이니까. 그래서 동료로서 이런저런 논의를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재빠르게 보호자가 돼야 하는 상황들이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이 배우들과 함께 하는 성인 분들께 드리는 당부의 말’이라는 부제가 달린 ‘<우리집> 촬영 수칙’이 흥미롭더라. 0부터 8까지 총 아홉 개의 수칙이 제시됐던데 개인적으로는 ‘어린이들은 항상 성인 여러분을 지켜보고 있습니다’라는 8번 수칙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집>은 기본적으로 아이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영화이자 아이들의 시선으로 어른들의 세계를 관찰하고 짐작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집>은 어른들에게도 거울 역할을 해주는 영화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8번 수칙 자체가 마치 이런 관점 자체를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어른들과 한 집에서 함께 산다. 혼자 살긴 힘드니까. 그래서 아주 어릴 때부터 항상 어른들을 바라보고 지켜보며 어른들이 하는 행동을 습득하고 이해하려 하고, 그걸 내 식대로 해석해서 반응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지극히 본능적인 행동이고, 아이들의 삶이 시작되는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유미에게도, 하나에게도 문제라고 여겨지는 건 실상 부모의 문제인데 그걸 내 문제라고 생각하는 건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한 부분으로 자라왔기 때문에 그런 문제에 대한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런 마음을 이해하는 입장에서, 어른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주체가 돼서 풀어가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내가 좀 그랬던 거 같다. 그래서 가끔씩 그런 아이들이 등장할 뿐 정작 그 아이들의 심정을 잘 담아내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작품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화를 내고 있더라.(웃음) 그래서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다고 쓴 건가 싶기도 한데, 사실 이게 되게 무서운 말이다.

부모가 아이 앞에서 말도 조심해야 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거니까.
맞다. 그런데 쉽지 않지.
하나의 부모가 ‘내가 애를 낳고 싶어서 낳았어?’란 식으로 말하며 싸울 때 하나의 오빠인 찬이(안지호)가 방을 박차고 나와서 “이럴 거면 우리를 왜 낳았냐”라고 울분을 터트린다. 사실 어린 시절에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 적지 않은 거 같다.
이야기해보면 생각보다 부모님의 부부 싸움에 대한 경험들이 많이 겹치더라. 모든 집의 부부 싸움이 비슷한 단어를 동원하는 양상이라, 조사하면서 좀 놀랐다.

그래서 “우리 집은 도대체 왜 이럴까?”라는 대사는 아마 대부분의 어른들이 어린 시절에 한 번쯤 해봤던 물음으로서 공감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집>은 <우리들>과 달리 좀 더 너른 세계관의 질문을 가진 영화처럼 보인다. 아이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동시에 어른들의 세계를 관찰함으로써 아이들과 어른들의 세계가 병렬된다. 동시에 주요한 로케이션이 하나의 집과 유미의 집으로 나열되면서 <우리들>보다 주요 공간이 확장된 느낌인데, 그런 면이 두 작품을 관통한 감독 입장에서도 물리적인 차이로 다가오는 순간이 없었을까 궁금하다.
사실 준비하는 단계에서는 스케일이 커졌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오히려 <우리들>을 찍을 때 학교에서의 촬영을 소화하는 일정이 부담스러웠는지, ‘이번에는 학교가 안 나오니까 괜찮아’라는 안일한 마음을 갖게 됐는데 막상 프리 프로덕션을 진행하면서 ‘뭐가 많다’는 걸 알게 됐다.(웃음) 두 집을 계속 오가야 하고, 심지어 시골까지 내려가는 여정도 있으니까, 생각보다 <우리들>에 비해 더 많은 공간을 소화하는 동시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하는 공간이 늘어난 촬영이라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됐다. <우리들>에서는 집중해야 하는 공간이 선이 집에 국한됐는데, <우리집>에서는 하나 집도, 유미 집도 잘 보여줘야 하니까 생각보다 건드려야 할 게 많아졌다. 그래서 촬영하는 도중에도 시나리오 수정이 필요할 때가 생겼고, 그렇게 촬영을 이어가면서 알아가게 된 것들이 생겼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정작 나만 몰랐던 것 같다고 뒤늦게 생각했다.

