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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사랑의 근원을 찾아서 <폴란드로 간 아이들> 추상미 감독
2018년 10월 31일 수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자식을 향한 과도한 애정은 때론 불안과 강박을 낳기도 한다. 결혼과 출산과 양육의 과정을 거치며 추상미 감독 역시 이런 감정에 사로잡힌 시기가 있었다. 불안정한 감정과 우울함에 빠져 있던 당시 그녀는 북한 전쟁고아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었던 폴란드인 선생님들의 사연을 접하게 됐고, 그들이 베풀었던 순수한 사랑의 근원이 궁금해졌다. 두 편의 단편 작업 끝에 장편을 준비하던 그녀는 그렇게 영화의 소재를 찾았고 조사차 폴란드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마침내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생전 처음 본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의 동양인 아이들을 마치 분신처럼, 과거의 자신들처럼 여겼던 폴란드 선생님들. 그들은 단지 선행을 베푼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과 같은 상흔을 지닌 아이들을 보듬고 품음으로써 그들 역시 치유 받았던 것이다. 그분들의 생생한 사랑의 목소리를 전하고 싶었기에 그녀는 준비하던 극영화를 잠시 미루고 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먼저 내놓기로 했다. 작업을 통해 아이를 향한 불안한 애정이 건강하게 바뀌었고 모성의 확장을 경험했다는 추상미 감독. 예술을 하면서 놓으면 안 되는 가치 혹은 토양을 얻은 값진 경험이었다고 폴란드에서의 시간에 각별함을 드러낸다.

한국전쟁 당시 전쟁고아가 동유럽에 보내졌다는 사실을 몰랐던 사람이 많다. 잊힌 역사적 사실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의의가 크다.
앞으로 더 많이 알려져야 할 거다. 폴란드뿐만 아니라 다른 동유럽 국가로도 보내졌을테니 방송에서 기획 시리즈로 다뤄졌으면 좋겠다. 10년 전쯤 스페셜 다큐에서 루마니아 사례를 한 번 다룬 적이 있다. 북한 인솔 남교사와 사랑에 빠졌던 여성의 사연이었다. 몇 년간 함께 보낸 후 북송됐고, 겨우 생사를 확인했지만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들었다. 이후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았다고 하더라. 이후 (자기만의) 북한-루마니아 사전을 만들며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사실 그 이야길 영화로 만들지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엔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동일 소재인 극영화 <그루터기들>(가제) 를 만드는 과정에서 먼저 선보인 다큐멘터리다. 취재기를 오픈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후 <그루터기들>을 향해 관심이 높아질 수도 있겠지만, 이미 언급된 얘기이기에 관심이 식을지도 모른다. 감독으로서 모험일 수 있는 선택이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폴란드 선생님에 초점을 맞췄다면 <그루터기들>은 좀 더 아이들 위주의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그루터기들>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좋겠지만, 일단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이후 나올 영화의 홍보를 목적으로 만든 건 아니다. 몇 번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루터기들>의 시나리오를 쓰던 중 마지막 완성을 위해 취재차 폴란드를 방문했었다. 그곳에서 당시 북한 고아들을 돌봤던 선생님들을 뵙고, 생생하게 그분들의 목소리를 전하고 싶었는데 그분들이 노령이라 지체할 시간이 없겠더라. 새로운 다큐를 기획하고 플랜을 짤 시간이 없었기에 인터뷰하고 그들의 증언을 받아 적는 등의 극영화 준비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다.

준비 중인 극영화에 탈북자를 조·단역으로 캐스팅하고 그중 한 명(이송)과 폴란드에 동행한다. 탈북자를 염두에 둔 이유는.
<그루터기들>은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이고 북한 고아들이 등장한다. 배우들이 북한 사투리를 연기로 훌륭히 소화할 수 있겠지만, 진짜 북한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을 거다. 내가 배우 출신이라 그런지 사실적으로 보이는 걸 중시한다. 탈북 아이들은 어딘가 그 시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거의 유치원때부터 일인 일 악기 교육을 받고 자주 행사에 동원되기에 무대에 익숙한 아이들이 많았다. 또, 전통춤 등을 비롯해 한국적인 모습이 많이 남아 있었다. 재능 있는 아이들이 아주 많은데 영화 속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루터기들>의 진척 정도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야지! 크랭크인 들어가기 전에 몇 주 정도 합숙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남북한 아이들이 함께하면 문화와 문화가 섞이면서 상대에게 흥미를 가질 것 같다. 기획 중이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에 대해 얘기해 보자. 극 중 70년이 지난 후에도 폴란드 교사들이 엄마, 아빠, 빨리빨리 등 한국어를 기억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토록 긴 세월이 지났는데 말이다.
내가 방문한 때가 북한에서 왔던 소녀 ‘김귀덕’을 주인공으로 한 폴란드 방송이 제작된지 10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그들이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는데 기억하고 있더라. 물론 365일 24시간 내내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만, 내가 그 기억을 들추어내는 순간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목격했다. 여전히 아이들을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울먹이시더라.

