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애니메이션의 연출은 <퍼펙트 블루>의 콘 사토시 감독이 맡았다. 1982년 「영매거진 (ヤングマガジン)」을 통해 만화가로 먼저 데뷔했던 그는 자신의 단행본 작품 『월드 아파트먼트 호러(ワ-ルド アパ-トメント ホラ-)』가 만화화되면서, 애니메이션의 매력에 빠져들었다고.
그후 <기동경찰 패트레이버2(機動警察パトレイバ-2)>에서 레이아웃, <메모리스: 그녀의 추억(MEMORIES 彼女の想いで)>에서 각본 등을 담당하면서, 다양한 실무 경험을 쌓게 된다. 이러한 노하우를 살려 사토시는 1998년, 자신의 첫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작품인 <퍼펙트 블루(Perpect Blue)>를 내놓은 것.
해외영화제에서 ‘새로운 장르의 일본 애니메이션의 탄생’이라는 절찬을 받았던 사토시는 가장 최근 작품 <동경대부(東京ゴッドファ-ザ-ズ)>(2003)가 작년에 미국과 일본에서 동시개봉된뒤, 그의 전작들과 함께 높은 평가를 얻기도 했다.
2001년 작품이니 역시나 늦은 개봉에 대한 아쉬움은 들지만, <천년여우>의 국내개봉은 아니메 팬들에겐 무척이나 반가운 일일 듯 싶다. <천년여우>의 각본은 <퍼펙트 블루>에 이어 무라이 사다유키가 다시 한번 사토시와 호흡을 맞췄다. 히라사와 스스무의 멋진 음악과 현실과 환상의 절묘한 중첩이 보는 사람들의 눈과 머리를 정신없이 흔들어놓는 <천년여우>.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기에, 감독과 각본가의 얘기를 살짝 들어보았다.
콘 사토시: 전부터 생각해온 것이 아니라 기획하는 단계에서 생각해낸 이야기에요. 일편단심이라는 것도 처음부터 생각한 게 아니라 우선 관객이 상상할 수 없는 영화를 만들자 해서 거기에 걸맞게 ‘여배우’란 설정을 하게 된 거죠.
일편단심은 복잡하게 엉킨 에피소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했습니다. 거기에 극적인 뒷얘기는 없이 나와 있는 아이디어를 그 가능성에 맞춰 더욱 좋게 키워나가는 정도의 노력이 있었을 뿐이죠. 주인공인 ‘치요코’의 경우 구체적인 모델은 없지만, 갑자기 은퇴해서 모습을 감춘 건 ‘하라 세츠코’씨, 전쟁 후 일본 국민에게 밝은 희망을 가져다 준 의미에서는 ‘타카미네 히데코’씨를 이미지화 했습니다.
전작 <퍼펙트 블루>에서의 현실과 허상의 이중 구조가 이번 영화에서도 엿보이는데요.
콘 사토시: <퍼펙트 블루> 때는 현실과 허상을 혼동시킴으로써 주인공이 느끼는 불안이나 만취감 같은 걸 관객들에게도 느끼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무라이씨와 의견을 같이 했어요. 다만 <퍼펙트 블루>에선 허상과 실제의 혼동은 충격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이번에는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 이미지의 모험을 즐겨주셨으면 해요.
각본에 많이 신경을 쓰신 것 같아요.
무라이 사다유키: 여주인공의 일생, 여자로서의 일생을 묘사함과 동시에 일본의 근대사 같은 걸 떠올리실 수 있었으면 했어요. 신경을 썼다고 한다면, 여주인공이 말하는 것의 현실성, 즉 ‘그녀가 말하는 것이, 사실상 어떠했는가보다 더 중요하다’라는 걸 떠올릴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서 썼죠.
많은 이미지를 겹쳐서 사용하셨는데, 그 안에 어떤 상징적인 의미들도 담겨있나요?
그런 것 같다는 건 처음부터 정확하게 의도한 게 아니라 어딘가 나의 무의식에서 그걸 원했다고나 할까. 그게 콘티를 그려가며 이미지를 구체화시켜가면 ‘어? 또 폐허네, 그렇구나, 그런 의미구나’하고 만들어나가면서 발견하고 다져나가는 거죠.