<우리들>은 <우리집>과 비교했을 때 공간 자체가 캐릭터처럼 보이는 영화라는 점에서 차별점이 있는 것 같다. 하나가 사는 집과 유미가 사는 집의 차이 자체만으로도 전달되는 메시지가 있는 것 같고. 그만큼 공간의 미장센에 더 신경 써야 하는 측면이 있었을 거 같다.
일단 아이들의 경제적인 격차는 존재해야 하지만 그게 타워팰리스와 달동네 수준으로 벌어지는 건 아닌 거 같고, 비슷한 동네 안에서 소화가 될 만한 차이여야 한다는 의견이 모였다. 그리고 하나 집은 중산층에 준하는 수준의 규모감을 보여주면서, 유미 집은 너무 없어 보이거나 지나친 결핍이 느껴지는 공간이 돼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집마다 장점이 있되 대조적인 인상으로 다가오면 좋겠더라. 그 과정에서 미술감독님이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내주셨다. 하나 집은 가구나 인테리어가 어른들의 생각으로 결정된 것처럼 보이길 원했는데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한 10년 전쯤 구입한 가구들이 변화 없이 그대로 남아있는 느낌이면 좋을 거 같았다. 그러면 한 10년 전쯤 이사를 온 집에서 부모 간의 불화가 점점 심해지면서 집을 가꾸거나 인테리어에 신경 쓸 생각이 없어 보이는 느낌이 들 거 같았다. 그래서 무겁고 짙은 색의 식탁이나 고풍스러운 느낌의 가죽 소파를 세팅했고, 대체로 어지러운 분위기의 집 상태를 표현했다. 반대로 유미 집은 부모님들이 돈을 버느라 집에 부재한 상황이지만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느껴지는 분위기의 집이길 바랬다. 그래서 아이들만 방치된 집처럼 보이지 않고, 경제적 결핍이 상쇄되는 안온함이 느껴지면 괜찮을 거 같았다. 아이들이 그 공간에 머무르는 게 관객 입장에서도 안전해 보이길 바랬다. 그래서 모든 물건이 아이들의 손에 닿는 곳에 놓일 수 있는 높이를 맞추려 했고, 주로 밝은 색의 가구를 썼다. 그럼에도 이사를 자주 다니는 집이다 보니 흔히 주워서 쓴 듯한 가구처럼 허름한 느낌을 주는 것도 중요했다. 자세히 보면 책장들도 뒤가 막히지 않은 것들이다.

아역배우들과의 작업에서 중요한 건 아이들과의 친화력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들과 소통하는 게 그리 어렵게 느껴지는 걸까?
일단 나는 편한데 아이들도 편한지는 잘 모르겠다. 엄연히 다른 문제니까.(웃음) 그런데 어른들과 딱히 다른 건 없고, 그냥 말을 쉽게 하는 편이다. 어려운 단어를 안 쓰고, 풀어서 얘기하는 정도?
지금까지 단편영화 세 편과 장편영화 두 편을 연출했는데 단 한 번도 아이들이 없는 영화가 없었다. 아이들이 나오는 영화를 꾸준히 찍게 된 데에는 어떤 계기나 목표가 있는 걸까?
특별히 그런 결심을 한 건 아닌데, 일단 영화를 하고 싶다고 처음 생각한 건 중학생 무렵이었다. 뭔지 잘 몰라도 좋아하니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20대가 되니까 내가 어떤 영화를 만들 수 있는지, 좀 막막했다. 감독이라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강박도 느껴지고. 그런데 주변의 조언을 듣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의 이야기가 내 관심사인 걸 알게 됐다. 아이의 입장을 대변하자는 게 아니라 내가 여전히 아이들의 입장에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서, 어렸을 때 표현하지 못한 마음들이 아직 살아있는 것 같아서, 여전히 내게 아프게 혹은 깊게 남아 있는 일들이 기억나는 거 같아서 그런 걸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막상 한번 해보니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어른의 입장에서 원하는 그림을 구현해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의 속도에 천천히 맞춰가면서 이런 걸 하고 싶은데 같이 만들어 달라고, 나도 너한테 의지하겠다고 마음을 열면 생각보다 쉬워진다. 다만 윤리적으로 계속 고민되는 지점은 있다.