극 중에서 폴란드 선생님들이 보여준 사랑의 근원에 대한 궁금증이 영화 시작의 계기였다고 밝혔다. 해답을 찾았는지.
요제프 원장님이 말씀하시길, 까만 눈동자와 까만 머리칼을 지닌 동양 아이들을 생전 처음 보며 당신의 유년 시절이 떠올랐다고 하셨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 중 가장 뜻깊은 시간으로 아이들과 함께했던 시간을 꼽으시더라. 그 모습을 보며 내가 얻은 결론은 아이들을 보듬고 품음으로써 그들이 받았던 끔찍한 전쟁의 상흔을 치유한 게 아닐까 하는 거였다.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 연민과 공감을 가지는지, 선행하는지는 각자 다를 거다. 하지만, 단순히 선행했다고 그 일을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지는 않을 것 같다. 폴란드 선생님들은 단순히 구제 차원이 아니었던 거다. 북한 고아들이 오기 7~8년 전인 2차대전 막바지에서 폴란드인들은 극도로 참혹한 인간의 존엄이 말살된 상황에 처했었다. 요제프 원장님은 북한 아이들이 폴란드에 오기 전에 이미 한국전쟁을 방송이나 매체를 통해 알고 있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지 걱정했고, 공중 폭격을 당한 북한을 보며 바르샤바 폭격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러던 중 마침 북한 아이들을 맡게 됐던 거다. 그렇기에 단순한 연민이나 불쌍하다는 동정이 아닌 마치 분신 같았던 거겠지. 혈육이 아니지만, 또 다른 혈육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극 대부분이 폴란드 선생님의 증언으로 구성된다. 아이들의 그 이후 이야기가 없는 점이 아쉽더라.
당시 북한으로 돌아갔던 아이들에 대한 자료가 많지는 않지만 있긴 있었다. 돌아간 그들이 외국어에 능통하니 북한에서 엘리트층을 형성하고 외교관이나 교수로 재직했다고 들었다. 그 이야기를 자막으로 전달할 수도 있었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요제프 원장님이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전해 달라고 얘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까지가 개인적으로 좋았다. 그 말을 듣고 통일이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라고 생각했거든. 그보다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를 선보인 후 속속들이 밝혀지는 진실들에 소름 돋더라.

예컨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GV를 진행하는 데 관객이었던 한 탈북민이 고등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이 폴란드로 보내졌던 전쟁고아였다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고위 간부였던 자신의 아버지가 폴란드로 간 아이였다고 하는데, 몇 가지 사례를 보면 그 아이들이 대부분 엘리트층을 형성한 건 맞는 거 같다. 또 그 아이 중 한 명이 탈북하여 남한에 거주하다가 작년 간암으로 돌아가셨다는 걸 알았다. 돌아가시기 전에 뵐 수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아쉽다. 그분이 생전에 폴란드 이민을 준비했었다는데, 그 이야길 듣고 꼭 자신이 태어난 물리적 공간만이 고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남한에서의 삶이 녹록지 않았나 싶어 마음 아프더라. 지금 바라는 건 폴란드로 보내졌던 아이 중 혹시 탈북하여 남한에 거주하는 분이 있다면 꼭 만나고 싶다는 거다.

요제프 원장님을 비롯해 여러 폴란드 선생님의 인터뷰가 이어지는데, 인터뷰를 거절한 교사도 있었다고 들었다.
여교사 중 한 분이 인터뷰를 거절하셨다. 후에 북한에 방문하여 예전에 자신이 돌봤던 아이들과 사진 찍고, 북한 정부에서 감사패도 받았던 분으로 친북한에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분이셨다. 정치적 영화가 아니라고 설득했지만, 남한 측 사람과 만나기 싫다고 강하게 거부감을 표하셨다. 폴란드가 자본주의화 되었지만, 나이 든 분들 중에는 배급받으며 안정적으로 생활하던 사회주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분이 꽤 있다고 들었다.

극 서두에서 늦게 얻은 아이가 소중한 나머지 아이를 향한 불안과 강박이 심해졌고 우울증 비슷한 시기를 겪었다고 밝혔었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치유와 회복을 얻었는지. (웃음)
그래서 이 여정에 감사하다. 집착과 애정이 긍정적이고 건강하게 바뀌었다. (웃음) 또, 내가 예술가의 길을 걸으면서 놓치면 안 될 가치 혹은 토양 같은 걸 얻었다. 특히 요제프 원장님과의 만남은 마치 멘토, 인생의 스승을 얻은 듯한 느낌이었다. 이번에 직접 (한국에) 모시고 싶었는데, 현재 93세의 노령이시라…. 완성된 영화를 보고 많이 우셨고 잘 보셨다는 소감을 전해 들었다. 우리 영화를 본 모습을 촬영한 동영상이 있는데 표정을 보고 싶었는데, 원장님의 뒷모습만 찍혀서 아쉬웠다.