‘달린다’라는 행위도 그래요. 처음엔 단순히 두 다리를 이용해 달리는 운동이 시간이 지날수록 말에서 자전거로, 다시 자동차, 기차, 전차, 배, 그리고 로켓까지 갔어요. 서양 근대 과학의 역사인 거죠. 하지만 최종적으로 그녀가 목표로 한 건 근대 과학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곳이에요. 그렇게 생각하면 처음에 나온 로켓은 과학의 상징이지만, 마지막에 나오는 로켓은 과연 뭘까 하는 식으로 생각하게 됨으로써, 관객들도 더욱 즐길 수 있게 될 거에요.
표면상의 이야기와는 별도로, 여러 가지 흐름을 중복시켜서 만든 작품이라 관객들 각자가 나름의 관점을 발견해주시면 좋겠어요.
인간의 일생을 그리는데 있어서 연대를 나눈다든지 표정, 캐릭터 디자인에도 신경을 쓰셨겠군요.
무라이 사다유키: 세월을 넘어서 치요코가 보이는 행동의 동일성에는 ‘갇혀 있는 곳에서 탈출하는 사람으로 해야지’라고 의도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갇혀 있다는 건 촬영소의 시스템에 맞게 짜넣어진다는 거죠. 언제나 치요코는 그 장소에서 계속 도망치고자 하는 행동을 취해요. 처음 만주에서도 도망쳤고, 유곽에서도 도망치는 모습 등으로요. 갇힌다는 건 우리들이 현대사회에서 그 시스템에 순응해 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치요코의 경우 사랑의 힘을 통해 그 안에서 한발 빠져나가는 쾌감 같은 걸 그려내고 싶었죠. 하지만 시마오 나가코가 언제나 그걸 막게 돼요.
치요코가 좋아하는 남자를 쫓아가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점에서, 그녀가 아버지 없는 가정환경이겠구나라고 관객들은 생각할 거에요. 그녀가 쫓았던 건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하는 것보다 내면의 아버지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영원한 남성상…음, 부족한 지식으로 이렇게 말하는 건 좀 그렇습니다만 ‘아니무스’라고도 말할 수 있어요.
아니무스: 스위스의 심리학자 C.G. 융이 제창한 심리학 개념. 여성의 무의식속에 존재하는 원형으로서의 남성상. 그 반대로 남성 속에 있는 여성상은 ‘아니마’라고 함.
인터뷰를 하는 ‘타치바나’가 후반이 되면, 사실 여배우 시절의 ‘치요코’와 깊은 관계가 있는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되잖아요. 어떤 의도가 있었나요?
무라이 사다유키: 우선 치요코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건 치요코 밖에 모르는 부분으로, 치요코의 내부 묘사에요. 하지만 관객들이 거기에 더해 타치바나의 이야기를 알게 됨으로써, 두 사람의 이야기를 더욱 상위개념의 이야기로 보게 되는 구조로 만들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이 두 이야기가 합쳐져서 비로소 <천년여우>라는 영화의 전체가 보이는 거죠. 치요코의 이야기만으로는 그녀의 주관적 부분 밖에는 알 수가 없어요. 거기에 타치바나의 이야기가 들어감으로써 그녀의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한번 볼 수 있는 거죠.
감독의 기획에 의한 첫 오리지날 작품인데요,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요?
콘 사토시: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지만, 받아들이는 게 어려웠던 것 같아요. <천년여우>의 내용을 들으면, 업계에서는 도장으로 찍은 듯 ‘수수하네’라는 말이 돌아왔거든요. 실제로 완성한 뒤엔 시사회나 비평 등에서 ‘아주 애니메이션답고 자유분방한 발상이며 재밌다’와 같은 말을 들었죠. ‘화려하다’는 말은 못 들었지만요.
‘왜 애니메이션다운 걸 안 만드는가?’라는 말을 계속 듣다 보니, ‘모두가 애니메이션답다고 생각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라는 삐딱한 마음이 상당히 팽배해 있었거든요. 그런데 나중의 사람들의 평은 저에겐 큰 격려가 됐고, ‘것봐라’ 하는 생각도 들었죠. 무엇에 대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요….(웃음)
자료제공: 프리비젼