어떤 고민일까?
‘정말 이렇게 영화를 찍는 게 아이들에게 좋은 걸까? 실제로 배우로서 좋은 경험이 됐으면 좋겠는데 과연 이 시기를 좋은 경험으로 선사해주고 있는 걸까?’ 어른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고민이 계속 커진다. 물론 작업 자체는 정말 재미있다. 함께 출연하는 성인배우들도 정말 재미있다며 생각 이상으로 정말 좋아한다. 서로에게 마음이 열려 있다는 게 느껴져서 다른 현장에서 경험할 수 없는 재미가 있는 것 같다.

<우리들>의 선이도, <우리집>의 하나도 가족여행을 가지 못한다. 그런데 두 아이 모두 각자의 계기로 바다를 보게 된다. 두 아이가 원했던 여행으로서 만나는 바다는 아니지만 두 아이가 품고 있었던 마음속의 앙금을 떠밀려 보내는 계기로서의 바다가 되는 것 같긴 하다. 시각적으로도 탁 트인 느낌이라 영화에서 보이는 풍경들과 다른 시원함도 느껴지고.
사람들이 흔히 바다로 놀러 간다고 할 때 태양이 내리쬐는 반짝이는 백사장을 떠올린다. 그래서 그렇게 연상되는 바다와 전혀 다른 곳에 도달하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집>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바다에 도달한 아이들이 가진 감정이 중요했는데 그 감정이라는 게 하나나 유미 모두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라서 두 사람이 함께 도착한 곳이 세계의 끝에 다다른 것 같은,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는 공간이어야 했다. 그런데 산이나 호수보다도 바다로 막혀 있을 때 그런 느낌에 가깝지 않나 싶었다. 동시에 탁 트인 수평선이 주는 해방감도 있고. 바다가 그런 아이러니한 감정이 솟구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나아갈 순 없지만 시각적으로는 탁 트이게 환기를 해주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느낌이 드는 바다를 찾지 못해서 호수로 바꾸면 안 되냐는 의견도 나왔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호수에서는 그런 느낌이 들진 않더라.