극 중 당신이 이송과 상처를 주제로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다. 배우에게 상처란 무얼까.
상처란 내게 어떻게 보면 끊임없는 화두인 것 같다. 예전에 내놓은 단편 두 편 역시 상처에 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유년 시절 상처가 많았다. 가장 큰 상처를 꼽는다면 사랑했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일이다. 당시 열네 살 사춘기였는데, 이후 입시가 있으니 공부를 계속해야 했다. 내 안의 상처와 대면할 기회가 없었고 풀지 못하고 간직한 채 살았다. 배우로 무대에 서면서 비로소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이 얼마나 컸던 건지 실감했다. 감사하게도 상처받은 인물을 연기하다 보니 내 안의 상처가 터져 나오고 치유가 되더라. 드라마 테라피 같다고 할까. 연극이 정말 많이 도움 됐었다.

송이도 나와 같은 경험을 하면 좋을 거 같아서 극 중 그런 질문을 던져 봤었다. 그녀는 진취적이고 외향적인 성격으로 남한에 왔으니 과거와 단절하고 싶고 마음에 품고 있는 상처를 잊어버리고 싶어 한다. 아직 어리기에 잘 모르겠지만, 그러다 보면 언젠가 깊숙한 곳에서 그 상처가 올라오게 돼 있다. 다만 내가 간과했던 게 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로 남한에 정착하기 전에 일정 기간 국정원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태어나서 그때까지 살아온 모든 기억을 이야기했다고 하더라. 탈북민들은 그 조사 트라우마를 다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미처 몰랐던 부분으로 나중에 알고 송이에게 많이 미안했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4년간 작업한 결과물이다. 처음 시작할 당시와 비교하면 국내 정치 사회 상황은 물론 북미 관계 역시 훈풍이 불고 있다. 달라진 정세를 바라보는 심정이 남다를 것 같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서로 으르렁거리고 사회적 분위기 역시 인도주의적 지원도 끊자는 분위기였으니 북한을 품자는 다큐멘터리가 세상에 나올 수 있을지, 완성한다 해도 과연 배급할 배급사가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했었다. 또, 작년에 영화 작업을 도와주던 스태프들이 다 떨어져 나가며 가장 힘들었다. 나 혼자 편집해야 했고 아들이 소아 사춘기를 겪는지 말도 안 듣더라. 덕분에 남편이 모니터링 고문을 당했다.(웃음) 난 하도 계속 보다 보니 나중에는 내용이 잘 들어오지도 않더라. 신앙의 힘으로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2018년 되면서 기적처럼 분위기가 바뀌었다. 남북회담에 가장 기쁘게 만세를 부른 국민이 아마도 나 아닐까 한다.

다음 작품은 <폴란드로 간 아이들>의 극 영화 버전인 <그루터기들>일 것 같다.
아마도. 이번에 작업하면서 근현대사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역사적 성찰 없이 넘어간 지점이 매우 많더라. 해서 그 시기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우장춘 박사를 비롯해 독립운동가, 한국전쟁 당시의 상황 등 역사의 상처가 다른 각도로 조명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과 이후 분단을 거쳐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프레임이 생기고 상대를 향한 증오가 강해졌다고 본다. 폴란드 선생님처럼 우리가 간직한 상처를 어떤 방법으로든 치유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 상처가 결국 남북을 하나로 만드는 힘으로 작용할 거로 본다.

요즘 관심을 기울이는 이슈가 있다면.
비슷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사회에서 일어나는 아픔과 상처에 주목하게 된다. 우리 사회를 먼발치에서 거리를 두고 보면 소통이 힘들고 공감 없고 상식적으로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누군가 우리 사회는 공감 제로 사회라고 표현했는데, 일부분 동의한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명확한 장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정의에 민감하고 옳고 그른 것을 변별할 힘이 있다는 거다. 하지만 연민은 정의와 다르다. 상대가 옳아서가 아니라 측은지심을 가지고 품을 필요도 있을 거다. 연민의 근원이 모성과 부성이 아닐까 한다. 이런 모성과 부성이 확장될 때 우리 사회도 점차 치유력이 생기지 않을까. 이번 작업을 통해 모성의 확장이라는 값진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첫 장편인데 제작에 어려움을 겪진 않았는지.
다행히 이번엔 지원받았기에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현재 1인 법인인 ‘보아스 필름’을 설립, 운영 중이다. 사무실은 내 서재다. (웃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앞으로 투자 유치 등 어려움이 많겠지. 혼자 작업하고 결정하려니 배워야 할 게 많더라. 어떻게 하면 통찰력 있게 잘, 최대한 실수를 적게 하고 오류를 줄일지 고민 중이다.

마지막 질문! 최근 행복했던 일이나 인상 깊은 순간이 있다면.
영화 작업 때문에 아들과 많은 시간을 못 보냈었다. 그런데 내가 제대로 돌보지 못한 동안에 마치 누가 돌봐 준 것처럼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더라. 현재 초등학생인데 학교에서 친구들이 너희 엄마 TV에서 봤다고 해서 우리 아들이 영화에 자기도 한 장면 나온다고 말하니 자기네끼리 ‘극장에 가서 볼까’ 이랬다는 거다. 귀엽지 않나! 그런 얘기를 전해 들으면서 엄마가 영화를 만드는 게 한때는 아픔이었는데 이제는 자랑이 됐구나 싶었다.


2018년 10월 31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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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_언니네 홍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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