결국 그 바다에서 대단한 절망감에 빠지기도 하고 극심한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끝내 아이들끼리 서로의 마음을 다독이고 더욱 돈독한 추억을 쌓는 계기를 만나기도 한다. 바로 버려진 텐트를 발견하게 되는 신인데, 이 신은 <우리집>에서 가장 독특한 장면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대단히 현실적인 톤을 유지하는 영화라 판타지 모험극 같은 장면처럼 보여서 상대적으로 생소하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다. 결과적으로는 힘들고 지친 여정을 지나온 하나와 유미와 유진이가 비로소 휴식과 웃음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는데 덕분에 세 아이와 함께 여정을 지나온 관객 입장에서는 함께 위안을 얻게 되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유일하게 현실감이 없는 장면이란 점에서 그 장면을 넣기까지 고민이 있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고민이 많은 지점이었다. 선택하기까지 스태프의 피드백도 굉장히 많이 받았고, 의견이 분분했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너무 지나친 판타지 같다는 사람도 있었다. 나 역시 판타지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너무 우연에 기대는 느낌이긴 해서. 임산부가 애를 낳으러 떠나는 바람에 텐트를 덩그러니 남겨두고 간다는 설정은 이 텐트가 오늘 밤 안에는 절대 돌아오지 않을 사람들의 것이고 덕분에 아이들이 여기서 안전하게 잘 수 있게 됐다는 증거를 제시하고자 마련한 선택이니까.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고집이 생긴 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족은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는 걸, 내가 원하는 형태대로 남아있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아이들이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아이들도 좀 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테니까. 꽉 붙들고 있던 문제를 딱 놓아버리는, 일종의 포기처럼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건 또 다른 도약이 될 수도 있는 거라고 믿었다. 다만 이 과정이 너무 아픈 것뿐인 거지. 우리 집이 이렇게 찌그러진 모양일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할 때, 그 아픈 순간을 지나온 아이들만의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에서 그 아픔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길 바랬다. 그런 여정을 지나게 만든 감독으로서 아이들에게 그나마 그런 순간을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어른들 때문에 이렇게 진탕 고생만 한 아이들이 어른들과 동떨어진 세계에 놓여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그런 순간을 아이들이 직접 만들어낸 순간일 수 있길 바랬다. 다만 그것이 좀 이상한 기적 같은 이벤트처럼, 판타지 같은 선물처럼 주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상 속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순간이라는 것도 이해해야 하니까. 어쨌든 셋을 한 집에 재우고 싶었는데 그게 하나 집이나 유미 집이 아닌 완전히 다른 아이들만의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아이들에게 그런 선물을 하나 해주고 싶었다.
아까 그 장면이 판타지 모험극 같다고 했는데, 그래서 왠지 윤가은 감독이 만든 <구니스> 같은 걸 보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실제로 재난물이나 좀비물 같은 장르물도 좋아한다고 말한 적 있고, <우리집>의 초안이 된 이야기가 아이가 아이를 구하는 이야기였던 만큼 뭔가 전혀 다른 ‘우리’ 유니버스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내심 궁금하다.
언젠가 그런 걸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다. 가족으로서 구성원 각자가 수행해야 하는 역할이 명확한 부분도 있겠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서로의 결핍을 보완해줄 수 있어야 유지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어른이 아이들의 결핍을 보완해줄 수도 있겠지만 부모의 부족함을 아이가 채워줄 수도 있다. 결국 함께 사는 사람들끼리 나눌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그걸 강하게 느낀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어른들은 자꾸 잊어버리는 거 같다. 손쉽게 아이들이 못할 거라 생각해버리고, 발언권을 비롯해 아이가 주도할 수 있는 기회를 좀처럼 주지 않는다. 실제로 아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듣지 않는 경우도 많고. 그런데 아이들은 이미 다 보고 있다. 그리고 가족으로서 구성원의 결핍을 충족시키고자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본능도 있는 거 같다. 그래서 어떤 조건에 놓이든 어른보다 아이들이 더 잘 적응하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어른들이 더 유연하지 못할 때가 많다. 나도 어른이 되면서 더 팍팍한 사람이 되는 거 같고. 그래서 재난물이나 좀비물 같은 데서 세상을 구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실제로 그럴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 아이들의 단순함이 사태를 정확히 직시하고 본능적으로 움직이게 만들 거 같고. 그래서 어린이판 <매드맥스> 같은 걸 찍으면 재미있을 거 같다고 혼자 머릿속으로 종종 상상해본다.(웃음)

<우리들>에 나왔던 배우들이 정말 많이 컸더라. 그래서 <우리집>은 <우리들>의 아이들이 그 세계 속에서 각자 잘 성장하고 있다는 기록처럼 보이기도 했다. 감독 입장에서도 굉장히 영화를 넘어선 경험으로 다가오는 의미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우리 아이들과 같이 한 순간들을 기록하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보이후드> 같은 영화를 보면 아이의 성장 자체를 보는 놀라움이 있다. 그것을 영화로 기록하고, 공유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한 경이로움이 느껴진다고 할까. 그런 걸 지켜보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차기작을 찍을수록 점점 카메오 신이 늘어나는 게 아닐까?
결국 카메오만 나오고 이야기가 산으로 가는 영화가 나올지도?(웃음)

그럼 진정한 윤가은 유니버스가 되겠다.
(웃음)


사진_장성용 (스튜디오 비웨이브/스튜디오 그린비)


2019년 8월 23일 금요일 | 글_민용준 영화 저널리스트(mingun@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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